[Merlin-멀린] 그 날의 어둠 속에서
삼하인 밤 이후로도 힘들어하는 멀린을 다독여주는 가웨인과 아서.
*
시즌 4의 1,2화 보고 나서 스스로의 멘붕을 치유하기 위해 갈겨본 글입니다. 그러므로 온통 스포...
대체 이건...-_-;;
건전하고, 답지않게 연약섬세한 신파조의 멀린이 나와부럿네요...게다가 섬세한 남자 가웨인까지...말도 안돼!
그냥 간당간당 우정물- 이랄지. 커플링을 밝히라면 가웨인->멀린->아서...정도가 될려나요. 피식
쵸건전하다고는 해도, 약간 BL분위기가 느껴지는 글입니다. 싫어하시는 분은 뒤로가기-
챙그랑-
아서를 비롯한 몇몇 대신들은 소리가 난 쪽으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린의 손에서 떨어진 물병이 아직도 바닥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회의시간 동안 자잘한 시중을 들기 위해 옆에있던 시종이 잠깐 졸기라도 한 모양이라고, 별일 아니라고 판단한 대신들은 흘긋 그쪽을 쳐다봤을 뿐 이내 고개를 돌리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서는 멀린의 칠칠맞음에 혀를 차며 무슨 말이라도 해줄까 하고 멀린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멀린은 무언가에 놀란 듯 잔뜩 굳어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한 일 때문은 아닌 듯 했다. 정신없이 한 곳에 못박힌 시선. 아서는 그 시선의 끝을 따라가보았으나 별 다른 것은 없다. 그저 맞은 편 벽의 구석진 곳.
벽에 높게 걸린 창문에서는 늦은 저녁의 석양이 점점 기세를 잃어가며 따듯한 석양과 섞여 푸르스름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휘장과 커튼 등으로 가려진 창 아래는 이미 싸늘한 어둠이 내려깔려 있다. 점점 퍼져가는 어둠에 눈을 뺏긴 듯 했다. 멀린의 얼굴에 석양의 빛이 비춰들며 그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지만, 그의 크게 치켜뜬 눈동자의 동공은 마치 어둠 속에 있는 듯이 잔뜩 확장되어 있었다.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아서의 눈빛을 눈치챘는지 멀린은 퍼득 정신을 차리고 누구에게랄것도 없이 작게 사죄의 말을 한 후, 황급히 물병을 주워올렸다. 몸을 일으키며 둘의 눈이 마주쳤으나, 평소같으면 자신의 실수에 멋쩍게 웃기라도 했을 멀린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듯이.
멀린은 조급한 움직임으로 주위의 촛불을 켜기 시작했다. 홀 안에 은은한 초의 빛이 퍼져나감에 따라 그는 조금씩 안정을 찾는 듯 했다.
가장 어두웠단 몇일간. 도로카들의 공격이 있었던 일 이후로도 멀린에게는 그날의 공포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아서는 그때만큼 멀린이 약해보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여행길이라도, 아무리 깊숙한-빛 한줄기도 들어오지 않는 깊은 동굴에 있다 해도 무모할 만큼의 용기를 보여주던 멀린이었다. 그 비실비실한 몸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오는지, 언제나 아서는 놀라곤 했었다.
축복받은 섬으로 향할때도 그랬다. 그는 분명 눈에띄게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자신을 위해 위험에 뛰어들만큼 무모한 용기와 충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엔 분명- 그런 모든 것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멀린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끝났어. 넌 어째 하루라도 덤벙대지 않는 날이 없냐?"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빠져나가기 시작할 때 아서는 구석에 서있던 멀린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멀린은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 네가 졸릴까봐 한번 깨워준거지 뭐."
"허? 네가 존게 아니고? 거참 고맙게 됐네! 아아..멀린, 말로는 끝까지 안 지지... 됐다. 그만 방으로 가야겠어."
"네네- 알겠습니다. 전하."
복도를 밝히며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서의 뒤를 따라가며, 멀린은 조심스레 주문을 속삭혔다. 펼쳐본 그의 손바닥에서 작은 불꽃이 넘실거렸다. 그걸 확인한 멀린은 안도하며 다시 황급히 손바닥을 그러쥐었다. 그의 마법력은 그대로였다. 영계와의 경계가 허물어졌었던 그 날, 자신의 몸을 빠져나갔던것 같았던 마법력은 그 찢어진 공간의 틈이 메워지고 나자 거짓말처럼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때때로 멀린은 그때같은 공허한 감각을 느꼈다. 자신이 서 있던 기반이 무너져내리며 끝을 알수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듯한 오싹함. 스스로의 존재도 힘도 통하지 않는 질서를 가진 세계가 존재한다는 깨달음은 마치... 예정된 죽음과 일찍 맞닥뜨린 듯한 경험이었다.
아서를 지키기는 커녕 자신의 존재가 사라질것만 같았던 공포.
이제 밤시간이 되어 주위는 완전히 어둠으로 둘러싸였다. 아서의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 정리를 마친 멀린은 아서가 눕는 것까지 보고는 다시 한번 주위를 체크했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고 이상한 점은 없다.
멀린은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는 마지막 초를 불어 끄려 했다가 잠시 멈칫했다. 방문까지는 어둠이 깔려있다. 하루에도 몇번이나 오간, 이젠 눈 감고고 오갈 수 있을만큼 익숙한 아서의 방이었지만, 어둠 속에 묻혀 실루엣만이 어른거리는 그 곳은 갑자기 이상하리만치 낮설게 느껴졌다.
멀린은 초를 들고 나가기로 정하고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조심스레 발자국을 떼기 시작했다. 초를 세워든 손이 가늘게 떨린다.
'엠리스...'
그때의 스산했던 목소리가 기억에서 되살아났다.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춘 멀린은 자신을 보호하듯 초를 더 앞으로 내밀며 주위를 확인했다. 그 움직임과 동시에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바람에 촛불은 금새 꺼져버렸다. 멀린은 숨을 삼켰다. 어둠이 몸을 감싸옴에 따라 비논리적인,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가 멀린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멀린"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아서의 목소리에 놀란 듯 멀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미약한 별빛이 아서의 모습을 비췄다. 어둠 속에서 그 곳은 너무나 밝아 보였다. 그래, 아서가 있었지.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그의 모습에 멀린은 조금씩 긴장이 풀려나가는걸 느꼈다.
멀린이 미약한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아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멀린은 그때의 기억에 괴로워하고 있는 듯 했다. 회의실에서 보았던, 잔뜩 확장된 그의 검은 동공을 아서는 기억해냈다. 그는 어쩌면, 자신은 볼 수 없는 무언가와 맞닥뜨렸던 것일 수도 있다. 멀린은 좀 특이한 면이 있으니까. 바로 커튼 뒤에 도사린 어둠 조차도 두려워하던 멀린의 모습.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은 일단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경험은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아서를 대신해 도로카에게 공격당했던 일, 그리고 어둠에 삼켜진 란슬롯.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용감했던 시종을 어느정도 변하게 한 것이 분명했다.
"미 미안, 뭔가 까먹은 기분이어서 잠깐 생각해봤는데, 아무것도 아니네. 아하하"
아서의 걱정스런 시선을 오해한 듯 멀린은 황급히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숨을 한번 내쉬고 주먹을 한번 꽉 그러쥐더니 다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휘청이며 걸어가던 멀린은 근처의 기둥에 기대었다. 잔뜩 경직된 멀린의 어깨가 어둠 속에 보였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던 아서는 다시 손을 갈무리했다. 내가 대체 그에게 뭘 해줄 수 있겠는가? 다만 시간이 그를 낫게 해주길 바라며 믿음을 갖고 기다릴 수밖에. 이제 방문을 연 멀린은 희미한 복도의 불빛을 남기며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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펍의 불빛은 늦은 밤의 어둠까지 비춰내며 밝게 빛났다.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와 술냄새를 주위로 느끼며 멀린은 차라리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도저히 오늘은 일찍 잠들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든 기분을 돌려보고자 발걸음을 옮긴 술집. 적어도 여기라면 늦게까지는 열 것이고, 아마 지금 시간에는 카멜롯 내에서 가장 밝고 시끄러운 곳 일 것이다. 멀린은 비어있는 구석자리에 대충 앉아 주문한 벌꿀술을 홀짝이기 시작했다.
어둠은 어디에나 있다. 빛이 있는 곳이라면. 멀린은 구석진 탁자 사이로 흘러내리는 그림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신이 지독한 겁쟁이처럼 느껴졌지만, 기억에 남은 그 한기까지는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래, 엠리스. 네가 너의 왕자를 대신하여 영혼들에게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이냐?'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던 공간의 파수꾼, 케일릭스의 질문에 멀린은 단호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말의 진의를 확인하듯 응시하던 그 무기질적인, 차가운 눈.
이전 어느때 보다도 가깝게 느낀 죽음의 공포 후에 선택한 길이었다.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우선순위에 그가 있었다. 하지만 그 운명조차도 멀린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란슬롯.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가던 그의 뒷모습이 뒤이어 떠올랐다. 마치 지금도 앞에 펼쳐질 듯 생생하다. 내가 그의 앞에서 잘난 듯이 내 목숨을 아서 대신 바치겠다고 했었던가. 하지만 결국 그 차가운 어둠속에서 죽음을 맞은 건 당신인데.
기사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자신의 비밀을 알고 지켜주었던 진실한 기사. 기사이기 이전에 그의 존재가 얼마나 자신에게 힘이 되었는지를 떠올리면 멀린은 더 가슴이 아파왔다. 이젠 더이상, 위기를 알고 달려오던 그의 든든한 손, 모든걸 이해한다는 듯이 빛나는 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멀린은 또 세상에 홀로 남겨졌진 기분에 휩싸였다.
"멀린-"
"?! 란스..."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 본 곳에는 기사 제복이 아닌 편한 복장을 한 가웨인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멀린을 내려다보고있었다. 너무 감상에 잠겨 있었던 건지 자신도 모르게 란슬롯의 목소리라고 생각해버린 멀린은 스스로를 향해 쓰게 웃었다.
"음? 나야 나. 뒷모습이 너무 비슷해서 설마 했는데 진짜 너일 줄이야. 이시간에? 멀린이, 술집??"
어깨를 으쓱해보인 가웨인은 비어있는 앞쪽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그 특유의 커다랗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맥주를 주문하고는 이내 앞에 앉은 멀린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뭐, 뭐야...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이상해서 그러지. 너 이런데 좋아하긴 해도 자주는 안 오잖아. 게다가 혼자서는 더더욱."
"그럴수도 있지 뭐. 그러는 너도 혼자 온거 같은데?"
"다들 꼬셔봤는데 실패했지. 퍼시발도 오늘따라 피곤하다고 거절하질 않나... 쳇, 뭐 알다시피 난 혼자서도 어떻게 즐기는지 알고 있는 남자잖아!? 진정한 우정이란 모름지기 술과 함께 피어나는 것! 여기선 모두가 친구지."
과장되게 팔을 펼쳐가며 말을 쏟아내는 가웨인의 모습에 멀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친구와 함께 적도 생긴다는게 문제지만..."
멀린의 말에 술집에서 빚쟁이에게 쫒기던 모습을 기억해내며 가웨인은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맥주잔을 갖고 온 주인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잔을 받아들고는 곧바로 입으로 옮기며 말했다.
"정말, 멀린. 무슨 고민이라도 있냐?"
"별로... 나도 가끔은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기고 싶은 때가 있다고. 고독한 남자의 멋진 뒷모습-이랄까?"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키던 가웨인은 마지막 말에 반쯤 맥주를 뿜어낼 뻔했다. 방울져 튀는 맥주에 멀린은 얼굴을 찡그렸고 가웨인은 간신히 입에 있던 술을 삼키고 입가에 흘러내린 맥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손등으로 훔쳐내더니, 못 다한 웃음을 터트렸다.
"뭐, 뭐? 고독한 남자의 머엇진 뒷모습? 크하하하하!!"
멀린은 뭐가 웃긴지 고개를 젖혀가며 웃고있는 가웨인을 째려봐주고는 입을 삐죽였다. 한참을 웃고 난 가웨인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크, 미안미안. 그래, 나도 네 뒷모습에 끌려 이렇게 왔잖냐. 네 말이 맞는거도 같다. 하하."
미간을 찌푸리는 멀린의 모습에 가웨인은 건배를 청하듯 술잔을 들어올렸다. 둘은 말없이 건배하고는 각자의 술잔에 집중했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술을 비워내던 둘의 침묵은 가웨인에 의해서 깨졌다.
"워워... 천천히 마셔라. 너 진짜 뭔가 있는거 뻔히 보이거든? 나한텐 말해도 돼. 친구잖아!"
촐랑거리던 아까와는 달리 진지한 눈으로 쳐다보는 가웨인의 시선에 멀린은 오히려 할말을 잃었다. 일견 가벼워보이는 가웨인이었지만 그라면 어떤 것이든 들어주고 함께 인내해줄 것은 분명했다. 친구라는 이름 아래서 그는 아무 조건없이 위험한 곳까지도 함께 해줬고, 몇번이나 그에게 도움을 받았으니까. 멀린은 주저하면서도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냥... 어두운데 있기 싫었을 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떨군 멀린을 가웨인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멀린은 말을 이었다.
"겁쟁이야, 난. 그날 이후로 모든게 정상으로 돌아왔는데도 난 여전히 어둠이 무서워."
내리깐 멀린의 속눈썹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파르르 떨렸다. 가웨인 역시 그 길고 길었던 삼하인의 밤동안 멀린이 평소와는 다르게 약한 모습을 보이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지만 그에게는 특히 더 그랬을 것이다. 가웨인은 안쓰러운 마음에 멀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너만 그런거 아냐. 나도... 그래."
그 말에 멀린은 놀란 듯한 눈으로 가웨인을 바라보았다. 저쪽 세상에서 튀어나온, 이쪽 세상의 물질로는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하는 존재들 앞에서는 기사들이라고 별 수 없었다. 자신이 믿어왔던 검술과 힘, 그 모든게 무력해지는 느낌은 그렇게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그놈들 앞에서는... 정말 모두가 무력했지. 세계 최강의 기사... 아니, 마법사가 맞섰다고 해도 전혀 대책이 없었을 거야. 내색은 안하지만 모두 한번씩 죽었다 살아난 기분일걸?"
마법사라는 말에 멀린은 작게 움찔했지만 비유적인 말이라는 걸 깨닫고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가웨인은 그 동요를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다행히도 우리와 사는 세계와 그것들이 속한 곳은 다르니까. 이제 마주칠 일 없겠지. 그걸 위안으로 삼자고."
가웨인은 그 '다른 세계'와 함께 란슬롯을 떠올리고는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는 멀린을 흘긋 바라봤다. 아까 만났을 때 이름을 부른 소리에 자신을 란슬롯이라고 착각하는 듯 했던 멀린이 떠올랐다. 그의 이름을 채 부르지 못한 멀린의 입술은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스스로도 놀란 듯 굳게 닫혔지만, 뒤이어 얼굴에 떠오른 작은 실망의 기색을 가웨인은 놓치지 않았다. 아직도 이 여린 친구는 란슬롯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누구보다도 더.
자신과 만나기 전부터 멀린을 알고 있었던듯한 란슬롯은 기사들 중에서도 특히 멀린과 친해 보였다. 친하다기 보다는, 멀린은 그를 꽤나 의지하는 듯 했고 란슬롯도 그랬다. 아무 힘도 없을 멀린에게 그가 의지한다는 표현은 좀 어폐가 있는 듯 하지만 그래도 그는 그렇게 느꼈다. 마치 그 둘만이 전장에 서 있는 듯, 서로를 의지하고 돌보았다는 것을 가웨인은 왠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연회에서 쓰러진 멀린을 눈치채고 주위의 눈길에도 아랑곳없이 제일 먼저 달려간 것도 란슬롯이었고, 멀린이 도로카에게 당했을 때도 자청해서 카멜롯까지 옮기겠다고 한 것도 그였다. 축복받은 섬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언제나 란슬롯 가까운 곳에는 멀린이 있었고, 노숙하면서도 둘은 늘 무언가를 의논하듯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곤 했다.
그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웨인은 늘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기분을 느꼈었다. 왜 그런 마음이 생겨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란슬롯의 자리에 자신이 있었으면 했다. 그 대신 자신이 멀린을 지키고, 아플때 그의 옆에 있어서, 멀린이 힘들때나 위험할 때엔 자신에게 의지해줬으면 했다. 실제로 란슬롯이 오기 전까지는 몇번이고 그런 순간들이 있었으니까.
검하나 제대로 들지 못할 것 같은 비쩍 마른 몸의 멀린이 어디까지고 아서를 위해 달려가는 모습은 그의 마음을 끄는 것이 있었다. 어디서 그런 의지가 나오는 것일까. 어디서부터 그 우정이 생겨나는 것일까. 자신도 그에게서 그런 우정을 받고 싶다고 가웨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으론 부족한 듯 했다. 생각에 잠긴 듯 가라앉은 멀린의 눈빛은 슬퍼 보였다. 아마도 란슬롯을 생각하는 모양이지. 답답한 마음에 가웨인은 새로 채워진 맥주를 단숨에 비웠다. 지금와서 란슬롯의 이름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아직도 생각나는 거야?"
가웨인이 던진 말에 멀린은 퍼득 정신을 차리더니 대답했다.
"누, 누구?"
"란슬롯."
뭐라 말할수 없는 기분에 멀린은 그냥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술기운이 도는지 흐릿해진 사고 속에서도 다시 가슴이 아파왔다. 자신이 짊어져야할 죽음이었다. 그는 단지 자신을 위해 무고하게 목숨을 던진 것 뿐이다. 그런 생각은 강해져만 갔다.
"아마 그 모습은 잊지 못 할 거야. 그 어두운 세계 속으로 끌려가버린, 아니... 당당하게 걸어가던 그의 뒷모습은."
말로는 쉬워도 행동으로 용기를 옮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죽기 직전 멀린을 돌아보며 지었던 그 미소와 당당한 걸음걸이에 멀린은 뭐라 할 수 없는 감상을 받았다. 그는, 아서를 위해서도 꼭 살아줬어야만 한다. 고결한 기사 란슬롯은.
"...그는, 나를 대신해서 죽은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아서대신 제물이 되기로 했었는데, 그랬었는데..."
그 말이 신호였던 양, 멀린의 눈에 물기가 도는 듯 하더니 이내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듯, 당황한 멀린은 손을 들어 거칠게 눈가를 비볐다. 가웨인은 그 모습을 보며 이를 깨물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죄책감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마, 멀린. 그리고 그를 위해 그렇게 울지 마-
고개를 숙여 눈을 가리며 숨을 고르려는 듯 한숨을 내쉬는 멀린의 뒷통수를 내려다보던 가웨인은 몸을 내밀어 그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둘러 그를 끌어안았다. 당황한 듯 움찔하는 멀린의 머리를 말없이 토닥이며 그는 말했다.
"바보야. 울고싶을 땐 그냥 울어."
아직도 주위는 시끄러웠다. 가웨인의 팔을 넘어 들려오는 소리들은 웅웅거리며 주위를 감쌌지만 왠지 멀린은 그 모든 것에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가까워진 가웨인의 가슴쪽에서 그의 심장고동이 느껴지는 듯 했다. 왠지모를 안도감에, 멀린은 숨죽여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구석진 그들의 자리에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웨인은 안타까운 마음에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없이 때때로 들썩거리는 등을 위로하듯 쓰다듬었다.
"나로는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괴로운 게 있으면 뭐든지, 언제든 말해. 넌 내 소중한 친구라는거, 넌 이미 알잖아?"
멀린은 그 말에 눈물섞인 웃음소리를 쏟아내었다. 그래, 가웨인이라면 꼭 그럴 거다. 아서가 아니라, 멀린의 친구로서 따라왔다고 말해준 그때 이후로 그의 쾌활함과 듬직함에 의지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진실하고 곧은 기사였다. 순간적으로 멀린은 가웨인에게라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놔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떠올렸다. 그라면 이해해 줄 것만 같았다. 멀린은 위기의 상황에서 몰래 마법을 쓰는 그를 바라보며 그것 보라는 듯 쾌활하게 웃어 보이는 가웨인과, 그런 그를 마주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이는 자신을 상상했다. 앞으로 닥쳐올 힘든 여정들과, 이해받지 못할, 피해야할 시선 사이에서 그렇게 조금쯤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싶었다.
"가웨인..."
"응?"
하지만- 멀린은 눈을 감고는 생각했다. 란슬롯처럼 또 가웨인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 란슬롯은 자신의 비밀을 함께 짊어지다가 더 많은 위험에 부딪혀야만 했고 결국 죽음까지 내몰렸다. 그것은 온전히 자기가 짊어져야 할 숙명이었음에도. 그의 선택이 완전히 멀린을 위해서였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또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되면 가웨인은 자신의 목숨마저도 대의를 위해, 그리고 친구의 비밀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를 잃을수는 없다. 그 누구도- 아서를 위해서도 더이상 그 누구하나 잃을 수 없다. 멀린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미안- 가웨인. 그리고 고마워."
생각이 좀 정리된 멀린은 가웨인에게서 떨어지며 말했다.
"이걸로도 충분해. 부끄럽게 수다 떤데다 어깨까지 빌려버렸네... 나 울보라고 소문내지 않을 꺼지?"
그렇게 말하며 힘없이 웃어보이는 멀린을 가웨인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물때문에 빨개진 멀린의 푸른 눈은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기 힘들 만큼 깊어 보였다. 분명 아직 무언가가 있는데- 그가 감추고 괴로워하는 무언가가-
가웨인은 한숨을 내쉬고는 멀린의 머리에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트렸다.
-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해산! 모두들 수고했다-"
각자 이야기를 나누며 자기 짐이 있는 곳으로 흩어지는 기사들 사이로 걸어간 아서는 멀린이 건네는 수건을 받아들어 땀으로 젖은 얼굴을 훔쳐냈다.
"수고했어, 아서."
"뭘 새삼스럽게. 그보다, 보고만 있으면 좀이 쑤시지 않아? 너도 남잔데... 언제든지 환영이니 훈련에 참가하라고. 칼 드는 연습부터 해야겠지만. 하하."
멀린은 그 말에 그저 미소만 지어보이고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서는 뭔가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며 멀린을 흘깃 쳐다봤다. 평소 같으면 말이 끝날새라 딴지를 걸어올게 분명한 멀린인데, 오늘은 좀 이상하게 얌전했다. 뭔가 고민이 있을 때마다 조용해지는 멀린을 알고 있는 아서는 잠시 그를 관찰했다. 기운 없어 보이고 안색이 안좋은데다 마치 울고난 듯 약간 붓고 빨개진 눈...음? 울고 난 듯?
자신의 추리에 조용히 당황해하고 있는 아서를 뒤로하며, 멀린은 수건 대신 받아든 아서의 검을 검집에 갈무리하기 위해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멀어져가는 멀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있던 아서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툭 쳤다.
"어, 가웨인?"
가웨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할 얘기가 있는데... 잠깐 시간 괜찮을까요, 전하?"
풀이죽은 멀린에 진지한 가웨인이라. 아서는 오늘은 좀 특이한 날이라고 생각하며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멀린 쪽을 향해 소리쳤다.
"나머지는 됐으니 칼이랑 방패만 가지고 먼저 올라가! 난 좀 있다 간다!"
멀린은 알았다는 듯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주변의 짐들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성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가웨인은 주위를 한번 훑고는 다들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는 걸 확인하고는 운을 떼었다.
"다른 건 아니고... 멀린에 대한 겁니다만..."
"음?? 멀린??"
가웨인에게서 흘러나온 의외의 이름에 아서는 놀란 표정을 했다. 가웨인이 대체 멀린에 대해 어떤 할 말이 있다는거지?
"네, 이야기라기보다는 부탁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아서는 미심쩍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계속해 봐."
가웨인은 숨을 한번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멀린이 계속 우울해 하고 있는 건 전하께서도 아시겠지요? 그날 이후로 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아직 괴로워하는 듯 해서... 그, 있잖습니까- 삼하인날... 그리고 란슬롯이 사라진...날 뒤로..."
왠지 자신도 그가 죽었다고 인정해버리긴 싫었기에, 가웨인은 조심스럽게 '사라진'이라는 단어를 골라 말했다. 아서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 날 이후로 멀린이 좀 이상하다는 것은.
"그래서?"
"그래서- 전하께서 멀린을 좀... 위로...흠, 다독여? 아니... 뭐라고 해야되나...음... 힘을 불어넣어 주셨으면 하고..."
그렇게 말하며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웨인에 아서는 황당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어째서 그가 멀린을 위해 그런 부탁을 하는가? 아니, 그보다... 자신이 멀린을 위로해본들 그의 슬픔이 나아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가웨인, 무슨 일이라도 있나? 네가 멀린을...누군가를 그렇게 걱정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군."
"저야 늘 걱정하고 있죠.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전하도 걱정하고 있답니다. 하하."
능글맞게 씨익 웃어보이는 가웨인을 바라보며 아서는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 그래... 고맙군. 어쨌든, 멀린이 좀 달라진 건 사실이지만... 모두가 그 날 이후로 어느정도 달라졌지. 쉽게 잊힐 일은 아니잖아? 아마... 멀린도 회복해가고 있는 도중일 거야."
아직도 어둠을 두려워하는 듯 했던 멀린의 모습이 떠오른 아서는 애써 고개를 흔들어 그 영상을 머리에서 지웠다. 분명, 나아져갈 거였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기는 하겠지만... 그가 우는 모습을 보니 아직도 그때 이후로 떨쳐내지 못한 듯 하더군요. 다른 사람들도 물론..."
"잠깐, 우는 모습?"
아서는 가웨인의 말을 자르고는 되물었다. 멀린이 울었다고? 계집애처럼 눈물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그건 감정표현에 솔직하기 때문일 뿐, 왠만한 일엔 그러지 않는 녀석일텐데. 대답을 재촉하는 듯한 아서의 표정에 가웨인은 별수 없이 어제의 일을 끄집어냈다.
"어제 늦은 시간에 잠깐 술집에 들렀다가 혼자 마시고 있는 멀린을 만났죠. 그것부터도 그답지 않은데..."
가웨인은 그때를 떠올리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그때 얘기를 좀 했습니다. 일어난 일들과...란슬롯에 대해서. 힘들었는지 눈물을 보이더군요."
어깨에 아직도 기대어 울던 멀린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듯한 기분에 가웨인은 가슴께 근처를 쓰다듬었다. 멀린이 느끼는 죄책감과 짐들, 부서질 듯 흔들리던 어깨. 자신으로선 다 위로하지 못할 부분들...
하지만 아서라면, 멀린의 충성의 주인이자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친구라면 그를 조금이나마 채워줄 수 있을지 몰랐다. 가웨인은 조금 분함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이 아서에게 그 부분을 부탁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서는 믿을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가, 이내 입을 굳게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런가...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해본들 그의 마음이 나아질까? 난 그럴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데."
가웨인은 그렇게 말하는 아서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전하만이 그를 돌려세우고, 그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건 확신합니다."
가웨인의 모습에 아서는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그러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한숨 돌린듯한 가웨인은 표정을 풀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서는 답하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등을 돌려 성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에 가웨인은 씁쓸하게 들릴리 없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하지만, 전하 외에 다른 누구도 할 수 없을 겁니다...저도... 그 누구도..."
-
어느덧 밤이 늦은 시간, 멀린은 잠자코 손에 익은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주위를 정돈하고 침대의 상태를 확인하고, 모든것이 제자리에 있는지 살핀다. 그런 일들을 멀린은 평소보다 더 집중해서 신중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다른 일을 하고 있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창문을 잠그고 커튼을 꼼꼼하게 친 뒤, 아서가 침대에 누운 것을 확인하고는 초 하나만을 남기고 모두 껐다. 멀린은 손에 들수 있는 촛대 하나를 책상 끝에 두더니 아서에게 다가와 더 필요한게 있는지를 물었다.
"이젠 됐어. 근데 멀린... 저건 왠 초냐? 설마 너 돌아갈 길이 무서워서 가져온거라고는 하지 않겠지?"
아서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움찔한 멀린은 뭐라뭐라 변명을 늘어놓고는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는 아서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더니 켜져있던 초를 끄려고 했다.
"아냐 됐어. 그냥 놔둬."
"응? 켜놓고 자려고? 헤...너도 사실은 어두운게 무서운거지? 나만 갈구더니..."
멀린은 히죽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 말에 발끈하며 아서는 대답했다.
"아냐! 내가 어두운걸 무서워할리가 있냐? 너같은 꼬맹이도 아니고..."
그 말에 멀린은 불만스러운듯 입을 삐죽거렸다.
"꼬맹이라니... 그럼 왜 켜놓으라는건데?"
"알려줄테니 이리 와봐."
가까이로 오라는 듯이 손짓하는 아서의 손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멀린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자리에 있었지만, 짜증낼듯이 찌푸려지는 아서의 눈썹에 결국 조심스레 앞으로 걸어갔다.
"뭐냐 그게- 더 가까이 와야지."
멀린의 미심쩍다는 표정은 한층 더 깊어졌다. 아서는 꾸미는 것 따위 없다는 듯이 해맑게 웃어보였지만 그게 더 멀린을 불안하게 했다. 하는 수 없이 침대 가까이로 다가간 멀린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뭔데 대체- 으악!"
손이 닿을만큼 거리가 가까워지자, 아서는 손을 뻗어 멀린의 팔을 잡고는 끌어당겨 침대 위에 쓰러지게 했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멀린은 힘없이 아서가 이끄는 대로 침대위로 쓰러져버렸고 잠시 당황한 듯 그대로 있던 멀린은 이내 버둥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아서는 그런 멀린을 보며 웃더니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베개 위로 눌러 고정시켰다.
"왜냐하면- 네가 여기서 잘 거니까, 어두우면 못 자는 꼬맹이를 위해 초를 켜놓으려는 거지."
멀린은 그 말에 버둥거리는걸 멈추고 아서는 쳐다보았다. 놀란듯 치켜떴던 그의 눈은 이내 의심스럽다는 듯이 가늘어졌다. 그 모습에 왠지 아서는 유쾌함을 느꼈다. 아서는 조용해진 멀린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는 상체를 약간 들어올려 머리에 팔을 괴고 멀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 멀린...그렇게 내 진심을 하나하나 의심하다니- 좀 가슴아픈데?"
"이해가 안 된다. 너... 저번에 장난으로라도 나랑 한 침대 쓸 바에야 노숙하겠다고 했었잖아."
그랬었나? 아서는 기억을 더듬다가 그 장면을 떠올리고는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농담 좀 한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냐? 너 꽤 소심하구나."
멀린의 매서운 눈길을 느껴가며 아서는 말을 이었다.
"너 아직... 그때 기억이 남아있는거지? 어제도 어두울때...많이 당황하는 거 같길래 알았지."
아서의 차분해진 목소리에 멀린은 의외라는 듯 입을 벌렸다. 아서는 왠지 간지러운 느낌에 머리를 긁적이고는 뚫어지듯 바라보는 멀린의 시선을 애써 피하려는 마음에 옆 탁자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많은 일이 있었지. 내가 왕이 되고 나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힘든 기간이 지나간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란슬롯도 잃어야만 했지."
확인하듯이 흘긋 쳐다본 멀린의 표정은 눈에띄게 그늘져 있었다.
"하지만 너도 나도, 그런 시간들을 넘어 이렇게 살아 있잖아? 일단 그거에 감사함을 느낀다. 네가 가당찮게도 내 대역으로 제물이 되니 어쩌니 할 때엔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네가 내 대신이 될 것 같아? 란슬롯 정도는 되야지, 한참 모자라!"
"이런...아서! 말을 해도 그런식으로 하냐? 내가 뭐 어때서!!"
발끈한 멀린이 원망스럽게 쳐다보자 아서는 한숨을 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되돌아가 말을 이었다.
"...란슬롯에겐 미안하고... 감사하고 있어. 우리 모두 그를 잊지 못할거야. 그렇지만, 무엇보다... 네가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멀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서는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간신히 그가 농담하고 있는게 아니라는 걸 알았고, 그걸 깨닫자마자 멀린은 마음속에서 무언가 녹아내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아서가 그런식으로 말해줄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멀린에게는 그 한마디가,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그 한마디가,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자신에게 살아도 된다는 말처럼 들려왔다. 자꾸만 눈물이 고이려고 해 멀린은 눈을 세차게 깜박였다.
"그거...진심이야?"
"당연하지 임마! 너 없으면 난 당장 바지 하나도 못 찾아 입을게 뻔한데. 넌 계속 내 옆에 있어야 돼. 알겠냐?"
툭하니 내뱉고는 귀를 붉히며 벽을 쏘아보기 시작하는 아서를 바라보며 멀린은 진심으로 기쁜 마음에 크게 웃었다. 평소랑 같은 짖궂은 말투지만 진심이 담긴 아서의 한마디에 추웠던 마음 한구석이 따듯해지는 것만 같았다. 멀린은 긴장이 풀리는 걸 느끼며 숨을 크게 내쉬며 몸을 뻗었다.
"나도 네가 별일없이 살아남아줘서 너무 고맙다. 진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거때메 네 목숨을 바칠 생각을 하냐? 왕이 된지 얼마나 됐다고... 네가 사라지면 다들 어떻게 살라고 그런 무모한 생각을 하고 그래. 보통은 왕은 그럴때 나서는게 아니라고. 앞으론 그러지마."
"나는..."
왕이기 때문에 더더욱, 해야하는 일들이 있다. 책임과 용기가 매일같이 시험당한다. 그러니, 같은 상황이 온다면 자신은 또 같은 선택을 할 것이었다. 그것이 죽음이라 해도.
말로 꺼내지 않아도 느끼고 있는 것들. 굳이 얘기해 분위기를 깨기는 싫었기에, 뭐라고 대꾸하려 했던 아서는 그냥 관두고 침대에 다시 드러누웠다. 한동안 말없이 그렇게 천장만 보고 있던 둘은 잠시 어색한 기분을 느꼈다. 아서는 헛기침을 몇번 하고는 멀린에게 말했다.
"살아있으니 잠은 자야지. 너 그러고 잘 거야? 겉옷이랑 신발 정도는 벗지 그래?"
그 말에 당황한듯 한 멀린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헉, 진짜 여기서 자라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그러라고 그랬잖아. 오늘 하루 특별히 내가 불안에 떠는 너를 불쌍히 여겨 밤새 지켜주겠다 이거야."
"...맘에도 없는 소릴. 매번 혼자 넓은 침대 독차지 하고 자던 네가 내가 있음 어떻게 자겠냐. 관둬라...나 이제 안 무서워."
"어허- 왕의 명령이야. 날 무시하지 말고 그냥 하루 편하게 자고 가라고. 내일 아침에 나 깨우러 안와도 되니 더 좋잖아?"
멀린은 고개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아서를 바라보았다. 그런 멀린에게 아서는 정말이라는 듯이 시선을 맞추어왔다.
"글쎄... 그럼 나중에 잠 설쳤다니 어쩌니 해도 난 모른다!"
멀린은 이상한 기분 반, 기쁜 마음 반으로 부스스 일어나서는 재킷을 벗어 옆에 대충 얹어놓고는 벨트와 스카프,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옆에 놓았다. 그리고는 쭈삣쭈삣하며 다시 침대위로 기어 올라왔다. 왠지 어색하기도 하고 진정되지 않는 기분에 멀린은 한참 꼼지락거리다가 아서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이러고 있는거 누가 보기라도 하면 정말 큰 일 나겠는걸."
"그렇겠지? 생각하기도 싫다... 다큰 남자 둘이서 한 침대서 자다가 걸려 봐. 난 장가 다 간거지."
"네 혼삿길이 문제냐... 넌 이해심 많은 그웬도 있고, 왕이기라도 하지. 난 완전 망하는거잖아."
그 말에 아서가 웃는 듯 침대가 들썩였다. 그 움직임에 전염된 듯 멀린도 한동안을 키득거렸다.
"그보다 내 방에 드나들 수 있는 최측근 시종이 여기 있으니 누가 또 눈치를 채겠어. 잠이나 자자. 푹 자라, 멀린."
"그래, 너도- 잘자, 아서."
멀린은 믿기지 않는 이 상황에 멍한 기분이 되어 한동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살며시 눈을 감아보았다. 초의 은은한 불빛이 여전히 안심하라는 듯 그의 눈꺼풀에 와닿았고, 부드러운 침대 시트에는 아서의 온기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듣는,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호흡소리. 밖은 달도 뜨지 않은 듯이 어두웠지만 더이상 멀린은 신경쓰지 않았다. 옆에 그가 있으니까. 아마도 괜찮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오늘 밤만은...
잠들지 못할 것 같았던 어색한 잠자리 위에서, 멀린은 자기도 모르게 금새 잠에 빠져들었다.
멍하니 있던 아서는 금새 조용해진 멀린의 호흡소리에 미묘한 배신감을 느끼면서 낮게 그를 불러보았다.
"멀린, 자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맙소사, 베개에 머리 댄지 몇분이나 지났다고 벌써 잠이 든 거야? 아서는 기가 막혀 코웃음을 내뱉고는 옆자리를 쳐다봤다. 정말 잠든 듯, 두눈은 굳게 감겨있었다. 가슴께에 가지런히 모아올린 두 손이 규칙적인 호흡에 맞춰 조그맣게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많이 피곤했던지 죽은듯이 잠든 멀린은 평온해 보였다.
막상 멀린이 말했던 대로, 혼자 자는데 익숙했던 아서는 어색한 옆의 존재감에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몇번을 뒤척이던 아서는 작게 투덜거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팔을 머리에 받치고 잠든 멀린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키는 제법 컸지만 남자치고는 허약해보이는 어깨와 마른 몸을 가진 멀린은 피부마저 새하얗다. 단련되지 않은 몸이고, 실내에서 지내는 일이 많기 때문에 그렇겠지. 서글하고 살짝 쳐진 눈매와 그 아래에 모양좋게 뻗은 코, 잠든 사이 살짝 벌어진 도톰한 입술. 어쩐지 전체적으로 선이 가는 느낌이 드는, 유약해 보이는 인상이다. 아서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렇게 연약해보이는 약골이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고. 맨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비실비실한 게 겁도 없이 자신을 막아서며 말대꾸를 했었지-결국 두들겨맞고 끝났지만.
그때를 생각해낸 아서는 피식 웃었다. 그 뒤로도 많은 일이 있었고, 그때마다 놀랍게도, 멀린은 언제고 빠짐없이 그를 따라왔었다. 칼 하나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면서, 도움되는 일이라곤 할 줄 몰랐지만 언제나 기죽지 않고 그의 곁에 있으려고 했다. 적어도 멀린은 눈에 보이는것과 달리 용감하고 터프한 녀석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친해지게 된 걸까, 그저 시종이었던 이녀석과. 아서는 생각했다. 멀린은 아서 주변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무언가 다른 것을 가지고 있었다. 가끔 그 답지 않게 내비치는 신비로운 분위기라던지, 이상할만큼의 의지라던지.
갑자기 몸을 뒤척이며 자기 쪽으로 돌아눕는 멀린의 행동에 아서는 잠시 놀라 몸을 굳혔다. 깨기라도 한 줄 알고 놀라서 멀린을 살폈지만 아직 한참 꿈나라를 헤메고 있는 것 같았다.
아서는 멀린이 돌아눕는 사이에 흘러내려간 이불을 끌어올려 제대로 덮어주려다가 문득 멀린의 목부분에 시선을 빼앗겼다. 헐렁한 튜닉은 움츠린 어깨 사이에 넓게 걸쳐져 꽤나 내려가 있었고, 평소에는 잘 벗지 않는 스카프까지 벗어놓은 탓에 그다지 드러날 일이 없었던 그의 가는 목선과 깊게 패인 쇄골에 이어진 어깨부분까지 시원하게 드러나 있었다. 하얗다, 게다가 가늘고... 무슨 사내자식 쇄골이 저리 섬세해?
아서는 온갖 생각을 해가며 자기도 모르게 조심스레 손을 올려 멀린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그의 어깻죽지에서 온기가 스며들었다. 조심스레 손가락을 뻗어 어깨선을 슬쩍 만져보았다. 매끄러운 피부가 느껴졌다. 조금만 더-
그때 멀린이 무언가를 느낀 듯 뒤척이며 작게 무엇인가 중얼거리더니 다시 몸을 돌려 똑바로 누웠다. 아서는 너무 놀래 그 자세 그대로 몸을 굳혔다. 자기가 방금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고 나자 아서는 한층 더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작게 혀를 차고는 중얼거렸다.
"내가 뭐 하는거지... 에라, 잠이나 자자-"
몇번 고개를 흔든 아서는 다시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새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조금씩 아서에게도 잠이 쏟아졌다.
-
햇살과 함께 들려오는 새소리에 멀린은 번쩍 눈을 떴다. 말도 안되게 아침다운 아침이었다. 맑게 울리는 새소리에 깨다니- 몸을 일으켜 잠시 주위를 둘러본 멀린은, 자신이 아서의 방에서 잤으며 그것도 꽤나 깊이, 개운하게 잤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놀라움에 잠겼다.
옆을 바라보니 아서는 잔뜩 이불을 말아안고는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고 있었다. 완전히 이완된 그의 얼굴은 여느때와 같이 바보같다고 생각하며 멀린은 피식 웃고는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고 재킷을 꿰어 입었다. 그리고는 언제나의 아침처럼 창문을 열고 커튼을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좋은 아침이야! 일어나!"
그 소리에 괴로운 듯 눈을 찌푸리며 간신히 뜨는 아서의 모습을 멀린은 유쾌하게 바라보았다. 몇번 뒤척이던 아서는 완전히 눈을 뜨고 눈부시다는 듯 손을 눈가로 올렸다.
"누가 보면 완전 성실한 시종이라고 생각하겠구만? 이렇게 일찍 날 깨우러 오다니 말야."
"헤헤... 당연하지. 난 완전 성실한 시종이라고."
멀린이 밝게 웃어보이는 모습에 아서는 조금 마음이 놓이는걸 느꼈다. 적어도 오늘은 그가 피로해보이거나 슬퍼보이지는 않는다. 얼굴색도 한결 나았다. 정말 자신의 어설픈 위로 이벤트가 효과가 있었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며 아서는 만족감에 씨익 웃었다.
"뭐 좋은 꿈이라도 꿨어? 굉장히 음흉하게 웃네..."
"꿈은 무슨...야, 말도마라. 네가 하도 잠꼬대를 하는 바람에 내가 잠을 잘수가 있어야지. 꿈꿀 새나 주고 물어봐라."
"에엑? 내가 무슨 잠꼬대를 해!!"
"뭐 매번 하는 소리지. 우흥흥- 무서워용~ 난 그런거 못해용~ 잉잉~ 살려줘요 전하~ 이런거?"
멀린을 흉내낸답시고 과장되게 울상을 지어보이며 앵앵거리는 소리를 내는 아서를 바라보며 멀린은 기가 찼다. 그리고 순식간에 뭐라도 던지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전하-부분에서 이미 망했네. 아서, 거짓말 치지 말고 냉큼 옷갈아입자. 아침 가져올게."
이제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온, 언제나와 같은 분위기였다. 아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적어도- 이번 한동안만은 멀린이 좀 기운을 차리겠지. 그리고 그렇게 언젠가는 그도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 거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이렇게 멀린을 걱정해주고 있으니까. 그래...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어라?
그는 문득 이어 떠오른 생각에 옷을 챙기러 걸어가는 멀린이 뒷모습에다 대고 말했다.
"멀린, 다음번에 울 일이 생기면 나한테 오라고. 괜히 다른 사람 괴롭히지 말고."
멀린은 그 말에 걸음을 멈췄다. 아서가 저걸 알고 있다는 것은...가웨인이 그런건 비밀로 해줘야 되는거 아니었나? 귀에 열이 모이는걸 느끼며 멀린은 확인하듯 물었다.
"내 내가 언제 울었다고 그래. 난 왠만한 일론 안 우는 남잔데."
아서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지나가듯 말했다.
"가웨인이 말해주던데, 네가-"
벌컥- 하고 문을 여는 소리에 아서는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종은 급하게 뛰어나간 듯 보이지 않고 그 서슬에 아직도 열려있던 문 만이 뒤늦게 조용히 닫혔다.
"이제 에너지가 넘치는데, 멀린?"
아서는 피식 웃고는, 영문을 모르고 당할 가웨인을 애도하며 멀린이 챙겨놓은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fin
후기(?)
+고생은 가웨인이 하고 좋은건(?) 아서가 가져가는 거 같아서 좀 안습...지못미...
+비가오나 눈이오나, 아플때나 슬플때나... 옆에 있고 싶은거면 그냥 멀린이랑 결혼하세여 가웨인 ^.^
+아서...ㄱㅈ라니!!
+멀린 생각할때마다 그의 쇄골이며 목선부터 떠오르는 자신의 저속함...으흑흑...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