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lin-아서/멀린] The Elixir of Love (9)
어색한 하루가 지나고, 다시 몬스터 토벌을 위한 원정대가 준비되었다. 이번에도 허탕을 치는건 아닌지 하는 우려들이 있었지만, 꽤나 가까운 거리 내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이미 목격자도 있는 상황이라 그 흔적이라도 찾아서 확인해야 했다.
아서에게 갑옷을 입혀주고, 이것저것 준비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거의 말이 없었다. 그 어색함이란 정말 견디기 힘들었지만, 어떻게 풀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은 나도 좀 아서에게 화가 나 있었기에...이유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눈앞에 닥친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멤버는 저번과 비슷했다. 란슬롯을 포함한 기사 몇 명. 그리고 아서와 나.
내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듯, 날씨는 좀 흐렸다. 그리고 점심이 지나서는 살짝 안개까지 끼기 시작했다.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이미 제법 나와있었기에 그 장소까지 가보기로 했다. 쉼없이 말을 달려 꽤나 근처까지 와서 우리는 각자 말에서 내려 흔적을 찾아보려 각자 흩어졌다.
나는 예전에 란슬롯과 만났던 바로 그 자리까지 가보았지만, 발자국은 커녕 나뭇가지가 부러졌거나 하는 작은 흔적도 찾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엹게 낀 안개로 숲이 베일에 가린듯 보였지만 아예 시야를 차단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답답한 감각에 나는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흐렸지만 이상한 기미는 없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본능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아서가 어디있는지를 살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작게 그가 보였고, 땅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리더니 별 다른걸 발견하지 못했는지 이내 앞으로 걸어갔다. 별 다른 일은 없다. 어찌됐든 그의 안전을 제일 먼저 확인하게 되는 이 버릇에 나는 실소를 흘렸다.
"괜찮아?"
어느새 다가와 지나가듯 말을 걸어오는 란슬롯에게 나는 대답했다.
"여전하네. 흔적도 하나없고, 위험한 기색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데..."
"아니, 그거 말고. 너랑 아서 말이야."
나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며, 말소리가 들릴만한 거리에 누가 있는지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으...란슬롯. 비밀 지켜주기로 했으니 좀 조심해줘...놀랬잖아."
"아무도 안 들어. 그냥...네가 걱정되서 그래."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그 표정에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씨익 웃어보였다.
"괜찮아. 이러다 금방 또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투닥거릴테니까."
"그렇지만..."
란슬롯이 뭐라고 얘기하려 하였으나, 주변에서 들려온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나는 그의 입에 손을 가져가 조용히하라는 표시를 했다. 두어번 산발적으로 들려온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우리가 조용해짐에 따라 바로 멈췄다. 작은 변화이긴 했지만 무언가 이질적인 존재가 있었다.
우리는 나머지 인원들을 부르려 조심스레 뒤로 돌아가기 시작했지만 이내 저편에서 들려온 외침 소리에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뒤에서 계속 느껴지는 존재감이 신경쓰여 자꾸 뒤를 돌아볼수밖에 없었다.
란슬롯이 갔으니 아마 한동안은 괜찮겠지.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소리가 난 곳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Bebiede þe arisan ealdu"
낮선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위에서 갑자기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그 몬스터가 나타났다. 창백한 얼굴에 잔뜩 산발한 머리를 한 여자의 상체는 매력적이라고 하긴 힘들었고, 대신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매의 것보다 큰 날카로운 발톱을 잔뜩 세우며 내 머리 위로 날아들어왔다. 나는 미묘한 데자뷰를 느끼며 반사적으로 스펠을 외웠다.
"Wáce ierlic!!!"
역행하듯 몰아치는 공기의 흐름에 밀려 하피는 잠시 주춤했으나 다시 한번 맴돌더니 공격하려했다. 그때 모습을 드러낸 갈색 로브를 걸친 사람이 손을 뻗자 그것은 움찔하며 행동을 멈추었다.
"이런, 역시 너였군. 멀린. 네가 그렇게 큰 힘을 가지고 있는줄은 몰랐는데..."
나를 알고있다는 듯한 말투에 나는 몸을 굳혔다. 그럴 사람은 없을텐데.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경계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로브를 살짝 내려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보였다.
"그때 그 광대?!"
그는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대뜸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 그리고 아서 때문에 난 졸지에 실업자가 됐어. 아니,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쳐나온게 그나마 다행이었지. 그래...너만 방해하지 않았어도!!"
난 정말 기가 찼다. 그럼 이 모든게 그 엉뚱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된거란 말야?
"그게 왜 내 탓이야!! 당신이, 그리고 당신 주인이 계획한게 얼마나 위험한 거였는지 알기나 해? 너희들이 먼저 시작한 게임이야."
나는 부글거리는 화를 삭히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나도 당신이 이렇게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어. 왜 당신의 힘을 좋은데 쓰지 않지? 그런 악하고 비겁한 왕을 섬기기 보다는 더 나은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러니 그만하고 일단 물러나!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아!"
"하! 날 걱정해주신다? 눈물나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어!! 난 단지 네놈들이 짜증날 뿐이야! 일단 너희부터 혼내주고 내 미래계획을 설계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가 빠르게 몇마디를 중얼거리자 그에 화답하듯 몬스터가 다시 기세를 되찾고 공격해왔다. 나는 몇번인가 그것을 저지했으나 하피는 단지 주춤했을 뿐, 별다른 타격을 받는 것 같지 않았다. 마법사를 없애야 한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나는 잠시 절망감에 빠졌으나 일단 다른 사람들을 도우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을 집중하며 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Forlætan me a....."
"비켜! 이 바보!"
순간 갑자기 밀쳐내는 힘에 나는 휘청하며 물러났다. 내 앞에는 언제 달려왔는지, 아서가 나의 앞에 가로막듯이 서서는 하피와 대치하고 있었다. 아서가 몇번인가의 검격으로 그것을 쳐내자, 그 기세에 그것은 조금 거리를 두고는 물러나 경계하듯 퍼덕거렸다.
누가 바보라는거야! 마법 해제 주문이면 한놈 정도는 안 보는 사이에 없앨 수 있었는데!
"멀린, 위험하잖아! 평소 네 특기인 도망치기는 어쩌고 그렇게 멍청하게 서있는거야?!"
내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그것은 다시 달려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멀찌기에서 나머지 일행들이 네댓마리의 하피를 상대로 정신없이 싸우고 있었다. 지금은 괜찮지만 곧 체력적으로도 한계가 올 게 분명했다. 일반 검으로는 제대로 된 일격을 날릴 수 없을텐데...나는 어쩔 수 없이, 하피의 발톱을 이리저리 쳐내고 있는 아서의 검을 목표로 속삭이듯 스펠을 외우기 시작했다.
"Bregdan anweald sweord!"
하피의 몸통을 공격하는 타이밍을 노려 그의 검에 마법력을 불어넣었다. 응답하듯 살짝 빛난 검은 몬스터의 안을 깊숙히 찔렀다. 드디어 하피는 치명상을 입은 듯 맥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가 눈채채지 않았기만을 빌며, 그나마 옅게 깔린 안개에게 감사했다.
몬스터가 죽은걸 확인한 아서는 화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고개를 숙이고 말을 꺼냈다.
"미안, 도망치려고는 했었어... 도와줘서 고마워."
화난 얼굴로 뭐라고 내뱉으려던 것 같았던 그는 입을 몇번 뻐금거리더니 이내 포기한 듯 했다.
"알면 됐다. 떨어져 있으면 위험하니까 옆에 붙어 있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는 아서는 내 어깨를 격려하듯 툭 쳤다. 쓸데없는 오지랖이야 왕자님. 하지만 이런 위험할 때에도 시종을 위해 달려올 수 있는 아서는 정말 내가 택한 왕이 맞았다. 나는 복잡한 마음은 잠시 잊고 잠시 뿌듯함을 느꼈다.
우리는 나머지 일행이 있는 쪽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몇 발자국인가 걸었을까, 나는 또 느껴지는 소름끼치는 존재감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려 하였으나 이번엔 그 마법사가 한참 빨랐다. 막 마법사의 손에서 뻗어나온 마법의 힘이 나를 향해 뻗어왔다. 그리고, 아서는 나보다 더 재빨랐다. 내가 당황으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사이, 아서가 다시 내 앞을 가로막더니 그의 검을 세워 마법을 받아내며 한쪽 팔로 나를 옆으로 밀쳐냈다.
"안돼!!"
섬뜩한 푸른 빛을 받아내느라 부들거리는 아서의 손. 내가 걸어놓은 마법의 효과로 검이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오래 가지는 못 했다. 결국 얼마 못가 검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정통으로 마법을 맞은 아서는 뒤로 튕겨나갔다.
"아서!!!"
나는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잔뜩 찌그러든 갑옷이 방금 그 일격의 위력을 대변하듯 그의 가슴이며 배를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그의 호흡을 방해하고 있을 갑옷을 벗겨내려 애썼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아서의 창백한 입술에서 피가 한줄기 흘러내렸다.
눈앞이 하얘지는 감각. 나는 잔뜩 억눌린 외침을 쏟아내었다.
"으아아아아!!"
주위의 기운이 몽땅 어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질서를 잃은 공기가 지독한 바람이 되어 주위를 온통 휘날렸다. 나무들이 그 서슬에 온통 몸을 떨며 나뭇잎을 쏟아낸다. 강풍을 견지디 못한 마법사는 이내 주저앉아있었고, 나는 곧장 주위를 확인할 새도 없이 정신없이 주문을 외웠다.
나의 손에서 쏟아진 힘을 맞은 그 마법사는 산산조각나 흩어져버렸다.
눈물때문인지 안개때문인지 시야가 엉망이었다. 모든게 엉망이다. 나는 모든 정신력을 다 그러모아 아는 치유마법들을 쏟아냈지만 회복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달려오는 란슬롯의 외침을 들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
정신을 차렸을 때엔 이미 어두워진 가이우스의 집무실 안이었다. 지끈대는 머리를 한번 흔들어 정신을 일깨운 나는 일어나자마자 옆 침대에 누워있는 아서를 발견했다.
"멀린! 정신을 차렸구나!"
가이우스가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정신없이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가 이내 아서를 보며 물었다.
"아서...아서는 괜찮나요?"
가이우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핏기없는 아서의 얼굴에는 생명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고 끊어질 듯 미약한 숨소리만이 아직 숨이 붙어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글쎄... 일단 가능한한 처치는 다 했지만... 내상이 너무 심해 보이는구나. 갈비뼈가 몇대 주저앉은건 물론이고 내장기들도 꽤나 타격을 받은 듯 해.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마법사와 만났어요. 아서가 절 감싸려다가 대신 맞아서...."
맙소사,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가이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에서 란슬롯의 목소리가 끼어들어왔다.
"널 탓하면 안돼 멀린. 반대 상황이었더라도 넌 그렇게 했을거 아냐."
"그건 란슬롯의 말이 맞다. 일단... 모든 방법을 동원해 봤으니 지켜볼 수밖에 없겠구나.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건...말도 안 된다. 내가 무엇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를 지켜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놔둘수는 없다. 그것도, 나를 지키기 위해 죽는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난 평생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거다.
"내가...어떻게든 해 보겠어요. 꼭 그를 살려내고야 말겠어요."
가이우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멀린, 네 마음은 안다. 하지만...이번엔 너의 마법으로도 힘들 거란다. 거의 죽은 사람을 살려낼 정도의 생명력과 마법을 가지고 있어야만 할텐데..."
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가이우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것은 자명했다. 나는 시험 삼아 치유 마법 몇개를 시도해봤지만 여전히 변화는 없었다. 나는 한동안 아서의 병상 옆에서 혼란스러운 머리를 끌어안고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스친 한 가지 생각에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
지하감옥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그날따라 지독히도 길게 느껴졌다. 그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위대한 드래곤이라면, 그를 살릴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지금으로선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서 나와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내 외침이 커다란 동굴 이곳저곳에 부딫히며 메아리쳐 울렸다. 그에 화답하듯 날갯짓 소리와 함께 내려온 드래곤은 그 거대한 몸을 사뿐히 내 앞에 내리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젊은 마법사여. 이번에는 또 무슨 곤란으로 나를 불러냈나?"
"아서가 죽어가고 있어요! 당신이라면 그를 살릴 방법을 알고 있지 않나요?!"
드래곤은 장난스럽다고 느껴질 정도의 여유로운 태도로 놀란 듯한 몸짓을 해보이더니 여상스럽게 말했다.
"아서가 죽어간다고? 이상하군, 그의 운명은 적어도 지금 끝나지 않을 터인데, 너무 일러."
나는 초조함에 참을성이 사라져가는 걸 느끼며 외쳤다.
"알아요, 나도 예상 밖이니까! 나 때문에 그가 크게 다쳤어요. 그리고, 드래곤, 당신의 운명을 위해서라도 아서를 살려내는걸 도와야만 할 겁니다!"
드래곤은 내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나의 운명? 그건 너의 소망이지. 나는 왕국이나 알비온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다. 단지 나 자신의 자유만이 나에겐 주요 관심사이지."
나는 사납게 드래곤을 노려보았다. 드래곤은 그런 나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이어 말했다.
"보아하니 아서는 꽤나 치명상을 입었구나. 마법의 힘으로도 몸 안이 훼손당한 상태는 쉽게 치유하기 힘들다. 적어도 보통 인간의 힘으로는 무리겠지. 그리고 너에게도 아직 무리다, 마법사여."
"방법은 있단 말이지요? 어떻든 좋으니 알려줘요!"
"치유 마법의 원리는 대강 알고 있겠지? 그것도 결국 마법사의 몸에서 빌려간 생명력을 매개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정도 상처를 치유하려면 네 생명력을 몽땅 담보로 삼아야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만약 위험을 감수한다 해도 성공은 장담하지 못하지."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내 목숨으로 그를 살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놓겠어요."
이제 드래곤은 근엄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동안 나를 바라보던 드래곤은 이내 나의 강한 의지를 읽은 듯, 콧김을 흥 하고 내뱉더니 말했다.
"함부로 말하는구나, 젋은 마법사. 좋다. 나로선 아직 네가 죽게 할수는 없지. 이번에도 내가 힘을 보태준다면, 너의 약속은 더욱 확고한 것이 되는 것이다. 아서의 목숨값을 기억해라. 넌 반드시 나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줘야만 한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무엇을 요구하든지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드래곤은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마법의 힘이 실린 드래곤의 숨결을 나에게 내뿜었다. 알지 못했던 지식과 힘이 내 안에 흘러들어오는 감각에 나는 압도되었다.
"네가 그걸 쓸 수 있는 것은 이번 뿐이다. 이번엔 네가 마법을 쓸때 내가 함께 주문을 완성할 것이니까. 다른데에 쓰려고는 생각지 말아라."
"아서를 살려내기만 하면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드래곤."
감사를 표하고 나는 바쁘게 돌아나가려 했다. 그런 나를 드래곤이 불러 저지했다.
"운명이라는 것은 변수가 많은 것이지. 하지만 이번 일은 나로서도 정말 의외구나. 너희 사이에서 예정되지 않았던 미묘한 감정이 느껴진다."
나는 그 언급에 얼굴을 굳혔다.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간 드래곤은 이어서 말했다.
"그것이 너희에게 좋은 방향이 될지, 나쁜 방향이 될지는 너의 몫이다. 멀린. 하지만 그렇게 평정을 잃은 모습을 보니 우려가 되는군. 현명하게 대처해라. 적어도 내가 풀려날때까지는 말이다. 하하하!"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를 남기며 드래곤은 다시 위로 사라져갔다.
-
내가 다시 가이우스의 집무실로 들어가자 란슬롯이 벌떡 일어나 나를 맞았다. 내 발자국소리에 지쳐 선잠에 들었던 듯한 가이우스도 부스스 일어나 눈을 부볐다.
나는 인사할 새도 없이 아서에게 달려가 그를 살폈다. 여전히 호흡은 미약했고, 입술은 새파랬다. 나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의 몸에 두 손을 얹었다. 붕대 아래로 느껴지는 기이한 느낌에 나는 몸을 떨었다. 나는 앞에 서서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두 사람에게 번갈아 시선을 던지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심호흡을 몇번 한 나는 조용히 스펠을 외우기 시작했다.
"Ic pe purhhaele ...."
긴 주문을 외워가는 사이 내 손에서 힘이 모이며 빛을 내뿜었다. 웅얼거리는 내 입을 타고 또 하나의 목소리가 겹쳐지는 것이 느껴졌다.
["pinu licsar mid pam sundorcraeft paere ealdan ae!"]
깊은 곳에서 울리는 듯한 낮은,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읉는 낮선 언어. 드래곤이 힘을 빌려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생명력이 아서의 몸으로 흘러들어갔다. 내 몸을 타고 흐러내리는 그 감각에 나는 전율했다.
길고 길었던 마법이 끝나고 나는 드디어 아서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갑자기 일은 현기증에 나는 간신히 침대 곁을 부여잡고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아서의 얼굴에는 온기가 돌아와 있었다. 혈색좋은 입술에서 깊은 숨이 흘러나왔다.
"맙소사, 멀린. 네가 해냈어!"
란슬롯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아서를 살폈다. 가이우스도 몇번인가 그의 상처를 살피더니 이번엔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멀린, 괜찮니? 이건...이건 정말...믿기지 않는구나. 네 목숨이 위험할수도 있는 마법이었어! 너무 무모하구나!"
그 말에 란슬롯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가이우스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전 멀쩡해요, 가이우스...어떤, 강력한 힘을 가진 친구....가 도와줬어요."
나는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서 말을 흐렸다. 그 모습을 보더니 그는 알았다는 듯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 다른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너도, 아서도 무사하다니 정말 다행이다. 기적같은 일이구나."
그날 밤새 나는 만류하는 둘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서의 곁에서 그를 간호했다. 위기는 지나가고, 오늘 밤을 넘기면 그 뒤로는 무리없이 회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새벽녘이 되었는지 주위는 한층 밝아졌다. 나는 온갖 생각을 하며 아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래곤이 한 말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 이번 일은 정말 더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 안에서 넘쳐난 감정이 결국 알게모르게 주변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그것도 나쁜 방향으로. 내 스스로의 감정이 안좋은 변수가 되는 상황을 나는 용납할 수 없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란슬롯이 내 옆으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나와 같이 아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좀...쉬지 그래? 이제 그는 괜찮을거야. 내가 무슨일 있으면 널 깨울께."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괜찮아. 이러고 싶어서 하는 거야. 너야말로 좀 자둬. 피곤할텐데."
그러는 동안에도 난 아서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잡은 손에서 온기를 느끼지 않으면 불안했다. 아서가 눈을 떠서, 그 총명하게 빛나는 푸른 눈을 보여주기 전엔 난 절대 안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너... 정말로 아서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 잠시 망설였지만 그냥 진실하게 대답했다.
"좋아하는 것 이상이야...... 그는 내 운명이니까. 우습게 들릴거라는거 알지만, 나도 믿지 못했어. 하지만 이젠 왠지 알 것 같아."
"멀린..."
"이 바보같고 둔하기만한 멍청이 왕자가 나에겐 전부가 되어버렸어. 하하, 그렇게 따지면 내가 제일 바보네."
키득거리며 웃는 내 모습에 란슬롯은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떤건지 이해해. 나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웬이 나의 운명이라고 느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란슬롯의 표정은 아픈듯, 진지했다.
"말은 몇마디 나누지 못해도, 존재만으로도 이해받는 느낌이지.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그녀의 존재는 늘 느껴져. 마치 무언가의 끈에 얽혀있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설레는 것 이상이야. 나에게서 떨어져나간 반쪽이 있다면 그런 느낌일까."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든, 어디에 있든지, 아서와 알게 됨으로서 나는 비로소 나의 존재가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완성되는 기분. 그걸 말하는 거겠지. 란슬롯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다시 카멜롯에 돌아온건... 그웬을 만나기 위해서였어."
"왠지 그럴 것 같았어. 굳이 지금 돌아올 이유가 없어 보였으니까..."
"나는 아서와 그녀의 사이를 알고는 사실 괴롭지만 반쯤 포기하고 있었어. 하지만 최근에, 우연히도 그녀와 연락이 닿아서 그녀가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지. 근처에 온 것조차 오랜만이었는데 그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어. 그리고 정말 그녀가 찾아와줬을 때에는... 난 결심할수밖에 없었어. 어떻게든, 한번쯤은 그녀를 위해 부딪혀봐야겠다고."
아, 설마 예전에 그웬이 자리를 비웠던 때가 ...나는 작게 깨달음의 탄성을 올렸지만, 그의 생각에는 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아서가 말이 통할 상대라고는 해도, 상대는 권력을 가진 왕족이었다. 조금 놀랐지만 란슬롯이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무모하지만 그의 정직함에는 언제나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서는 적어도 아예 말이 안 통할 상대는 아니니까. 하지만 란슬롯, 너무 기대하지 않는게 좋을수도 있어. 아서는 그웬을 깊이 사랑하고 있고, 적어도 그의 옆에는 지금 그녀가 필요하니까. 결국 네가 추방당하는걸로 끝날지도 몰라. 그래도 해볼 생각이야?"
"응, 어떤 결과가 되든지 난 언제나처럼 내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로 했어. 아서가 깨어나 어느정도 기운을 되찾으면 얘기해볼거야. 말리지 마, 멀린."
"안 말려. 내가 널 말릴수나 있겠어? 단지 아서가 널 죽이려 들라치면 내가 도와줄테니 그건 걱정하지 마."
난 농담을 섞어 말하며 그를 툭 쳤다. 란슬롯은 피식 웃더니 답하듯이 어깨를 쳤다.
"넌 어떡할거야? 끝까지 아서에게는 숨길 생각이야?"
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야지. 난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는걸 알고 있으니까."
"이번 일을 봐서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아서는 너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
"딱히 내가 중요한건 아냐. 아서는 누구나 소중하게 생각하지. 그리고 그게 그의 장점이고 왕의 자질이야. 매번 껄렁하고 오만해 보여도, 속은 정말 괜찮은 녀석이라구."
"그래도 누구나를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날리진 않을 것 같은데. 그리고, 이대로는 네가 너무 힘들지 않겠어?"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뭐, 이젠 익숙해. 그의 곁에 있는건 언제나 힘들지. 하지만 이번건 생각지도 못한 실수야. 그러니 더더욱 난 내 마음을 접어야겠어. 이번 일로 뼈저리게 느꼈달까- 나도 내가 이렇게 될지 예상 못했지만, 이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감정이야. 나에게도 아서에게도."
뭐라 말하려 드는 란슬롯에게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너에게 들킨게 제일 예상 못한 거였는데. 난 괜찮을거니까 걱정 마.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을거야."
그래야만 한다. 난데없이 생겨난 감정으로 얽혀버린 운명을 끊어버릴 것이다. 이번엔 질질 끌지 않을 거다.
"너 이녀석... 네가 카멜롯 최강이구나. 강한 녀석..."
"그래, 몰랐지? 에헤헤..."
란슬롯은 내 머리를 끌어가 쓰다듬으며 마구 머리카락을 헤집어놓았다. 나는 조금쯤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에 안도했다. 직접 말로 꺼내어놓고 나니 한결 정리가 된 기분이었다.
이제 곧 아침이 밝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