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lin-아서/멀린] 만우절(1)
아직 ing인 짧막글이지만... 만우절은 지났대도 만우절 주까지 지난 다음 올리자니 좀 꽁기꽁기한 기분이 들어서ㅋ;; 일단 올리고 보는 미완성 글입니다. 갱신이 없어 내려앉은 거미줄도 좀 걷어볼겸 -_-;;;
아서멀린이긴 허나 참 건전하고 별거없는 글!
재밌지도 않은 한마디로 멀린을 속여보려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하는 아서. 뒤에 이어질 멀린 이야기에선 나름대로 복수하고 끝나겠지요?
메인 이야기도 아닌, 리온 어렸을적 얘기를 상상하며 좀 즐거웠다는건 안비밀...
아서는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자신의 테이블 위에서, 회의를 위한 서류들을 살펴보고 있던 참이었다.
예전, 교사들과 공부를 위해 따로 배정되어있던 서재의 책상은 제외하면 자신의 방에 있는 책상조차 거의 장식용 가구 취급을 해왔던 아서였기에, 이 제법 익숙해졌다는 감각은 꽤나 신선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성년식도 지나 왕이 아서에게 조금 더 '실질적인' 정무에 익숙해지도록 권장하며 공식 회의에 동석시키게 되자, 책상의자보다는 말안장쪽이 더 익숙했던 아서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병사들을 이끌고 직접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낸 시간들 또한 중요했지만 장차 왕이 될 이로서 친숙해두어야 할 것은 그 외에도 있었던 셈이다. 어쨌든, 사정이 그렇다보니 한동안은 책상과 종이들에 친해지기 위해 꽤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어느덧 이것또한 자연스런 일과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서는 문득 뒤에서 들어온 바람이 자신의 머리카락과 서류들을 한번 어지럽히고 지나가자, 잠시 손을 놓고 일어났다. 그리고 창문을 닫으려 손을 뻗었지만 이내 시도를 그만두고 그대로 멈춰서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조금씩 파도치듯 불어오는 바람은 따스함 속에 화사한 꽃향기를 담고 있었다. 봄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잠깐 나른한 봄바람을 즐기고 있던 때, 작게 들려온 노크소리에 정신을 차린 아서는 창문에서 몸을 돌려 다시 테이블로 향하며 문쪽으로 들어오라고 말을 던졌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아서의 예상과는 달리 자신의 시종이 아니었다. 들어오자마자 문앞에서 고개를 조아린 소년이 입은 푸른색 패딩 재킷을 보고 그가 견습기사라는걸 짐작해낸 아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냐?"
"이걸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전하." 그 말과 함께 손에 들고있는 쟁반을 조금 내미는 소년의 모습은 그 어딘가 어색한 말투 만큼이나 경직되있어 그가 꽤 긴장해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간신히 꼬맹이티를 벗은 듯한 외모가 아니라도 갓 들어온 풋내기 신참일 것은 뻔했다. 벽난로 근처에 있는 손님용 테이블에 쟁반을 올려놓으라 지시한 아서는 마치 금방이라도 문 밖으로 나가고 싶은 듯 주춤거리는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돌아가기 전에 '이건'뭐고, 누가 보낸건지는 말해줄 거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년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는 황급히 대답했다.
"푸딩입니다. 리온 경이 보내셨습니다."
리온 경이 보내신 푸딩입니다-라고 보통 말하지 않나? 여전히 멋없이 딱딱하고 짧은 그 대답에, 아서는 언짢아지는 대신 왠지 웃음이 터져나오려해 한번 헛기침을 했다. 왠지 익숙한 모습인데-하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누군가'를 닮은 큰 귀를 보는 순간, 아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키득거리고 말았다.
"그래, 알았다. 리온 경에게는 내가 직접 감사의 말과 함께, 네가 맡은 일을 잘 해줬다고 전해주지. 이제 돌아가보도록."
들릴듯 말듯 인삿말을 한 소년은 문을 나서자마자 달리기라도 하는 것인지 급한 발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리온은 지금 서쪽 수비대로 파견을 나가있으니 가기전에 부탁한 것일 거라는걸 짐작할 수 있었지만, 굳이 기사들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견습생들 중 그나마 노련할 녀석들 대신 저런 소년에게 부탁한 것이 참 리온답다고 아서는 생각했다. 의욕은 찌를듯이 넘치지만 뭐든 긴장해서 서툴 시기지-자신도 그런 시절을 보냈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멀린도 초반에는-어쩌면 지금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늘 저런 식이었었다. 아마도 꼬맹이 돌보기 좋아하는 리온이 여엉 서툰 풋내기에게 조금이라도 으쓱해질 기회를 주고싶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아서는 미소지었다.
이제 '선물'쪽으로 주의를 돌린 아서는 손을 뻗어 쟁반을 덮고있는 뚜껑을 열었다. 거기엔 만든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먹음직스런 사과 푸딩이 올려져 있었다. 아서는 오랫만에 옛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오늘이 제법 중요한 날임을 잊고 있었다는걸 깨닫고는 씨익 웃었다. 오늘은 만우절-어렸을 적엔 꽤나 떠들썩하게 보냈던, 그렇지만 철이들고 나서는 그저 흘려보냈던 잊혀진 명절이었다.
아직 둘다 어렸을 때, 어린 왕자가 보낸 우정어린 푸딩을 아무 의심없이 먹고 한바탕 곤욕을 치뤄야 했던 그날을 기념(?)하는 의미로, 철이 든 이후로 그만두게 된 장난 대신, 리온은 만우절이면 이따금씩 푸딩을 보내곤 했다. 그들 사이에 벌어진 장난들은 많았지만, 매운 향신료를 거의 접해보지 않았던 리온이 달콤한 과일 대신 그 독특한 향신료로 속을 채운 푸딩 다만 한입 만으로 반나절을 앓아누웠던 그 사건은 확실히 그 중에서도 꽤나 큰 사건이었다. 물론 그 해프닝은 리온의 복통이 어느정도 가신 후, 그가 죽는 줄로만 알았던 어린 아서가 울어서 부은 눈으로 이번엔 진짜 푸딩을 들고 침대맡까지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하자, 리온이 힘없이 웃으며 사과를 받아주는걸로 별탈없이 끝났다. 리온이 그 뒤로 푸딩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일년정도가 지난 후였을 정도로 후폭풍이 길었지만, 그 사건 이후로 아서가 자신의 놀이상대에게 조금쯤은 더 정중(?)해 졌다는것만해도 큰 수확이었다고 놀리듯이 지적하며 그는 웃곤 했다.
아서는 망설임없이 푸딩을 한입 입에 물었다. 부드러운 빵 안에 잘 익은 사과와 꿀이 골고루 스며든 달콤한 그 맛은 훌륭했다. 저번 만우절 푸딩을 먹은지가 언제였더라- 아서는 그동안의 푸딩들을 되새겨보며, 요리사의 실력이 날로 좋아진다고 생각하며 금새 접시를 비웠다.
테이블에 기댄 채로 아직 코 끝에 맴도는 사과냄새를 음미하던 아서는, 문득 자신의 시종이 사과를 무척 좋아하는 것을 떠올렸다. 제대로 물어본 적은 없지만, 자신의 아침 메뉴에 늘상 들어있는 사과를 남기거나 하면 멀린은 접시를 치우면서도 정말 맛있다는 듯이 먹곤 해서 아서는 제멋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멀린이 늦잠을 자거나 해서 아침을 거른 탓에 뭐든 맛있을수 있는 상황들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사실을 떠올린 아서는 행복해진 위 덕분에 오랜만에 자신의 시종에게 착한 일을 해주고 싶다는 드문 욕구를 느끼며 문앞의 병사에게 주방에 연락해 푸딩 두개를-자기것도 하나. 하나로는 좀 부족했다- 부탁하라고 지시한 후, 다시 서류 무더기를 마주하고 앉았다.
하지만 솔솔 들어오는 봄바람과, 달착지근한 푸딩으로 가득찬 배는 그다지 집중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서는 차라리 이대로 조금 쉬기로 결정하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댄 채 상념에 잠겼다. 만우절...... 만우절이라- 어렸을때 이후로 과격한 장난은 안 치게 되었지만 그래도 거짓말 몇마디는 하곤 했었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번 만우절은 낮설게만 느껴졌다.
작년에 내가 멀린을 어떻게 놀려줬더라? 아서는 잠시 생각을 더듬어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떤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장난을 쳐도 웃음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는(이론상으로는) 이 축복받은 날에, 자신이 멀린을 안 놀려먹었다는건 아무래도 믿기 힘들었다. 어디보자-저번 해 이맘 때쯤에는... 지금은 생각도 안 나는 어떤 퀘스트 때문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숲 속을 쉬지도 못한 채 달려야만 했었다는 것만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상세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건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는 반증일 테지만, 그때의 변덕스런 봄날씨는 꽤나 잊을 수 없는 것이었나보다. 가늘지만 꾸준한 기세로 내리며 옷 속까지 파고들던 서늘한 봄비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떤 아서는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별다른 것이 없었다.
결국, 아서는 놀랍게도 멀린이 자기 시종이 된 후 약 3년 동안, 대충 세번의 만우절을 그런식으로 놓쳐버렸다는 걸 알아냈다. 그리고 그 말인 즉, 한번도 멀린을 거짓말로 놀려먹은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놀라운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아서, 그새 자는거야?"
옆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아서는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언제 돌아왔는지 멀린은 어느새 옆 탁자에 심부름거리들을 늘어놓으며 한심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멀린! 놀랐잖아. 노크 좀 하고 들어오라고 내가 몇번을 말해야겠냐?"
"네가 자느라 못 들은거지 분명히 노크 했거든! 내가 네 꿈속에까지 들어가서 문을 두드려야겠어?"
"잔거 아니야. 그냥 생각 좀 하고 있었던거지."
"아- 그거참 참신하고 믿을만한 변명이네요, 전하. 왠일로 생각이란 것도 다 하시고, 카멜롯이 또 위험에 빠지려나 봅니다?"
시종 주제에 한마디도 안 진다니까. 아서는 기가 찬 김에 뭐라 말하려던 것을 관두고 앞에 있던 서류두루마리 하나를 냅다 던졌지만, 어느새 노련해진 시종은 그걸 어렵지 않게 잡아냈다. 이것 보게?
"잠 깼으면 이거나 확인해줘. 필요하다고 한거 다 사왔어- 고급 양피지 편지지랑 잉크랑......"
"그만. 알겠으니까, 그냥 거기 놔둬."
물건 이름을 하나하나 나열할 기세인 멀린을 급히 저지하고는 이만 됐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자 멀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른 일들을 위해 방 다른편으로 멀어졌다. 그리고 한동안 손님용 테이블 정리니, 갈아입고 던져놓은 옷가지들을 정리하느니 하며 분주히 돌아다니는 멀린의 모습을 보며 아서는 이제 조금 다른 생각에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했다. 멀린은 어렸을때 만우절을 어떤 식으로 보냈을까? 분명 지금의 그를 봐서는 거짓말은 하자마자 들통나는 타입이었을테니, 속이기보다는 속는 쪽이었을 것 같았다. 아서의 어린시절에 멀린같은 꼬마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때의 그를 상상하는 건 은근히 즐거운 일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당황하거나 했을까-
그리고 그 생각들은 결국 아서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대체 멀린은 만우절 장난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멀린도 이미 적극적으로 만우절 장난을 칠만한 나이는 벗어났으니, 어쩌면 오늘이 그날이라는걸 잊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 극적이고 즐거운 반응을 얻을 수 있겠지.
아서는 그 아이디어에 조금 시들했던 뇌가 다시 깨어나는걸 느꼈다. 그리고 멀린을 뭘로 속여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픈척을 해봐?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고... 옷을 거꾸로 입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볼까... 아니 그건 내 품위가 너무 손상되잖아. 몇몇 크지만 귀찮은 장난들은 애초에 포기하고 할만한 거짓말들을 생각해보던 아서는, 멀린이 주변 상황을 이용한 왠만한 거짓말은 금새 이상하게 생각할만큼 자기에 대해 이미 너무 많은걸 알고 있다는것을 뼈저리게 되새기고는 결국 제일 무난하고 쉬운걸로 만우절을 기념해주기로 했다. 그거라면, 좀 느끼하긴 하지만, 빠르고 간단하게 결과를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사실 제일 먼저 떠올렸던 레퍼토리이기도 했고.
방안을 한번 훑은 아서는 옷장 정리를 하는 것인지 어느새 옷장 쪽에 가있는 멀린을 확인하고는 크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쪽을 향해,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멀린-?"
그러자 멀린은 그대로 옷장에 들어가기라도 할 것마냥 박고 있던 상체는 그냥 둔 채, 얼굴만을 빼꼼히 들어 무슨 일이냐고 묻는 시선을 보냈다. 아서는 왕자전하가 부르는데 태도가 그게 뭐냐고 투덜거리고라도 싶었지만, 대의(?)을 위해 그 욕망은 잠시 밀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멀린에게 다가갔다. 멀린은 불러놓고 별 말이 없는데다, 평소같으면 잔소리 몇이라도 날아왔을게 뻔한데도 그저 진지한 얼굴을 한 아서가 자기쪽으로 다가오는것이 의아했는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그제서야 옷장에서 떨어져나왔다.
"왜? 뭐 필요해?"
두발자국 정도 앞에서 멈춰선 아서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런 뻔하고 간단한 레퍼토리에 속을 확률은 50% 미만. 게다가 멀린이 오늘이 만우절이라는걸 이미 알고 있을 경우에는 그보다 못 할 터였다. 그렇지만 그런만큼, 성의를 다해 말투며 눈빛까지 완벽히 처리해야 그 50%의 확률로 성공할 수 있었다. 아서는 그걸 다시금 되새기며 멀린을 마주보았다.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멀린은 언제나처럼 좀 바보같아 보였고, 그점이 아서의 자신감을 조금 채워주었다. 심지어 그 멀뚱히 바라보는 모습은 조금 귀엽게까지 느껴져 아서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혀를 찼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마친 아서가 준비한 대사를 읊으려고 입을 연 순간, 그제서야 이상하게도 자신의 가슴이 뛰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여기까지의 몇걸음에 숨이 찬건 절대 아닐텐데.
자신을 바라보는 멀린의 푸른 눈동자- 멀린을 이렇게 정면에서 지그시 바라볼 기회는 그다지 없었기때문인지, 그 선명한 푸른빛은 낮설만큼 신선하고 맑았다.
"멀린. 해줄 말이 있어."
아서가 한발자국 더 다가가 멀린의 어깨를 두 손으로 살며시 붙잡자, 멀린은 눈에띄게 움찔했지만 그걸 뿌리치진 않았다. 갑자기 급변한 묘한 분위기가 멀린을 붙잡고 있는 듯 했다. 완벽해-! 아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묘한 분위기의 인력에 묶여있는 것은 사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걸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널 사랑해."
그 말과 동시에 멀린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일단 당황이군. 아서의 머릿속은 멀린에게서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흥미진진한 마음과 온갖 예측으로 온통 시끄러웠지만, 반응을 살피면서 그대로 그 모든 것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과 눈빛 그 모두를.
"뭐... 지금 뭐라고?" 잠시 굳어있던 멀린의 입술이 간신히 떨어졌다.
"무슨... 갑자기 왠 장난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하는 멀린의 표정은 여전히 읽기 힘들만큼 멍했다. 정말 제일 기대하지 않았던 말을 들은 걸테니까, 처리 시간이 느린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서는 다시 한번, 진심어린 어투로 정성들여 말했다.
"장난 아니야. 널 좋아한다구."
잡은 어깨에서 전해오는 기분좋은 체온과, 적당히 가까운 거리- 장난이라지만 스스로도 두근거릴 만큼 완벽했다.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서는 멀린의 얼굴에서 그의 만우절 장난의 결과를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그 많은 변수들-코웃음을 친다, 무시한다, 소름끼쳐한다, 정신상태를 의심하여 가이우스에게 데려가려 한다-중에서도 아서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종류의 반응이었다.
멀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귀까지 발갛게 물들었던 것이다.
"아서..." 이번에는 아서가 조용히 당황하고 있을 때, 한참 말을 찾듯이 달싹이던 멀린의 입술에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 담긴 미약한 떨림은 아서의 가슴 한구석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그게... 나...나는..."
놀라움에 예상대로 동그랗게 떠졌던 멀린의 눈은 이제 알수없는 빛을 띄고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도망가고 싶어하는 것 처럼 그 눈꺼풀은 파르르 떨렸지만 눈동자만은 아서에게 그대로 붙박힌 채로, 멀린은 그대로 아서의 손 안에 있을 뿐.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 같은,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불안해보이는 멀린의 모습에, 아서는 스스로도 초조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저 웃음으로 마무리지어질 것 같았던 장난이, 또 푸딩처럼 무언가 역효과를 내려는게 아닌지-
아서는 지금 이 역효과가 무엇에서 기인한건지 깊이 생각해보기도전에 그저 이 장난을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손을 놓으며 짐짓 쾌활한 투로 말했다.
"속았지!"
아무튼 모든게 무사히 끝나길 빌며 아서는 씩 웃어보였다. 닿아있던 손을 떼니 그 이상한 인력같은 것도 사라진 것만 같아서 아서는 안도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렇게 쫄 필요는 없었다. 이렇게 밝히고 나면, 멀린도 만우절이라는걸 알고는 웃어주겠지.
"오늘 만우절이잖아. 장난치는 날. 완전 기대이상의 반응이었어 멀린~"
"만우절...?" 벙쪄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멀린의 어깨를 아서가 장난스레 툭툭 쳤지만,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그래, 설마 모른다고는 안하겠지? 거짓말 해도 용서받는 관대한 날이잖아. 그러니 웃고 넘어가자구. 이정도면 가벼운걸로 넘어가준... 응?"
그동안의 예상치 못한 반응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번에야 말로 정말, 아서는 멀린의 반응에 놀라야 했다. 뭐에라도 얻어맞은 듯 다시 감정이 사라졌던 멍한 눈위로, 순식간에 어디서 스며나온 것인지 모를 물기가 번졌다. 눈물? 아서가 그 광경에 놀라는 동안, 눈물은 금새 막을수도 없이 넘쳐올라 뺨위로 떨어졌다. 멀린은 그걸 가리려는 듯이 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아서는 이미 똑똑히 봐버린 후였다. 아서는 누가 자신의 뒷통수라도 때린게 아닐까 의심하며, 당황으로 잘 안 떨어지는 입을 간신히 열었다.
"멀린, 너 설마... 우는거야?"
"아니."
멀린은 이제 완전히 뒤로 돌아서서, 아서에게는 멀린의 뒷통수만 보였지만, 여전히 그가 불안정한 상태라고 아서는 어렵지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그대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성큼성큼 빨래거리를 향해 다가가는 멀린을 황급히 따라잡은 아서는 멀린의 어깨를 잡고 그를 돌려세우려 했다.
"그럼 나 좀 보고 말..."
"아니라고!"
아서의 손을 뿌리친 멀린은,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빨래거리 한웅큼을 집어들고는 그대로 아서를 지나쳐 방문 밖으로 뛰어나가버렸다.
멀린이 뛰쳐나간 뒤로 한동안, 아서는 당황에 휩싸여 그저 그자리에 못박힌듯 서있어야 했다. 잠깐동안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전혀 아서가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눈, 게다가 눈물이라니? 자기 앞에서, 그것도 자신 때문이 분명한 이유로 멀린이 눈물을 보인건 처음이었기에 아서는 자신이 무슨 몹쓸 장난으로 애꿎은 꼬마를 놀린 철부지 골목대장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멀린이 화라도 냈으면 평소처럼 웃어넘겼을텐데...
시간이 지나는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아서에게 다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낮익은 주방담당 시종이 들어와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으로 쟁반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간단한 인사말을 하자, 아서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를 돌려보낼 수 있었다. 다시 혼자 남은 방 안에, 갓 구워져 올라온 것인지 푸딩의 달콤한 향기가 금새 퍼져와 아서의 코를 간질였지만 아서는 아까만큼 식욕을 느끼지 못했다.
아서는 여전히 자신의 말 중 무엇이 멀린을 그렇게까지 아프게 한건지 전혀 짐작할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혼란스러울 뿐. 다만, 그 표정이 진짜라면, 리온 때처럼 반나절만에 웃으며 자신을 용서해줄 순 없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아서의 그 첫 장난은, 푸딩처럼 기념할 것이 못 될것은 이제 명백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마음을 풀어줄만한 진짜 푸딩같은 것도 없을 것 같이 느껴졌다.
푸딩이 완전히 식어버렸을 때 까지도, 멀린은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