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lin-아서/멀린] The Elixir of Love (7)
다음날 파견된 토벌대에는 나도 끼어있었다. 하루만에 침대에서 털고 일어나는 란슬롯을 보며 가이우스는 혀를 내두르며 그를 다시 눕히려고 했지만, 란슬롯은 정말 괜찮다고, 이왕이면 빨리 가서 확인하는게 좋겠다고 했다. 나는 오랜만에 제대로 먹혀준 내 회복마법-이상하게도 자주 실패한다-에 으쓱해짐을 느끼며 채비를 도왔다. 아서는 따라가려는 나를 말려댔지만, 아직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은 란슬롯도 있고 하니 따라가야겠다며 고집을 부리자 그도 항복한 듯 했다.
얼마간 말을 달려 몬스터와 만났던 곳 근처까지 가서는 각자 근처를 수색했다. 한동안을 꽤 넓은 범위에 거쳐 훑었지만 잘못 부딫혀 부러진 듯한 화살 몇개를 제외하고는 별 다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따스한 햇살만이 숲을 평화롭게 비추고 있었지만, 나는 혹시라도 나타날지 모르는 그 정체모를 마법사가 마음에 걸려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제의 그 소동은 거짓말이었던 것 마냥,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예 철수해버린걸까? 결국 오후 늦게가 되어 우리는 일단 철수하기로 하고 다시 카멜롯으로 말을 몰았다.
조금 기울어진 태양빛은 따스하고 아늑했다. 숲길을 일렬로 걸어가는 말의 발소리와 새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이따금씩 쏟아지는 잠기운을 쫓으려 애쓰고 있었다. 어제 잠을 좀 설친 데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온 몸이 노곤했다. 고개를 흔들고 스트레칭도 몇번 해 보았으나 깨는것도 잠시 이내 졸음이 쏟아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서의 뒤에서 따라가고 있던 내 말은 조금씩 뒤쳐지기 시작했고 어느덧 몸이 스르르 내려갔다. 완전히 낙마하기 직전, 떨어지는 느낌에 나는 번뜩 눈을 떴지만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나는 볼썽사납게 말에서 흘러떨어졌다. 그 서슬에 말이 당황한듯 푸르릉거리며 멈춰섰다.
뒤집어진 시야 안으로, 바로 내 뒤에 있었던 란슬롯이 급히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뒤를 따르던 기사 셋은 내 모습을 보더니 웃으며 나를 지나쳐갔다.
"멀린, 괜찮아? 깜짝 놀랐잖아. 어디 아픈거야?"
어느새 말에서 내려 손을 뻗어오는 란슬롯에게 의지하여 나는 넘어졌을때 부딫힌 곳이 아파오는 걸 느끼면서도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란슬롯에게 나는 차마 떨어져서 아프다는 말 하기도 부끄러워 그저 눈을 한번 부비고는 멋쩍게 대답했다.
"아니... 그냥 좀... 깜박 졸았나봐. 으하암..."
란슬롯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 밤부터 내 다리 상처 돌본다고 잠을 잘 못자서 그렇구나? 미안."
"아냐아냐, 나 자주 이러는걸. 신경쓰지 않아도 돼."
정신을 좀 차리려 쑤셔오는 어깨며 등을 좀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어느새 다가온 아서의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그래, 자주 그러지. 그렇다고 어떻게 말 위에서 졸 수가 있냐? 너의 낙천적인 성격은 정말 존경스럽다. 멀린."
내가 입을 삐죽해 보이자, 내려다보는 아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어쨌든, 다친데는 없나?"
"덕분에 괜찮습니다, 전하."
내가 기세좋게 안하던 격식차린 말투로 대꾸하며 억지로 웃어 보이자, 아서는 눈살을 찌푸렸다가도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 그럼 냉큼 다시 말에 올라가. 잠은 집에 가서 자고. 조금만 더 가면 돼."
그 말을 남기고는 나서 아서는 다시 말을 돌려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왕 걱정해준거 전에 다른나라 공주님한테 해줬던 것처럼 앞에 태워주거나 하면 좋을텐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다가 아무리 잠결이라지만 스스로가 얼마나 어이없는 상상을 했는지를 깨닫고는 웃어버렸다. 그런 나를 뜨악한 얼굴로 바라보는 란슬롯에게 나는 그냥 멋쩍게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멀찍이 떨어져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기사들을 의식하며 다시 말에 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멍해서 그런지 안장에서 자꾸 발이 미끄러졌다. 젠장, 나는 낮게 중얼거리고는 앞을 향해 외쳤다.
"그만 웃고 얼른 가요~! 곧 따라갈테니까!"
기사들의 웃음소리가 답하듯이 들려왔다. 우이씽...쪽팔린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몇 번 치고는 다시 말에 오르려고 했으나, 이번엔 란슬롯이 나를 막았다. 그리고는 훌쩍 자신의 말에 오르더니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 손 잡고 올라와."
에엥? 내 말 말고 거기에 타라고? 그럼 내 말은? 내 의아해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란슬롯은 말했다.
"같이 타면 적어도 존다고 떨어지진 않을거야. 네 말은 옆에서 같이 인도해가면 되니 걱정하지 말고."
"하 하지만... 그럼 너무 번거롭잖아. 말 두마리를 동시에 돌보기도 쉬운게 아닐거고."
"괜찮아. 말 다루는건 자신있으니까. 그리고 급하게 달려가는 길 아니니까 별거 아니야. 내가 이정도는 해줘야지. 자, 얼른."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냥 그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괜히 또 떨어져서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는 거보다 나을 것 같기도 했기에...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가며 그의 뒤에 앉았다.
"또 안 떨어지게 내 허리에 손을 두르고 그냥 기대. 자는건 괜찮지만 제발 다시 떨어지진 마라."
란슬롯이 웃으며 말하자, 나는 졸리기도 해서 그냥 냉큼 그의 허리에 팔을 감고는 등에 기댔다. 그리고는 그에게 말했다.
"미안... 덕분에 살았다. 이상하게 너무 졸려서 힘이 안들어가네. 내가 도착하면 맛있는거 대접할께. 흐암..."
그 말에 란슬롯이 웃는지 그의 어깨가 들썩이는게 전해져왔다. 그는 잠자코 내가 잘 고정되있는지 확인하더니 내 말의 고삐를 한쪽손에 그리고 그의 말고삐를 한쪽손에 잡고는 천천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조금 뒤 앞의 일행들을 따라잡은 듯, 기사들의 휘파람과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휘익- 그림 좋은데? 멀린, 드디어 네 기사님을 만난 거냐?"
"으하하, 잭, 그건 너무했다! 어쨌든 란슬롯, 정말 대단한 승마술이군 그래? 하하핫"
나는 아차 싶은 마음과, 졸지에 셋트로 놀림거리가 된 란슬롯에게 미안함을 느꼈지만 뭐 이렇게 된거 어쩌랴하는 마음에 그냥 포기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등에 기댄 채로 그들을 향해 힘없이 씨익 웃어보였다.
그렇게 자기들끼리 떠들며 앞장서 가는 기사들을 지나쳐 아서의 말이 고개를 돌려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바로 옆에서 나를 훑어보더니 왠지 화난듯한 표정을 지었다.
"멀린, 난 네 말을 타고 오라는 소리였지 란슬롯껄 타고 오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난 졸음이 섞여들어간 멍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미안미안. 나도 아는데... 또 떨어지긴 싫어서..."
"바보같긴! 그럼 차라리 내...'
그때 듣고있던 란슬롯이 한마디 거들었다.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제가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별 문제 없을 겁니다."
"란슬롯, 네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멀린은 내... 시종일 뿐이다."
"압니다. 하지만 그는 저를 돕느라 잠이 부족한 탓도 있으니, 이정도는 돕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너무 마음쓰지 마시기를."
란슬롯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더 이상 할말이 없는지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나한테는 막하더니 란슬롯한테는 못 이기는군? 나는 졸려서 멍한 와중에도 왠지 그러고 싶어져서 아서를 향해 짖궂게 승자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나를 바라본 아서의 미간이 한층 더 찌푸려지더니, 매서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말을 달려 앞으로 돌아가버렸다.
이윽고 카멜롯에 도착했다. 나는 잠시동안이었지만 란슬롯의 등에 침을 흘려버릴 뻔 할 정도로 잘 자버렸고, 덕분에 좀 개운해졌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모두에게 수고했다고 일일히 인사를 건네고는 말을 마굿간에 넣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아서를 따라 그의 방에 올라가서 그가 정리하는 걸 도왔다. 그러는 내내 아서는 왠지 무언가에 화가 난 듯한 뚱한 모습이었다. 내가 말을 걸어도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내가 볼썽사납게 굴어서 화가 났나? 그가 무엇때문에 화가 났는지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난 그저 묵묵히 준비를 마쳐주고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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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무일 없이 무사히 돌아오고 나서, 나는 란슬롯과 회포를 푼답시고 바로 술집으로 직행했다.
저녁시간을 살짝 넘긴 술집에는 사람들로 바글거렸고, 그 소란스럽고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한참을 떠들며 벌꿀술과 맥주를 연달아 들이켰다. 내가 아서의 흉내를 내자 란슬롯과 몇몇 무리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몇번인가의 건배와 웃음소리들. 그렇게 분위기를 탄 나는, 마침 마음이 복잡한 참이기도 해서 그랬는지 평소보다 좀 많이 마셨던 것 같다. 얼마나 지났을까, 술집의 천장을 마지막으로 내 필름은 끊겨버렸다.
시원하게 느껴지는 시트의 감촉에 나는 깨어났다. 이마위의 차가운 수건과 내 얼굴을 스치는 따스한 손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여전히 시야는 흐리고 울렁거렸고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여기는 어딜까? 얼굴께에 와 닿는 손과 존재감이 기분좋았다. 뼈가 도드라진 남자다운 손, 그리고 이 온기...
나는 그 기분좋은 온기에 뺨을 부비며 만족스런 소리를 냈다.
"으응...기분좋아..."
나는 무의식중에 그날 밤을 떠올렸다. 몸에 살풋 열이 감돌았다. 간신히 눈을 살짝 떠보면 역광에 비친 넓은 어깨의 실루엣이 어렴풋한 촛불에 어른거린다.
이제 거둬가려는듯이 움직이는 손을 나는 어리광부리듯이 내 손을 뻗어 잡았다. 그는 잠시 움찔하는 듯 했지만 그저 그대로 있었다. 허락의 의미일까? 조금 더 원해도 되는 걸까?
나는 멍한 머리와 술기운 탓으로 느리게만 느껴지는 손을 움직여, 잡은 그의 한쪽 손을 내 입술에 가져가 키스했다. 애정어린 키스를. 그러자 그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누르듯 올라와 장난스럽게 천천히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 감촉에 오싹함을 느끼며 살짝 혀를 내밀어 입술 위에 머물러 있는 손가락 마디를 핥았다. 그리고 손목과 팔을 더듬어 어루만졌다.
든든하게 느껴지는 강인한 팔, 나를 안아줬던 팔.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듯 위에 보이는 그의 그림자. 그 가슴에 매달리듯 손을 뻗으며 상체를 조금 올리자 이내 현기증이 밀려와 나는 다시 침대로 흘러내렸다. 그런 나를 추스리듯이 어깨를 잡았던 그의 손이 뒤이어 드러나있는 쇄골과 목선을 쓰다듬었다. 그 살갖에 스치는 건조하고 따스한 피부의 느낌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으응...."
한동안 굴곡을 확인하듯, 내 쇄골과 가슴께에 머물러있던 손의 느낌은 이제 어깨부분을 스치더니 이내 사라졌다.
"...멀린, 너 많이 취했어."
나도 알아. 안 그럼 이런 꿈을 꿀리가 없잖아. 나는 빙긋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어른거리는 그의 실루엣에 안겨들며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아서... 아서..." 이제 다 좋으니 날 안아줘.
"괜찮아... 이제, 안아줘...."
"멀린, 너 ..."
등 뒤를 받쳐주는 팔의 느낌에 나는 편안함과 동시에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외로웠어, 다시는 이런 순간이 오지 않을거라 생각하니 너무 외로웠어.
그때, 쿵,하며 뭔가 부딫히는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나는 다시 침대로 추락했다. 침대가 출렁거리며 온 세상이 울렁거린다.
이리저리 섞인 말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듯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