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lin-아서/멀린] The Elixir of Love (8)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메스껍다.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아침햇살과 함께 점차 현실감각이 진해져왔다. 이런 숙취는 처음인 것 같은데.
부스스하게 일어난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탁자에 앉아있는 란슬롯을 보고는 힘없이 인사했다.
"으...속이 안좋아....좋은 아침이라고는 못하겠다. 잘 잤어, 란슬롯?"
란슬롯은 대강 대꾸하더니 나를 붙잡고 다시 방안으로 밀어넣었다. 영문을 모른 채 끌려가 침대에 도로 앉혀진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좋은 아침이라고 못 하겠어... 어제 일 기억나?"
"어?... 너랑 술마시고 있던거까지는 기억하는데..."
"내 이럴 줄 알았지."
"왜...내가 무슨 술주정이라도 했어?"
란슬롯은 좁은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결심한 듯 내 앞에서 멈춰섰다.
"어제 아서가 너 찾으러 왔다가 많이 오해하고 돌아갔어. 네가 가서 풀어라..."
"응? 그랬었나? 근데 무슨 오해를...내가 아서를 보곤 놀리기라도 했나..."
란슬롯은 당황한듯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으으...너 진짜 기억 못하는구나? 네가 어제..."
그리고 뒤이어 그가 해준 얘기는 엄청나게 당황스런 것이었다. 내가 란슬롯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하필이면 그때 날 찾아온 아서가 그 장면만 봤다고 한다. 그리고는 란슬롯이 뭔가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는 묘한 표정으로 그냥 가버렸다고-
"아서의 표정을 보아하니, 뭐... 우리가 그렇고그런 상황에서 발견된거라고 받아들이는거 같더라고... 너무 심각해보여서 내가 쫒아가서 해명한다해도 무리일거 같았고."
나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르는걸 느꼈다. 어...어제 그 꿈이, 꿈이라고 생각했던게 사실은 진짜였던거야? 게다가 그렇게되면, 아서라고 생각했던 그건...
"헉... 란슬롯. 내가 뭐 이상한 짓 했...었어?"
란슬롯은 묘하게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상한 짓...이라기 보다는. 흠흠, 술주정치곤 섹시해서 좀 놀라긴 했지만..."
으아아아! 부끄러워서 죽고싶다는게 진짜 이런 때에 쓰는 말이구나! 내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때 란슬롯이 이어 말했다.
"괜찮아, 이제 다 이해하니까. 거두절미하고 물어볼께. 너... 아서를 좋아하지?"
그 말에 나는 쥐어뜯던 손길을 멈칫 멈췄다.
"무...무슨 소리를...?"
"어제 네가 나를 아서라고 불렀거든. 아마도 나를 그와 착각한 모양인지..."
이젠 뭐라 둘러댈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망할... 술을 그렇게 마시는게 아니었는데! 난 후회와 부끄러움이 섞인 기묘한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고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위에서 란슬롯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안 부끄러워해도 돼. 그것보다 너네 사귀고있는거 아냐? 그러니까 더더욱 네가 가서 말해야되고, 네가 하는 얘기면 결국 그도 들어줄거야... 그러니까..."
그런거면 차라리 좋겠다마는..."아아... 그런거 아냐. 우린 아무 사이도 아냐...단지..."
의아해하는 란슬롯에게 나는 어쩔수 없이 그동안의 사건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정말이지, 란슬롯한테는 나의 비밀만 잔뜩 밝히게 되는구나. 이것도 무슨 인연일까.
"너... 꽤나 마음고생 했겠구나."
나는 예상치도 못한 한마디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해의 말을 들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황, 혹은 최악의 경우 경멸조의 농담이라도 듣는거 아닌가 했는데. 란슬롯은 내가 생각했던거보다 더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내 앞자리에 앉더니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럼 오히려 잘 된건지도 몰라. 그냥 다 얘기해버려. 아서에 대한 감정을."
"무슨 소리야..."
"아니, 그러면 오해도 풀릴거고..."
"그걸 듣는다고 아서가 과연 좋아할까? 아니겠지. 내가 왜 여태까지 말을 못하고 있겠어..."
"그래도 그가 어떻게 느낄지는 네가 모르는거잖아. 그렇다면 한번 부딫혀보는것도...."
"아니, 이미 반응은 정해져있어. 바보취급 당하고 난 더이상 시종으로도 있을 수 없겠지. 너도...알다시피.. 그는 그웬을 좋아하고있는데다, 난 심지어 남자라구!"
그웬의 얘기가 나오자 란슬롯은 괴롭다는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고개를 몇번 끄덕이더니 말했다.
"하지만 왠지 나는 아서가 그렇게 나올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어제 그의 반응이라던가, 너에게 하는 태도라던가."
그거야말로 내 말을 뒷받침하는 증거지. 나는 슬퍼졌다.
"그러니까... 그 반응을 보면 내 말이 옳다는거지. 아마도 지금쯤은 자기 시종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소름돋아하고 있을게 분명하니까."
란슬롯은 말이 없었다. 우리는 한동안 침묵했다.
"괜찮아 란슬롯. 그냥 이번에도 잘 둘러대면 괜찮을거야. 술주정이었던건 사실이니까. 그도 봤으니까 알 거 아냐? 설명하면 이해해줄거야."
나는 옆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재킷을 대강 꿰어입고는 나갈 채비를 했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지, 아침이 늦어지면 또 무슨 소릴 들을지 모른다.
"네 오해도 풀어줄테니까, 걱정말고!"
나는 그렇게 소리치며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
나는 왠지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해가며 아서의 방문 앞에 섰다. 아서가 어제 어디까지 봤던지, 결과적으로는 달라질 건 없을거다. 단순히 난 술주정 한거 뿐이야. 그게 진실이고. 아서도 술냄새를 맡았다면, 그리고 그렇게 널부러져 있는 날 봤다면 처음엔 놀랐다고 해도 그냥 그런 사고였다고 논리적으로 판단했을 거다. 기껏해야 한동안 놀림거리나 되겠지. 그렇게 되뇌이며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좋은 아침-"
이런, 깜짝이야. 왠일로 잠꾸러기 아서가 이미 일어나있었다. 게다가 옷도 다 챙겨입고...나는 가능한한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말하려 했다.
"휘유- 해가 서쪽에서 떴나요 전하? 믿을 수가 없는데요. 이렇게 일찍 일어나시다니."
"...이정도야 뭐."
아서는 내쪽을 힐끔 보더니 이내 다시 눈을 돌렸다. 역시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다. 어찌됐든 나는 가져간 아침식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그를 위해 의자를 뺐다. 식사하는 와중에도, 그는 나와는 농담한마디는 커녕, 눈도 잘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설마... 난 입맛이 써지는걸 느끼면서도 지나가듯 물었다.
"저기...아서. 혹시 어제 밤에 내 방...아니, 가이우스 방에 오지 않았었어?"
"갔었지."
아...역시나였군. "그 그래, 네가 급하게 나가버렸다길래, 무슨 일인가 하고...진짜 무슨 일 있었어?"
"별거 아니야. 그냥 가이우스를 찾아 갔다가 없길래 나간 것 뿐."
"아..아하, 그랬구나...말이라도 좀 해주지. 나도 란슬롯도 있었는데...하긴 나 그때 끝내주게 취해있어서 도와주지도 못했겠다, 아하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별다른 말이 없는거에 감사해야하는건지, 하지만 그의 태도를 보면 뭔가 걸리는게 있었다. 아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방안을 채웠다. 나는 잠자코 그의 시중을 들고는 이윽고 빈 접시를 치워 나갈채비를 했다.
"너, 그때...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했었지."
갑작스레 들려온 아서의 목소리에 나는 손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서는 여전히 시선을 딴데로 둔 채다.
"그거, 란슬롯이냐?"
뭐? 난 생각지도 못한 이름의 등장에 접시를 거의 깨트릴 뻔 했다. 허둥거리며 접시들을 제대로 담으며 나는 말했다.
"아하하... 아무리 그래도 너무 뜬금없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왜 찍어도 그렇게 찍냐...란슬롯은 심지어 남자잖아!"
"... 어제 네 방에서... 봤어."
으...결국 그 얘길 꺼내고 마시겠다 이건가.
"미안하지만...방해할 생각은 아니었어. 란슬롯이 와서부터 너네 사이가 좋은거 보고 혹시나 했었는데... 어제밤 후로 확실해 지더라. 어젠 뭐, 고백의 시간... 이런거였나?"
"와....아서, 아니야! 아니라고! 어젠 그냥 내가 술주정으로-"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허둥지둥 말했다. 맙소사 어떻게 그게 그렇게 보이나? 내가 당황하는 모습이 얹짢았는지 그가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멀린! 괜찮으니까 그렇게 허둥대지 마. 네가 남자를 좋아하든 당나귀를 좋아하든 괜찮으니까-"
당나귀?? 지금 내 얼굴에는 완전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라있을게 분명하다. 말 참 곱게 한다 왕자님. 난 뭐라고 더 둘러대볼까 하다가 이미 이야기가 너무 빠진 것 같아서 관두었다. 지금 상태로는 무슨 얘길 해도 변명으로밖에 안 받아들이겠지. 대신 나는 숨을 고르고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아아, 그래. 그거 다행이네. 뭐 어짜피 너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잖아. 너한테는 별다른 짓 하지 않을거니까 걱정 말고."
나는 씁쓸하게 내뱉었다. 아서는 그런 나에게 당황한 말투로 말했다.
"뭐? 상관이 없어? 너 또 잊어버린 모양인데, 난 네 마스터야. 그런데도 상관이 없어?"
아아... 또 저건가.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리는군.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란슬롯은 아니야. 어제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거아니었고. 말했잖아, 완전 취해있었다고. 내가 착각하고 그런거 뿐이야."
"그럼 누구랑 착각하고 그러고 있었던건데?"
윽, 끝까지 물어볼 생각인가...나는 어떻게 둘러대야할지 고민했다.
"에...음...나...나는..."
"나는?"
아서가 재촉하듯이 말을 반복했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렇다고 대뜸 '너야' 해버릴수도 없고-
"나는... 아아!! 나도 몰라. 난 진짜 기억도 안 난다구! 완전 필름이 끊겨서...아마 무슨... 아가씨 상대로 좀 로맨틱한 꿈이라도 꿨나 보지"
으, 이렇게까지 해명해야돼? 부끄럽다. 아서는 혀를 쯧 차더니 말했다.
"어떤 덩치큰 아가씨길래 란슬롯이랑 착각을 해?"
"아우...나도 잘 모르겠다니까...그냥 술주정이니까 잊어줘라, 응?"
닌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일에 왜이리 신경을 쓰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안그래도 속이 타는건 바로 나인데. 아서는 그런 나를 보더니 한숨을 푹 쉬고는 이야기는 끝났다는 듯 뒤를 돌아 서랍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후...됐다 그럼. 아까 말했다시피 난 괜찮으니, 너도 너무 신경쓰지마."
그리고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물어볼 때 이외엔 시선을 피하는 상황이 여엉 적응이 안 된다. 이건 뭐랄까, 그답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갑자기 좀 화가 났다. 내가 실수한거긴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있을수는 없잖아. 답지 않은 그 모습에서 이미 거리감이 느껴져서 더 그랬다.
그는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거에 계속 구애되고 있는 거겠지. 기분 나쁘다 이건가. 넌 내 그정도 '다름'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거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너, 내가 남자 상대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날 경멸하고 있는거지?"
아서는 내 말에 움찔하더니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런거...아니야."
"그럼 왜 갑자기 나를 잘 쳐다도 못 보는건데? 정말 그렇다 쳐도, 그게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거북하면... 나 대신 다른 시종을 쓰라고! 어짜피 내 대용은 차고 넘치게 많다며?"
난 점점 커지는 목소리에 스스로도 당황하며 잠시 숨을 골랐다. 내 말에 비로소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아서의 눈길은 해석하기 힘들었다. 찌푸린 눈썹아래 흔들리는 눈.
오늘 아침엔 뭔가 다 꼬인다. 나는 더 이상 그 어색한 침묵속에 있기 힘들어서 재빨리 그릇들을 들고 뛰쳐나왔다. 그리고 문앞에 기대서 고개를 떨구었다.
"멍청아....나도 널 보고 있기 괴로워서 그래..."
그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문 틈을 통해 작게 들려왔다. 그 소리가 더 날 가슴아프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