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lin-아서/멀린] The Elixir of Love (10)
어둠의 시간은 지나고, 마치 언제나의 아침처럼, 내가 그를 깨울때 처럼 천천히 떠지는 그의 눈에 아침의 부드러운 햇살이 새어들어갔다. 마치 구름 낀 하늘이 개이듯이, 빛을 받은 그의 눈이 점차 또렷하게 푸른 빛으로 빚난다.
아아, 다행이다.
아서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초점을 맞추려는 듯 눈을 찌푸렸다. 그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웃어보이자, 서서히 주위를 파악한 듯 그는 입을 떼었다.
"바보같이 그렇게 웃지 마. 여긴 어디지?"
윽, 기념할만한 첫 말이 그거라니. 나는 간질이며 치솟는 웃음을 참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가이우스의 방이야. 기억나? 너 어제 많이 다쳐서 그대로 쓰러졌거든."
"뭔가 화끈한거 한방 맞은거까진 기억난다. 죽는 줄 알았네. 마법사는? 다른 사람들은 다 무사하고?"
"응. 마법사도 몬스터도 다 해결됐어. 다른 사람들은 조금 다치긴 했지만 다 무사하고..."
아서는 주위를 둘러보려는 듯이 몸을 좀 일으키면서 끙-하는 신음소릴 냈다. 나는 다시 그를 눌러 침대에 누였다.
"아파! 그렇게 누르지 마 멀린! 여기저기 멍이라도 들었나... 삭신이 다 쑤시네."
"그러니까 그냥 누워있어. 무식하게 일어나서 뭐 하게? 넌 좀 더 쉬어야돼."
우리 말소리에 깨어난 란슬롯과 가이우스가 다가왔다.
"전하, 정신이 드셨군요. 어디 특별히 불편하신 곳이 있습니까?"
"여기저기 쑤시는거 빼곤 괜찮은데. 이렇게 누워있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아. 란슬롯, 어젠 정말 수고했어. 내가 그렇게 뻗어버렸는데도 다들 잘 해줬나보군...모두의 덕택이다."
"무사히 정신이 드셔서 다행입니다. 제가 한건 없습니다. 멀린이 큰일 했죠."
나는 눈썹을 찌푸리고 란슬롯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움찔한 란슬롯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멀린? 내가 얘 때문에 뻗은건데... 그 뒤로 멀린이 그놈을 쓰러트리기라도 했나? 널 데려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괜히 내 발을 잡으니 이렇게 됐잖아!"
음... 언제나의 패턴이지만 역시 언제나 열받는다. 나는 입으로만 웃어보이며 그의 팔을 꾹 눌렀다. 아서가 아프다며 소리를 질렀다.
"멀린!!"
"그으래...미안하게 됐다. 너 쓰러지고 나서 다들 엄청 고생했지. 무거운 널 끌고 여기까지 오느라! 그러니까 미리 살 좀 빼라고!!"
"나 살찐거 아니라니까!!"
투닥거리는 우리를 보며 가이우스와 란슬롯은 벙쪄서 서로를 바라보고는 이내 웃어버렸다. 나도 덩달아 같이 웃어버리자, 아서만 입을 삐죽대며 다시 침대에 돌아누웠다.
-
한숨 더 자고 나자 아서는 한결 개운해진 듯 했다. 왕에게 간략히 보고를 올리는 것으로 몬스터 사건은 일단락되었고 예전의 평화가 돌아왔다. 나도 한숨 돌리고는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부렵, 란슬롯과 그웬이 가이우스의 집무실에 찾아왔다. 나는 예상외의 두 사람의 방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란슬롯, 그웬!"
"멀린, 오랜만에 본다 그치?"
그웬이 수줍게 웃으며 인사했다.
"소식 들었어. 어제 몬스터 잡으러 갔다가 많이 고생했다며? 수고했어- 매번 주인들이 사고치면 우리가 힘들잖아."
"그러게말야. 아서는 또 특별히 손이 많이 가잖아. 맨날 찡찡대서 큰일이야 정말."
내가 아서의 흉내를 내며 씨익 웃어보이자 그웬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나는 둘을 테이블에 앉히고 잠시 외출한 가이우스를 대신해 먹을만한 것을 가져왔다. 란슬롯이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 우리 몫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데..."
"괜찮아. 네가 있으니 좀 넉넉하게 준비했었지. 그러엄...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것 같은데, 한번 들어볼까?"
란슬롯과 그웬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수줍게 웃으며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 장면만 봐도 나는 무슨 얘기가 나올지 대강 짐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건 정말이지 의외였다. 아서가 란슬롯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웬을 놔줬다는거야?
"우리, 카멜롯을 떠나기로 했어. 부족하지만 내가 어떻게든 그웬을 책임질 수 있을 거야."
"정확히는 내가 란슬롯을 따라가기로 한 거지만- 날 책임지진 않아도 돼, 란슬롯."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그웬도 결국 고민 끝에, 마음이 이끄는 것에 솔직해지기로 했다고 했다. 아서도 분명 사랑했지만, 란슬롯에게는 무언가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고 말하며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아서에겐...정말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 하지만, 그가 결국 이해해줘서 우리 다 좋은 마음으로 각자의 길을 갈 수 있게 됐지. 아직 그를 사랑하고 존경해. 그러니까 멀리서라도 너희의 행운을 빌께."
나는 뭐라고 해야할지 몰랐다. 정말로 그녀가 떠나버린다고? 그럼 아서는 마음의 기둥 하나를 잃어버리게 될 텐데?
"하지만... 그웬, 란슬롯에겐 미안하지만, 아서는 네가 떠나면 굉장히 상심할거야. 그에게 있어 너의 존재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알잖아. 아서에겐 아직 네가 필요해."
란슬롯은 내 말에 쓰게 웃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웬은 대답했다.
"분명 그런 때도 있었지. 하지만 사람은 늘 변하는 거야, 멀린. 지금의 그라면 내가 없어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을거라 장담할수 있어. 네가 있으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황급히 말했다.
"그래, 나도 알아. 난 늘 아서 옆을 따라다닐테지만, 그거랑은 다르다니까?"
이번에는 란슬롯이 웃으며 대답했다.
"두고보면 알아, 멀린. 넌 좀 네 자신을 높게 평가할 필요가 있겠다. 내가 너한테도 기회를 주는거니까 잘 잡으라고."
난 이번에야말로 할말을 잃었다. 무슨 소리야... 우울해하는 왕자님 뒤치닥거리를 어떻게 하라고. 내가 멍해져 있는 사이에 가이우스가 돌아와 이번에는 그가 놀랄 차례였다. 그리고 작은 집무실은 한동안 작별의 인사를 나누느라 시끌해졌다.
-
"아서!"
"왜 그리 호들갑이야?
아서의 방문을 급하게 열고 들어서자 아서는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면서도 그가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눈앞에 있다는것에 감사했다.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말을 기다리는 아서에게 나는 말했다.
"그 둘이... 그웬이 떠난다고 했는데, 진짜야?"
내 질문에 아서는 그제야 나를 슬쩍 쳐다보며 별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서류로 눈길을 돌린다. 뭐야, 저 태연한 모습은?
"네가 허락해준거야?"
"어, 허락이고 뭐고 있겠냐. 결국 내가 그웬을 붙잡고 있었던 셈이 되버린거더군. 난 그런거 싫다.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도 그게 더 좋을거고"
"서로를 위해서??? 넌...너도 그웬을 좋아하잖아...그런데 어떻게...."
"멀린, 괜찮으니 진정해. 나도 충분히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이야. 네가 걱정해주는건...여튼 고맙다."
허둥대는 내가 무안해질정도로 나를 바라보는 아서의 눈빛은 차분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실연에 괴로워하는 그런 모습은 아니니... 그걸로 된 걸까.
"...그래..."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중얼거리다가, 애써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래...괘 괜찮을거야. 카멜롯에 괜찮은 레이디가 어디 그웬 뿐이겠어? 힘내라고..."
내 어색한 위로에 아서는 피식 웃더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조금 나른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글쎄...다들 왜인지 나를 떠나려고 하네? 그웬도 그렇고, 너도 그랬고..."
"야, 내가 언제?!"
그 말에 내가 깜짝놀라 정색하며 대답하자, 아서는 나를 바라보며 놀리는 듯한 어투로 말을 계속했다.
"너야말로 그녀석이랑 못 가서 섭섭한 건 아냐?"
"아직도 그때...일가지고 그러는거야? 아니라고 했잖아...란슬롯은...그건 오해고...나는...."
"그래, 하지만... 너는 그래도, 내 옆에 있어줄거지? 왕자의 시종이란거 나쁘지 않잖아?"
나는 순식간에 풀이죽은듯한 아서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매번 오만해보일정도로 당당하던 아서였는데, 대체 뭐가 그를 저렇게 감상적으로 만드는걸까. 나는 가슴 한구석이 시큰해오는걸 느끼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걱정하지마, 아서. 난...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네가 지겹다고 해도 말야.."
언제까지고, 무슨일이 있든....언제까지고 네 옆에 있을거니까.
-
이틀 후, 그웬과 란슬롯은 나와 가이우스의 도움으로 여행 짐 꾸리기를 마쳤다. 그들은 곧 성을 떠날 채비를 했고, 우리는 그들을 배웅해 성문 밖으로까지 나왔다. 아서도 배웅을 위해 뒤늦게 따라나왔다.
그웬은 아서와 몇마디인가 나누고는 그의 뺨에 작별의 키스를 하고는 나에게 걸어왔다. 그리고 나에게도 키스를 해주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서를 잘 부탁해, 멀린. 그에게는 네가 필요해."
나는 아서쪽을 흘긋 쳐다보았다. 이제 그는 란슬롯과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겠지... 내가 얼마나 너의 빈자리를 메꿀 수 있을지 모르겠다. 히스테리 부리는 아서 뒷치닥거리가 길어지지 않기만을 바래야지."
내가 어깨를 으쓱해보이자, 그웬은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고 작별인사를 했다.
란슬롯은 말에다 짐을 실어놓고, 우리와 포옹을 나누고 말에 올라탄 그웬에게 몇마디 하더니 내 쪽으로 걸어왔다.
"멀린. 그동안 너무 고마웠다."
그가 내민 손에 악수를 하며 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좋은 친구가 둘이나 멀리 가버린다는 건, 이유가 어땠던 간에 섭섭한 일이었다.
"무슨, 내가 해준게 뭐 있다고- 내가 고맙지. 모든게 잘 끝나서 다행이네. 그래도 좀... 너랑 그웬이 잘 된건 좋지만, 떠나버린다니 섭섭하다."
"나도 그래. 하지만 이게 우리 모두에게 좋을 것 같아. 나도 그녀도 왕자님께도... 이제 별 다른 일은 없을 듯 하지만."
"응, 알아. 그래도 가끔 소식정도는 알려줘."
"그럼, 나중에 자리 잡고 나면 꼭 연락할께. 그땐 너도 와서 우릴 축복해줘야 한다? 하하..."
나는 그와 그웬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미소를 지어보이는게 보였다.
"자, 이젠 정말 이별이다. 하지만 그 전에..."
그리고는 란슬롯은 갑자기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치 기사가 서약을 하듯이. 난 완전히 당황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란슬롯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으아- 왜 이래, 란슬롯!"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본 그는 웃으며 한쪽눈을 찡긋해보이더니 이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란슬롯이 대마법사 멀린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제 왕을 위한 충성은 또한 당신을 위해 있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언제까지고 우리 왕과 카멜롯을 지켜 주시기를..."
그리고는 내 오른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귀족에게나 할 법한 경의의 키스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여전히 당황해 있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걱정마, 여긴 사람도 별로 없고. 난 기사가 아니지만... 꼭 이런 식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었어."
확실히 성문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 볼 사람이 없긴 하지만 뒤에 아서가 있잖아. 아...민망해라... 슬쩍 뒤돌아 아서의 표정을 살피니 그도 이게 뭔 일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고...고맙긴 하지만 란슬롯, 나도 그 무슨..."대마법사"따윈 아닌데 말야..."
"아니, 적어도 나, 우리에겐 그래. 이번일만 봐도...네가 뒤에서 얼마나 아서를 지키기 위해서 고생했을지 훤히 보이는걸."
나는 그 말한마디에 가슴이 뭉클해지는게 느껴졌다. 으으, 이러니 아서가 계집애같다고 놀려도 할말이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나를 알아준다는게 너무나 기적같고 기뻤다.
"비록 지금은 너의 진실한 모습을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만, 언젠가 모두가 너의 진가를 알아줄 날이 올 거야. 그리고 아까 한 맹세는 진짜다? 언젠가 기회가 되어 내 힘을 보태게 된다면... 내 힘을 다 해 너와 아서를 돕겠어."
이 얼마나 마음을 녹이는 한 마디인가. 난 속에서 넘쳐올라오는 기쁨을 느끼며 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멋쩍지만 한껏 근엄한 척하며 말했다.
"란슬롯,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당신같은 기사가 있어 마음이 든든합니다. 앞으로의 여정에 행운이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란슬롯은 마주 미소를 지으며 마치 다짐하듯 잡은 손을 힘주어 잡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자신의 말쪽으로 갔다.
둘은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등을 돌려 카멜롯에서 멀어져 갔다. 나는 멍하니 그들의 작아져가는 뒷모습을 배웅했다.
"아까 그건 뭐냐? 무슨 연극같은 짓을 하는 건지..."
뒤에서 아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아아~ 그냥, 우리 사이의 친밀한 작별인사 같은 거랄까. 꽤 그럴싸하지 않았어?"
"그럴싸는 무슨... 프로포즈하는것도 하니고 그게 뭐냐? 남자자식들끼리."
그 투덜거리는 듯한 말투에 나는 또 웃음이 나오려 했다. 간신히 웃음을 막은 나는 정말 놀랐다는 듯한 말투로 반격했다.
"어어? 어떻게 알았어? 프로포즈라는거?"
"야......그럴리가 있냐. 그웬을 놔두고 너한테."
자신없이 우물거리는 그 모습에 나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뭘 갑자기 진지하게 그러는지-
"그냥, 란슬롯은 좀...로맨티스트적인 면이 있잖아? 그동안 도와줘서 고맙다고 나름대로 격식 차려본거래. 누가 본거도 아니고, 카멜롯 밖인데 뭐 어때."
"아아- 그래. 기사와 귀부인 놀이인가. 내가 너희들과의 인연을 봐서 무엄죄로 잡아넣진 않겠어."
내 어깨를 툭툭 친 아서는 그들이 사라진 쪽을 한번 바라보더니 뒤를 돌아 걸어갔다. 나는 잠시 서서 한번 더 둘을 위한 인사를 속삭이고는 아서의 뒤를 쫒아 뛰어갔다. 잠자코 걸어올라가는 아서의 뒷모습이 왠지 쓸쓸하게 보여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너도 많이 섭섭하겠다. 그래도 꽤 좋아했잖아, 그웬. 난 네가 그녀를 포기할줄은 생각도 못했어."
아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계속 걸어가며 말했다.
"뭐어...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지. 그래도 둘이 그렇게 사랑한다니, 내가 숙여줘야지 싶더라."
맙소사, 이 녀석이 어른이 다 됐구나. 나는 기특한 마음에 그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마,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세상의 절반은 여자라고 하고, 또 은근히 취향독특한 레이디들이 많으니까. 그 중에 널 좋아라 해줄 레이디도 꼭 생길 거야. 물론 그 중에 그웬같이 좋은 사람도 있을 거고. 하하."
"아아- 그래? 네 소식통이라면 진짜라도 믿을 수가 없다마는..."
난 그 소리에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는 그게 맘에 안 든 듯, 나를 흘긋 째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잠시 우리는 각자의 생각에 빠져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조금 뒤 그 침묵을 깨고 아서가 지나가듯 말했다.
"...그래도 제일 취향 독특한 네가 옆에 있으니 내가 외로울 새가 있겠냐."
"......아..하하.. 뭐야. 말이야 고맙지만, 난 눈이 높다고 왕자님."
그 말에 아서는 갑자기 멈춰 서더니 날 뚫어지게 쳐다본다. 내가 그 시선에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떠보이자, 아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뱉듯이 말했다.
"아- 이젠 더이상 못참겠다. 너, 자꾸 그렇게 도망만 칠래?"
"뭐...뭐, 내가 뭘??"
"내가 널 모를 거 같냐? 너 나 좋아하잖아."
까, 깜짝이야. 이젠 내가 눈을 못 마주칠 차례였다. 어쩌다 이런 이야기가 된 건진 모르겠지만- 이제 이런식의 농담은 힘든데. 나는 평정을 가장하느라 필사적이었다.
"......이런... 아서, 너무 자신감에 찬거 아냐? 아무리 그웬이 가서 외롭다고 해도 너무 착각하지는 마."
"멀린... 제발 쓸데없는걸로 고민하지 마. 네 마음을 알면 내가 싫어할거라고 걱정하고있는거지? 나를 그렇게 의리없는 남자로 생각했다니 실망이야."
아서는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헛기침을 몇번 하고는 말했다.
"내가 기껏 자타공인 싱글남이 되어줬더니... 이제 그만 튕기고 인정하시지 그래."
나는 이제 눈을 가늘게 뜨고는 아서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건 무슨 의미지? 진짜 말 그대로 내가 들이대도 괜찮다는 의미야 정말? 근데 그럴리가 없잖아. 또 이자식이 약을 먹었나... 내 머릿속에선 온갖 생각이 떠돌았다. 또 이렇게 그는 내 마음을 온통 흐트러트린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어왔다. 생각을 좀 정리하고싶은데...이럴땐 일단 후퇴다. 난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래그래, 나 너 완전 좋아한다. 이제 됐냐?"
그 말에 아서는 내 말투가 거슬린 듯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런 틈을 타 나는 냉큼 인사를 내뱉고는-
"그럼 난 급한일이 생각나서 이만!"
정말 급한듯이 후다닥 달려가기 시작-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두발자국도 못가 붙잡혔다. 아서는 잽싸게 바둥대는 나를 좌절시키고는 성문 옆쪽으로 끌고간다. 난 왜그러냐고 버둥대면서도 질질 끌려갈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떨어진 곳에 다다르자, 아서는 성벽에 나를 밀어붙이고는 갑자기 입을 맞춰왔다.
"읍...?!"
그날 아침이후로 처음 하는 키스. 두번째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 키스였다. 난 움찔 몸을 떨었지만 더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뜨거운 입술과 아서의 숨소리. 머릿속을 떠돌던 모든 생각이 하얗게 타들어간다.
길게 이어진 키스 후에 살짝 떨어진 아서가 속삭이듯 말했다.
"두번째 키스네... 소감은 어때?"
난 키스도 키스였지만, 아서의 그 말에 너무 놀라 눈이 튀어나오는줄 알았다. 두번째라니??
"두.. 두번째라니 무슨??"
"와... 설마 없었던일로 하자 이거야? 나 그때 일... 다 기억하거든..."
설마, 말도 안된다. 완전 다 잊어버린거 같았는데?
이런, 아마 아침에 깨어나던 때를 기억하는 모양이다. 나는 뒷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허둥대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으... 아침에 그거말이야? 미..미안, 그땐 내가 좀 혼자 분위기를 타서...하하..."
젠장, 그 때를 떠올리니 얼굴이 또 빨개지는게 느껴진다. 아서는 그러는 날 멀거니 날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너의 그런 점도 좋긴 한데... 이제 더이상 안 숨겨도 돼, 멀린. 그날은..."
그리고는 아서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숨이 막힐것만 같다.
"그날 밤의 널 잊을수가 없었어. 미안, 모른척해서."
"그럴리가..."
난 또 꿈인가 싶어 몇번 주위를 둘러봤지만 꿈은 아닌 듯했다. 그러고 나니 이 상황이 너무 부끄러워 기절해버리고 싶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럼 아서가 어디까지 기억한다는 거지? 난 벽에 등을 댄 채 바닥으로 미끄러져 주저앉아버렸다.
"멀린?"
"그럴리가 없어- 그 약 효과가 있는 동안의 일은 기억하지 못할 텐데! 그날 밤이라면 설마..."
"그치만 난 기억하는걸. 그날 밤 너랑... 같이 잤잖아."
아서는 그 말을 뱉고는 귀가 조금 빨개졌지만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와 어쩜 저럴수가 있지. 난 얼굴이 터져버릴 거 같은데.
"어, 어디까지 기억하는데! 그 바보같았던 아침은 그렇다 치고, 그 전일도 기억한다고?"
"뭐...처음엔 좀 어렴풋하게만 기억났는데, 네가 키스한 뒤로 조금씩 선명하게 기억나더라. 내가 이상하게 지껄이고 너한테 찝쩍댄거까지 다. 완전... 생각해내고 내가 얼마나 쪽팔렸는지 넌 알기나 하냐? 망할 약 같으니."
쑥쓰러운듯 머리를 긁적이며 찬찬히 설명하는 아서를 바라보며 난 뒷통수를 한대 맞은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럼 아서는 내가 한 부끄러운... 감정에 넘쳐 한 일들을 다 기억한다는 셈이 된다. 맙소사-
"으아악!! 그럼 일찍 말했어야지!! 쪽팔린건 바로 나라고!!!! 이 변태자식! 내가 허둥대는 거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겠다!"
나는 앉은 채로 아서의 다리를 걷어찼다. 아서는 윽 소리를 내며 주저앉더니 내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나도 그동안 힘들었다고! 첨엔 니가 하도 아무일도 없었던 척 하길래 나도 이게 뭔가 싶었지. 근데 갑자기 란슬롯이 나타나 널 감싸고 도는 통에 나도 속이 다 썩어들어갔다고!"
나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아서가 과잉반응을 한게 그럼 다 내 태도때문이었던건가? 그럼 그때 이미 아서는 나에 대해서...
"그러니까 순순히 인정해. 날 좋아한다고. 이번엔 꼭 들어야겠어."
이어진 아서의 진지한 말투에, 나는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를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걸 꼭 말로 해야겠어? 이 바보 왕자야.
이제 완전히 항복했다. 까짓거, 뒷일이 어떻게 되든 일단 말해줄게.
"그래, 아서. 좋아해. 좋아한다고 널!...내가 얼마나 널..."
난 그렇게 참았던 고백을 쏟아내다 갑자기 북받쳐 올라온 눈물에 고개를 숙이고 울어버렸고, 아서는 그런 나를 보며 미소짓다가, 갑작스레 쏟아진 내 눈물에 당황해 허둥거렸다. 아서는 한동안 어쩔줄 모르고 있다가 이제 옆에서 가만히 내 어깨를 끌어안고 눈물이 그치기를 기다려줬다. 그렇게 나는 한참을 구석진 성벽에 기대어 믿기지 않는 현실속에 있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성벽 위로 떨어지는 따스한 아침햇살이 눈물에 비쳐 둘을 축복하듯 반짝였다.
이젠 너를 사랑해도 되는 거야, 아서? 나는 멍해진 머리로 그렇게 생각하며 아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허허...퇴고따위 없이 이리저리 날림이 된거같네요 ㅠㅠ
일단 이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지만... 아무래도 마지막이 흐지부지인만큼 에필로그같은걸 더 휘날려볼까 합니다....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흐흑흑 ㅠㅠ
여튼...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주신 분들, 읽어주신 분들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