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lin-아서/멀린] The Elixir of Love (6)
#끝나지 않은 마음
몇일간, 언제나와 같은 평화롭고 따분한 일상이 흘러갔다. 그 동안 몇번인가 사냥에 동행했고, 대장간에 들렀으며, 마구간을 청소했다. 그 이후, 아서는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듯, 투정이 조금 줄어서 덩달아 일들이 한결 줄었다. 다행스러우면서도 조금은 심심해진 느낌이다.
어쨌든 그렇게 이러저러 흘러가던 하루하루였는데, 그날은 뜻밖의 변화가 생겼다.
조금 여유가 생긴 오후 즈음에 나는 가이우스의 부탁으로 약초를 구하러 성 밖으로 나와있었다. 성 밖이고 인적이 드물어질 시간이긴 하지만,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는 않은 숲 초입인데다 흔히 구할 수 있는 기본 약초들이기에 혼자 나와도 그다지 위험은 없다.
자주 오는 장소에 도착한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약초를 캐어 가방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바람도 적고 맑은, 마음을 여유롭게 만드는 날씨다. 한참을 그렇게 작업하고 있을 때, 조용함을 깨고 풀들이 스치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나는 콧노래를 멈추고 서서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조용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작고 불규칙한 소리. 소리로 판단해서는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동물이라기보다는 사람의 발소리에 가까운 소리였다. 혹시 모르기에 난 근처의 나무로 몸을 숨겼다.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거친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나는 위험인지 확인하기 위해 살짝 그쪽을 살폈으나 무성한 가지와 풀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있는게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무언가 무거운 것이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다시 숲은 조용해졌다.
잠시 주저한 나는 조심스레 나무에서 벗어나서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여행자로 보이는 남자가 쓰러져있었다. 엎드린 뒷모습만이 보였기에 나는 달려가서 그를 확인하려 했으나 갑자기 하늘에서 들려오는 찢어지는 비명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멈추었다. 소리도 없이 나타난 커다란 물체...아니, 동물......? 응? 사람??
소리를 확인하려 고개를 들자, 내 위로 날개가 달린 커다란 새, 그러나 여자의 얼굴을 한 몬스터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기회를 노리듯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젠장, 저게 뭐지?!
하지만 더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몬스터가 매가 먹이를 발견한양 나를 노리고 활강했다.
"Wáce ierlic!!!"
스펠을 외우자, 주위를 강하게 진동한 공기가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 괴물은 피하려는 듯 멈칫했지만 이미 가속도가 붙은 상태가 완전히 회피할 수는 없었다. 비틀하며 기세를 잃고 뒤로 조금 물러난 몬스터는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몇번 공격의 기회를 노리는 듯 했지만 마법에 꽤나 위협을 느꼈는지 이내 하늘 위로 사라졌다.
공격이 먹힐지 어떨지 몰랐는데 다행이었다. 어쨌든 한숨을 돌린 나는 다시 쓰러진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숨은 붙어있는 듯 어깨가 작게 들썩거렸다.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를 조심스레 바로 눕히자, 예상치도 못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나 나는 당황과 반가움에 소리치듯 내뱉었다.
"란슬롯!?"
쓰러져 누워있는 그는 내 목소리에 반응하듯이 살짝 눈을 뜨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멍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뭐라고 말 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힘이 실리지 않은 그의 목에서 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입술만이 달싹거린다.
"...물을......"
간신히 낸 그의 첫 마디는 그것이었다. 다시 보니 그의 입술은 바싹 말라 있어서 나는 일단 당황을 눌러가며 황급히 물병부터 꺼내 그의 입에 물을 흘려넣어 주었다. 물을 흘려가며 간신히 목을 축인 그는 한숨 돌렸다는 듯이 숨을 내쉬더니 보일듯 말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일단 나도 숨을 돌리고는 상처를 입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를 살폈다.
이곳저곳에 난 자잘한 생채기들은 대단치 않았지만 다리쪽에 화살이 박혀있다. 꽤 시간이 지난 상처인 듯 주변에 흘러내린 피들은 이미 꽤나 굳어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상처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이 상태로 걸어온 모양이었으니, 이미 피를 많이 잃은 상태일 터였다. 그래도 아직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대단한 체력일지, 정신력일지...
"Licsar ge staðol nu!"
화살을 뽑아내자 마자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러 상처를 눌러 지혈하며 꽉 조여매었다.
손에서 생겨난 빛이 상처를 어루만지듯 감싸다가 이내 사라졌다. 란슬롯은 한결 여유가 생긴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실력은 여전하네, 멀린."
란슬롯은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걸 알고 있었다. 내 조심성이 부족했다기 보다는 그의 관찰력이 더 뛰어났던 거라고 해야할지, 그걸 인정할 용기가 있었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그는 비밀을 지켜주기로 했고, 가이우스를 제외하면 카멜롯에서 만난 사람 중 유일하게 내 비밀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만나서 함께한 시간은 적었지만 다행히도 그는 믿을만한 사람이 분명했다. 그는 어느 기사들 보다도 더 명예와 정의를 알 만한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쓰는 마법인데다, 그 말이 왠지 반갑기도 해서 나도 긴장이 좀 풀리는걸 느끼며 대답대신 웃어 보였다.
"피만 멎게 했을 뿐이니까 빨리 가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돼. 이것저것 궁금한거도 있고... 사정도 있겠지만, 일단 가이우스에게 가서 치료받자."
"고마워... 이번엔 네가 내 생명의 은인인 셈인가."
"하하...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일어설 수 있겠어?"
그는 느리기는 했지만 일어나 절뚝거리며 걸어보였다. 나는 그의 팔을 내 어깨에 둘러 부축하고는 조심스레 왔던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
간신히 성 근처에 다다랐을 때에는 난 거의 탈진 상태였다. 천천히 걸어왔음에도 그의 무게를 어느정도 지탱하며 맞춰 걷는다는 건 꽤나 벅찬 일이었다. 그래서 성문 근처에서 마침 순찰 중이던 아서와 만났을 땐 나도 그 기막힌 우연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확인한 아서는 이내 병사들과 달려왔다. 그 모습에 긴장이 풀린 우리는 그냥 주저앉아 버렸고, 곧 그들은 들것을 가져와 란슬롯을 실어 옮겼다. 급한 일이 수습된걸 확인한 아서는 당황섞인 말투로 물었다.
"멀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휴...숲에서 괴물을 만났어. 여기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란슬롯은 그것과 싸우다가 다쳤고...나중에 장소랑 자세히 얘기해줄게."
내 말에 아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릎꿇다시피 주저앉아있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을 잡고 부스스 일어났지만 이내 힘이 풀려 다시 휘청했다. 그런 나를 아서가 받아들다시피 부축해서 간신히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으차차- 잡았다. 야, 왜이래? 너도 어디 다쳤어?"
"아하하... 그냥 다리 힘이 풀려서..."
"너란 녀석은..."
아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직접 나를 부축하려했다. 왕자가 시종을 부축한다니 그거 참 그림 되겠군. 나는 황급히 그의 어깨에 둘러진 내 팔을 뺐다.
"이제 괜찮아. 혼자 걸을 수 있어."
"뭐야, 아직도 쫄아서는 계집애처럼 후들거리고 있는거 다 보이거든? 도와준달때 고맙게 받으라고."
"...괜찮다니까."
"그럼 이렇게 하지."
그 말을 끝내자마자 아서는 날 들어올려서는 어깨에 들쳐맸다. 깜짝놀란 나는 매달린채로 버둥거렸다. 한창 실랑이를 벌이다가 나는 간신히 땅에 내려설수 있었다. 이자식이 오늘따라 왜 되도않는 친절을 베풀려고 이 난리야.
"너도 참 고집세다."
"내가 왕자님한테 짐짝처럼 옮겨지다가 고귀한 왕자님 어깨라도 나가면 어떻게 책임지겠어."
"아- 그으래.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는지 몰랐네. 어쨌든 이제 기세가 돌아온 듯 하니 돌아가볼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릴듯말듯 들려왔다.
"어쨌든...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멀린."
그는 말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는 조금 감동해 벙쪄있다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가 끄덕이는 걸 보지 못했겠지만 아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덕분에 난 그가 보지 않는 틈을 타서, 마음껏 얼굴을 붉힐 수 있었다.
-
"하피 라구요?"
솜씨좋게 상처의 처치를 마친 가이우스가 책을 덮으며 말했다.
"그래, 네가 본 게 여자와 새를 합쳐놓은것 같은 몬스터가 맞다면 말이다, 멀린. 그리고 우리 모두가 걱정하고 있듯이, 이 전설에서나 나오는 몬스터는 아마도 마법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전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아서는 얼굴을 찌푸렸다.
"멀린, 확실히 본 게 맞아? 란슬롯은 화살에 맞은 상처 뿐인데-"
나는 발끈해서 뭐라고 말하려 하였으나 어느새 깨어난 란슬롯이 침대에 올려져있던 내 손을 잡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란슬롯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멀린이 본 게 맞습니다, 전하. 애초에 그것과 싸우고 있었던 거니까요. 화살은 갑자기 나타난 어떤 인물이 싸우고 있던 와중에 쐈기 때문에 맞은 것이구요."
"그렇게 화살에 맞은 채로 도망치던 참이었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전하."
아서는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계속 쫒기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어떻게 여기까진 무사히 왔지? 멀린이 그 상황에서 도움이 되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든데. 네가 결국은 그걸 쫒아버린건가?"
그 질문에 란슬롯은 좀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무엇인가 말하려 했다. 그래서 나는 잽싸게 변명했다.
"물론 란슬롯이 했지! 그놈도 결국 쫄아서 도망가더라고. 란슬롯은 내 생명의 은인이야."
"멀린..."
란슬롯은 당황한 듯 했지만, 내가 부탁하는 눈길로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그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서는 한층 더 미간의 주름을 깊게 만들었지만 이내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그럼, 란슬롯. 너에게 화살을 쏜 그 사람이 일련의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 몬스터는 일종의... 그 사람의 명령에 따르는 듯한 행동을 보였으니까요."
"마법사일 가능성이 있겠군. 그 인물의 인상착의는 기억하나?"
"짙은 갈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얼굴까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그럼 회포는 나중에 풀기로 하고 일단은 휴식을 취하도록. 나는 왕께 보고하고 토벌대를 보낼건지 고려해보도록 하지. 고생했다 둘다."
우리는 아서에게 고개를 숙여보였고 아서는 이쪽을 흘긋 보더니 나에게 잠시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일어나 그를 따라 문 밖으로 향했다.
"그의 상처는 어떻지? 나을때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대답했다.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 다행히도 깊이 박히진 않았고, 한동안 움직일때 좀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무리없이 완치될수 있다고 가이우스가 그랬어. 한 이삼일 동안은 좀 안정을 취하며 진통제 신세도 좀 져야겠지만."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토벌대가 가게된다면 그도 동행시키게 될 것 같으니까. 어딘지 알고 있는데다, 그라면 꽤 큰 전력이 되주겠지."
나는 대뜸 끼어들었다. "나도 갈게."
"멀린. 네가 가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니. 위험할 뿐이야. 넌 그냥 여기 남아."
"내가 이쪽 지리는 그보다 나을껄. 그리고 내가 언제 그런거 따지고 따라갔냐."
아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마음대고 하라고 한마디 남기고는 몸을 돌렸다가 갑자기 생각난듯 다시 물어왔다.
"란슬롯은 앞으로 묵을데는 정했나? 알아둬야 나중에 부탁하러 가지."
아 그거라면..."아, 그는 한동안 내 방을 같이 쓰기로 했어. 이쪽으로 오면 돼."
아서는 그말을 듣더니 왜인지 꽤나 놀란 표정을 하곤 되물었다. "너랑 같은 방??"
"응. 저번에 왔을때도 그렇게 잘 있었었거든. 오래있을거 아니니까. 간호도 해야되고."
뭔가 이상한 말을 했나? 아서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기에 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하고 잠깐 고민했지만 그저 아서의 반응을 기다렸다. 아서는 잠시 생각하는 듯 뜸을 들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서...설마 침대를 같이 쓴다거나..."
난 그 질문에 뒷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저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거야?
"당연 아니지! 간이침대 하나만 펴면 돼! 아서, 너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면 재미 없어!"
아서는 여전히 벙찐채로 "농담... 아 그래, 농담이지. 하하, 그렇고말고.."라는 둥 중얼거리며 머쓱하게 자기의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작게 한숨을 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어 그 시선을 받아내며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별다른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단지, 무슨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
나는 이 침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아서의 눈만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한 기분. 암묵적인 동의가 존재하는 듯,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서있던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내 손목을 그러쥐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생긴건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아서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가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순식간에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살핀 나는 당황하며 일단 손을 빼려고 했지만 아서의 힘은 완강했다.
"아, 아서...?"
조심스레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움찔한 아서는, 고개를 숙여 아직도 내 손목을 잡고있는 자신의 손을 확인하고는 그제서야 손을 떼었다.
"아, 미안"
잡을때처럼 천천히 내 손목을 풀어준 아서는 조금 당황한 듯 자신의 손을 몇번 쥐었다 폈다 하더니 나에게서 한발자국 물러서서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시선은 그대로 복도를 향한 채, 대강 인사를 하더니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망토자락까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몸에 힘을 빼고 간신히 벽에 기대었다. 손자국이 어렴풋이 남을 정도로 세게 쥐어오던 뜨거운 손. 왜 그랬는지 이유를 생각할 새도 없이, 나는 아직도 떠오르는 잡혔던 손목의 뜨거움을 확인하려 나머지 손을 손목에 가져갔다. 당연하게도 온기는 이미 사라져버린 뒤다. 하지만 그 잠깐동안 느낀 아서의 체온에 자신의 몸에는 다시 열이 퍼져가고 있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모든걸 잊으려 창 너머로 보이는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복도에 서서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야, 나는 다시 방 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결국 란슬롯까지 끌려나오고...점점 이야기는 산으로?!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