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lin-아서/멀린] 만우절(2)
한참을 달리던 멀린은 자신이 어디있는지 의식하지도 못한 채, 빨래거리를 대충 옆에 던져놓고는 차오르는 숨을 가다듬으려 노력하며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채 닦지못한 눈물자국으로 꼴사나울게 분명할 얼굴로 곧장 시종들로 북적거릴 세탁실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기에 일단 밖으로 나왔지만, 그 후로도 사람들이 뜸해지는 곳까지 오기 위해 빨래더미로 얼굴을 가린 채 한동안을 헤메야 했다.
일단 앉자마자 뺨위로 흐르다 말라붙은 눈물자국을 소매로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아낸 멀린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여유가 생기자 눈에 들어온 주위의 풍경은, 자신이 훈련장 근처 풀밭에 와있다는걸 깨닫게 해 주었다. 아침훈련은 끝난지 오래였기에, 저 멀리서 무언가를 정리하는 듯한 몇몇 견습기사 무리를 제외하고는 그 주위로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무와 풀들이 흔들리는 소리만이 이따금씩 들려오는 조용한 훈련장 풀밭에서, 멀린은 서서히 침착함을 되찾아갔다.
그렇지만, 찬찬히 아까의 일들을 되짚어보던 멀린은 다시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뭐 이런 날이 다 있담! 놀림받은걸로 모자라 바보같이 굴고... 굳이 아까의 떠들썩했던 반응을 변명해보자면, 멀린은 만우절이란 걸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다. 아예 아서의 입에서 듣기 전까지, 만우절이란 날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건 장난일수밖에 없었다. 그 아서가, 그런 말을 그것도 자신에게 할 리가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나 당연한 것이었는데, 왜 나는 진지하게 생각해버린거지? 착각해버려 부끄럽고 화가 나는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때 제멋대로 나와버린 눈물은 멀린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놀란 탓에 나와버린 눈물이긴 했지만......그렇게 나는 아서에게서 그 말을 듣고싶었던 걸까? 멀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에 와닿는 애꿎은 풀들을 몇개인가 쥐어뜯었다. 풀들이 무슨 죄인가 싶었지만, 도저히 마음을 풀 곳이 없었다.
그때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멀린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렴풋한 꽃향기를 담은 그 봄바람은 멀린의 부은 눈을 다독여주려는 듯이 따듯한 손길로 어루만지고는, 그 틈에 느슨하게 풀려진 손에서 빠져나온 풀들을 싣고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래, 그 모든 어이없는 일들은...이 화창해진 봄날씨 때문일지도 몰라. 카멜롯에 와서 맞은 그 어느 봄보다도 화사한 이 봄날씨가 마음속에 뭉쳐놓았던 무언가를 잔뜩 흩트리고 지나간 탓일지도 모른다. 점점 자라나고 있던, 아무리 가지를 치고 쳐내도 꾸준히 고개를 들던 그 감정을-그 기대를.
"멀린~ 윽, 이게 다 뭐야... 빨래거리 던져놓고 땡땡이치냐? 대담한데?"
문득 뒤에서 들려온 낮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어느샌가 근처까지 다가온 가웨인이 빨래거리와 이쪽을 번갈아가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북쪽으로 가던 도중 잠시 카멜롯에 체류중인 그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멀린의 방에서 잠시 묵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일로 바빴기에 낮시간엔 이렇게 마주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왠일인지, 가벼운 튜닉만 걸친 채로 성 근처에 있는걸로 봐선 오늘은 멀리 나갈 용무는 없는 모양이었다.
멀린은 여엉 들뜨지 않는 기분에, 그에게 슬쩍 눈짓으로 가볍게 인사하고는 별 말 없이 다시 멍하니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가웨인은 멀린의 그다지 열렬하지 않은 환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털썩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왠일로 이시간에 여기 이러고 있는거야?" 그는 언제나처럼 사람좋은 얼굴로 싱글거리며 물었지만, 멀린은 그저 힘없이 웃어보이는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가웨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잠시 멀린을 응시했다. 마치 무언가 다른 점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 처럼 가웨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자기를 응시하자, 멀린은 가라앉았던 눈가가 다시 뜨거워지는 감각에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다른 건 몰라도 울었다는걸 들키기는 싫은데... 하지만 조금 뒤, 다행히도 그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별다른 이야기 없이 멀린의 옆 풀밭 위에 누워버렸다.
"그럼 오랜만에 친구랑 사이좋게 땡땡이라도 쳐볼까~"
큰 대자로 드러눕자마자 만족스러운 탄성을 올린 가웨인은, 나이가 들면 앉아있기도 힘들다는 둥, 비가 오려는지 허리가 아프다는 둥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 멀린의 입꼬리를 조금 올라가게 만들었다. 그런 능청스러운 태도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가웨인과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그의 입에는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여유로운 웃음이 걸려있곤 했다. 그래서일까, 사실 함께 보낸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데도 마치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친구같이 느껴지곤 했다. 덕분에 곤두섰던 신경이 조금 느슨해지는 감각에, 멀린은 자기를 발견한게 차라리 가웨인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졸지에 땡땡이치는게 되버린 이 상황에 충실하기로 했다. 어짜피 세탁실은 갔어야 할 거였고, 조금 늦어진다고 세상이 위험해지는건 아니니까.
그렇게 잠시간의 나른한 시간이 지나가던 중, 멀린은 문득 궁금해졌다. 가웨인은 만우절을 알고 있을까? 그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덕에 별별 신기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지만, 적어도 여기 카멜롯 근처에 있었던 일은 적었으니 자신처럼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 가웨인은 어떤식으로 반응할까? 멀린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가웨인?"
"음?" 햇빛을 가리려 올린 듯한 손등을 그대로 얼굴위에 올려둔 채 졸린 목소리로 대꾸한 가웨인을 돌아본 멀린은 잠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내가 널 사랑...한다고 하면 어쩔 거야?"
별 생각을 담아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평소에는 거의 쓸일이 없는 그 단어는 역시 낮간지러웠다. 하지만 멀린은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가웨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게으른 자세로 누워있던 가웨인은 그제서야 손등을 조금 올려 멀린을 올려다보았고, 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린 채 몇초간 멀린을 관찰하듯이 물끄러미 바라본 그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야! 아무리그래도 그건 만우절 레파토리론 너무 진부하잖아. 성의없게스리...그치만 그거 진심인거 아니까, 내일 다시 말해. 접수해주지."
아...저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 가웨인도 알고 있었던거다. 몰랐던 바보는 나 뿐인건가? 멀린은 그 웃음에 다시 얼굴에 열이 오르걸 느끼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뒤로도 조금씩 키득거리는 가웨인의 발을 야속한 마음에 몇번 걷어차준 뒤, 다시 무거워지는 마음을 뱉어내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젠장... 바보같아..."
그 낮은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가웨인은 여전히 짖궂게 웃는 얼굴로, 그렇지만 의외로 부드러운 말투로 물어왔다.
"오늘은 바보같은게 당연한거야. 무슨 장난에 걸렸길래 그래?"
"......"
"설마 방금 그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거에 낚이는 사람이 있으...." 기세좋게 시작했지만, 멀린의 여전히 우울한 표정을 확인한 듯, 가웨인의 말은 잦아들었다.
"누가 한건데?"
"......아서."
"허어..."멀린이 주저하며 대답하자, 의외로 짖궂은 웃음도, 놀라움도 섞이지 않은 묘한 감탄사를 내뱉은 가웨인은 그 이후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예상못한 조용함에 멀린이 그를 슬쩍 살피자, 그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이 먼 곳을 바라보다가, 이내 멀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묘하게 가라앉은 시선은 가웨인을 좀 낮설게 느껴지게 했고, 마치 멀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내려는 듯한 그 갈색 눈동자에, 멀린은 뭐라도 변명하고 싶어졌다.
"만우절은 처음이었단 말이야."
멀린이 그렇게 투덜거리듯 내뱉자, 가웨인은 이번에는 곧장, 진짜 놀랐다는 표정을 했다. 그 우스울만큼 과장된 표정에, 멀린은 금새 아까 느꼈던 낮선 위화감을 잊어버렸다. 알기 쉬운 저 반응-역시 가웨인은 늘 이렇다니까.
"에엥? 어떻게 그럴수가있어?"
"적어도 우리 마을에선 그런 날 없었어." 알았다 해도 이런 날을 기념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멀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굳이 고의로 거짓말을 하고 친한 사람들을 골탕먹이는게 즐거운, 그런 짖궂은 날이 있는거지? 누가 만든건진 몰라도, 분명 아서만큼 성격나쁜 사람이 분명했다.
"흠... 결국, 만우절 장난은 처음이라 된통 걸렸고, 그래서 이렇게 우울해하고 있었다 이거야?"
멀린은 대답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왠지 말하면 할수록 바보같았다. 아서는 지금쯤 장난이 제대로 먹힌것에 즐거워하고 있을까? 그의 마지막 반응을 떠올리면 눈물을 봐버린건 아닐까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만약 봤다 해도 그 둔탱이에 자기밖에 모르는 왕자녀석은 장난이 성공한 증거 정도로 생각하겠지-분명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눈물많다고 놀림받는건 싫으니 절대 보지못했어야 해-멀린은 온갖 생각으로 가득해진 머리를 비우려는 듯이 휘휘 저었다.
"별로 그게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온갖 생각이 멀린의 머릿속을 휘젓는 동안 가웨인은 조금 뒤 무어라 중얼거렸고, 생각에 빠져 미처 듣지 못한 멀린은 되물었지만,
"응?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
가웨인은 그렇게만 얼버무리고는 내리쬐는 햇빛이 성가신 듯 이번에는 반대편 팔을 눈가로 올렸다. 그것도 마음에 차지 않았던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그는, 이제 조금 기울어진 해 덕에 멀린의 등뒤로 작게 그림자가 생긴 것을 보고는 꼼지락거리며 멀린의 등 뒤쪽으로 바짝 붙었다. 덕분에 순식간에 자리가 좁아진데다, 졸지에 햇빛가리개가 되버린 것에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가웨인을 바라봤지만 그는 그저 씨익 웃으며 손을 올려, 달래듯 멀린의 등을 토닥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진짜 만우절 장난에 제대로 걸렸다고 투덜거릴거면, 구덩이에 갇혀 반나절을 보낸다던가, 말도 안되는 심부름거리로 마을을 뱅글뱅글 돌거나 정돈 되야지."
멀린이 그 투덜거림에 결국 호기심 섞인 시선을 보내자, 가웨인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자신이 어렸을때 겪었던 최악의 만우절 장난 베스트 몇개를 들려주었다. 구덩이 사건 때에는 친구녀석들이 얼마나 애정을 담아 팠는지, 나중에 올라오는데도 꽤나 힘들었다며 열변을 토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멀린은 덕분에 정말 엄청난 구덩이를 상상해낼 수 있었다. 가웨인은 물론이고, 발을 헛디딘 토끼며 사슴도 몇마리 들어갈 정도로 큰 구덩이를. (발을 헛디딘 멧돼지가 없었다는건 정말 다행이었다) 이야기는 계속되어, 그 중 개구리와 관련된 장난을 들은 멀린은 자기까지 온몸이 근질거리는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었고, 가웨인은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온갖 짖궂은 이야기들을 회상하면서도 가웨인의 입에는 늘 웃음이 걸려있어, 멀린은 그게 그에게는 퍽 즐거운 추억이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멀린, 만우절은 다 그런거야. 진실이 거짓말이 되기도 하고 거짓말이 진실이 되기도 하는 날이지. 그치만 악의를 담아 하는 장난을 치는 날은 절대 아니거든-"
한참을 빠져들어있던 이야기도 어느덧 끝나고, 타이르듯 이어진 가웨인의 설명을 멍하니 흘려듣고있던 멀린은 문득 유난히 머릿속에 맴도는 한 단락을 다시 마음속으로 되뇌어보았다. 거짓말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 거짓말이 되는 날.
"그러니 때론 평소에 못한 얘기를 하기도 하는거야. 뭐든 일단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날이니까. 하루정돈 모두 바보가 되는 날도, 바보들도 용서받는 날이 있어야 삶이 좀 더 즐겁지않겠어?"
그렇다면 오늘 하루는 실컷 말해도 된다는 거였다. 그동안 지나가는 말로도 절대 꺼내지 못했던, 모든 거짓말들을. 멀린은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을 되짚어보았다. 만약 정말 행동으로 옮긴다면, 아서의 반응은 어떨까? 아니, 반응은 어쨌든 좋았다. 과연 이 시도가 자신에게 있어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멀린은 다시 복잡해져오는 머릿속을 흔들어 비워버린 후, 몸을 일으켰다.
"이제 슬 가봐야겠다. 아무리 오늘이라도 땡땡이까진 안 봐줄게 뻔하니까."
가웨인은 풀밭에 누운 그대로 손을 흔들며 멀린을 전송했다.
***
빨랫감 대신 잘 개켜진 옷가지들을 손에 들고 멀린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햇빛에 보송보송하게 마른 옷감의 감촉과 거기에 잘 베어든 향기는 언제나처럼 순수한 행복감으로(세탁담당 시종들은 그렇게 순수하게만 받아들일 순 없을 게 분명하지만) 멀린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지만, 이번에는 점점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그 발걸음에는 주저함이 담기며 느려졌다. 아서가 과연 방에 있을까, 없을까? 기억을 되짚어봤을때, 별다른 일정은 없을 시간이니 방에 있어도 놀랍지 않을 테지만, 보통 방에 있는걸 좀쑤셔하는 그는 이런저런 핑계며 일들로 밖을 돌아다니곤 했기에 멀린은 부디 이번에도 그렇길 바랬다. 이미 아무것도 거리낄것은 없다고, 몇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뇌이고 다짐받은 뒤였지만 그래도 되도록이면 아서와 마주치는 순간을 뒤로 미루고 싶었다. 적어도 저녁식사시간 때 쯤이라면, 각자의 일-먹는것과 시중드는 것-에 집중해서 딱히 작은 일들은 신경쓰는 일 없이 언제나처럼 지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조용히 노크를 하고 방문을 여는 그 순간까지도 멀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도 부디 그 '고귀한' 엉덩이가 봄바람을 못 참고 뛰쳐나갔기를.
문을 막 들어서자 열린 창문에서 들어온 바람이 멀린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레 날리고 지나갔다. 그 기세에 잠시 움찔한 멀린은, 제대로 묶이지 않은 커튼이 펄럭거리는 소리 외에는 전혀 기척이 없다는걸 확인하고는 안도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창문에 다가가 커튼을 제대로 동여맨 멀린은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좀 더 안쪽의 침실로 향했다.
하지만 몇발자국 못 가, 멀찌기에 익숙한 그림자를 확인한 멀린은 놀라 그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개인 테이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창문 근처에, 아까 급히 방을 나섰을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모습 그대로 아서가 서 있었다. 아서는 깊이 생각에라도 빠졌는지, 멍하니 창문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멀린이 들어오는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멀린은 왠지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혀 이대로 조용히 돌아나갈까 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그런 바보같은 생각을 떠올린 스스로에게 놀라며 다시 한걸음을 내딛었다. 옷장 앞에 다가갈 때까지도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는 듯이 정신이 팔려있던 아서는 옷장 문이 삐걱하며 열리는 소리에 그제서야 퍼득 정신을 차린듯 고개를 돌렸다. 멀린의 모습을 확인한 아서는 놀란듯이 눈을 크게 떴기에, 멀린은 또 소리없이 들어와서 미안하다는 의미를 담아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하며 인사를 보냈지만, 그는 별말없이 금새 테이블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리고는 테이블로 성큼 다가가 다시 자리를 잡아 앉고는 종이 하나를 집어들고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아무렇지 않은 태도에 멀린은 한결 긴장을 풀었다. 그래, 그런 별것 아닌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아깐 퍽이나 급하게 뛰어나가더니, 빨래에 불이라도 붙었었냐?"
이크. 갑자기 들려온 아서의 목소리에 멀린은 의도치 않게 다시 움찔하고는 슬쩍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아서는 시선을 서류에 둔 그대로 마치 지나가는 혼잣말이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고, 다행히도 깊이 추궁하려는 듯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럼, 역시 못 본 거로군? 멀린은 속으로 안도하며, 그가 보던 말던 머쓱하게 웃으며 변명하듯 대답했다.
"아하하...넌 잘 모르겠지만, 이쪽에도 순서라는게 있어서 빨리 가야 이렇게 잘 마른 옷을 내일 채워드릴 수 있는거거든요, 전하."
그 말에 여느때처럼 콧방귀를 뀌는걸로 대답을 대신한 아서는 그 뒤로 별 말이 없었다. 이따금씩 무언가를 쓰는지 사각거리는 철필 소리와 종이들이 스치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오늘은 꽤나 봐야할 게 많은 모양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멀린도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로 결정하고는 조심스레 옷장 문을 닫았다. 그리고 최대한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응접실의 청소를 시작했다. 가볍게 창틀의 먼지를 털어내고, 벽난로에 쌓인 재를 치우고 아직은 쌀쌀한 밤시간을 위해 새 장작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련의 행사들. 이젠 완전히 익숙해진 움직임들에 몸을 맡기자, 그동안의 잡다한 생각은 어느덧 머리속에서 사라져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해가 내려가며 창틀의 그림자가 한층 길어지기 시작하자 멀린의 마음 속에서는 밀어두었던 생각 하나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진실이 거짓말이 되고 거짓말이 진실이 되기도 하는 바보들의 날. 만우절이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손을 멈춘 멀린이 문득 아서가 있을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아서는 언제 일어났는지 테이블 앞쪽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곧장 시선이 마주치자 멀린은 놀란 김에 급히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태연한 척, 눈 앞에 있던 도구들을 다시 구석의 수납장에다 넣으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아까부터 뭘 쫄아서 이러는거야, 난! 오늘따라 자꾸 이상하게 행동해버리는 자신을 자책하며 다시 조심스레 아서쪽을 살피자, 그는 어느새 테이블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류뭉치를 한쪽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멀린은 그 뒷모습을 보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되풀이해 속삭였다. 아무것도 아냐, 그냥 장난이야, 그러니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게 하면 되는거야.
"오늘은 일이 많았나보네?"
"응? 아..."
근처로 다가가며 넌지시 말을 걸자 아서는 멍한 눈빛으로 멀린을 한번 돌아보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하는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까부터 정신이 딴데 팔려있는 걸로 보아 정말 숙제가 많은 날이었나보다 하고 생각하면서, 멀린은 보관서고로 가도록 분리되있는 서류뭉치들을 모아들어서는 잊지 않고 가져갈 수 있도록 입구 근처의 작은 테이블에 그것을 정리해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제야 숙제에서 풀려났다는 듯이 한층 개운한 얼굴로 창문 앞에서 기지개를 펴고 있는 아서를 보고 피식 웃은 멀린은, 다시 테이블로 다가가 여기저기 흩어진 필기도구들을 정리하며 잠시 고민한 후, 입을 열었다.
"아서, 사실 나도 해줄말이 있어."
그렇게 운을 떼자, 흘긋 이쪽을 돌아본 아서는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그제서야 멀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창틀에 기대 선 채, 마치 한번 해보라는 듯, 짐짓 짖궂은 미소를 띄웠다.
"그래? 한번 들어볼까."
멀린은 잠시 지금부터 할 일이 현명한 일인지를 고민하며 망설였지만, 이내 결심을 굳혔다. 원래 진실이란건 때로는 어떤 거짓말보다도 거짓말 같은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더욱, 그리고 이런 날에는 더더욱. 하지만 그런 걸 머리로는 안다 해도, 잠꼬대로라도 하지 않으려 노력하던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것에는 조금이나마 용기가 필요했다. 멀린은 조금 차가워진 손끝을 의식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편 뒤, 재빨리 말했다.
"나 사실 마법사야."
"......"
일순 굳었던 아서의 표정은 순식간에 예상한 것 이상으로 볼만하게 변했다. 분명 생각지도 못한 대사였을 테지. 그 얼빠진 표정에 멀린은 긴장도 잊고 웃음을 터트릴 뻔 했지만 간신히 표정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조금 뒤, 아서가 이제 완전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자 멀린은 헛기침을 한번 해 웃음기도 긴장도 완전히 떨쳐버렸다. 한번 내뱉고 나니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기에 멀린은 조금씩 치밀어오르는 묘한 희열을 억누르려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드래곤도 부를 수 있어."
그 말에 다시 한번 커졌던 아서의 눈은 의도가 의심스럽다는 듯 가늘어졌다가, 이내 어이없다는 듯 도르륵 굴렀다.
"... 이젠 대놓고 하는구나. 그래~ 그러시겠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등을 돌린 아서를 바라보며 멀린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른 입술을 축이고, 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결국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널 사랑해."
자신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너무나도 낮설게만 들렸다. 분명 절대로, 절대로 아서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기에 더 그랬으리라. 아서는 그 말에 이쪽을 보려는 것처럼 고개를 조금 돌렸지만 이내 멈칫하고는 그대로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잠시 후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내가 아까 말한 것 처럼. 여엉 참신하지 못한데, 멀린."
아서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멀린은 차라리 그 편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그 편이 마음이 편하니까.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져버린 그 뒷모습은 여러가지를 떠오르게 했다. 급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르곤 하던 뒷모습과, 이따금씩 뒤돌아보곤 짖궂은 말을 던지던 뒷모습. 그리고 차라리 오만하다 싶을 정도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사람들 앞에 섰던 뒷모습과 위험 앞에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듯 지키고 서던 뒷모습이 겹쳐졌다. 가슴이 어지러울 정도로 울렁거렸다.
"많이... 좋아해."
"휴우... 그래 알았어. 미안했다. 그러니 이쯤에서 무승부로 하자구."
아서의 말투에는 한숨이 섞여 있었지만, 멀린은 그걸 느낄 새도 없었다. 다만 갑자기 어디선가 계속 넘쳐흐르는 마음에 결국 속삭이듯 내뱉었고, "내 마음 전부를 다해(with all my heart)..." 그러고 나서야 간신히 입을 다물고 나머지 말들을 안으로 삼킬 수 있었다.
'너만을...'
두 사람 다 장난이라는걸 알고 하는 거짓말. 공허한 것이라는걸 알고 있음에도 멀린의 심장은 그게 진짜인 양 빠르게 뛰었다. 어딘가 간지럽고, 따듯하면서도 묘하게 아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거짓말은 멀린을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했다. 그리고 처음 입 밖으로 꺼내본 말은 확실한 힘을 가지고 멀린에게로 돌아왔다. 그래, 난 아서를 좋아하고 있구나. 인정하면서도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사실을 다시한번 상기하며 멀린은 이번에는 그것을 그저 받아들였다.
"멀린...?"
멀린이 자신의 말에 압도되어 침묵하고 있는 동안, 아서는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뒤를 돌아봤다. 아직까지도 장난치길 좋아하는 이 철부지 왕자는 놀란 아이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멀린은 문득 한없이 어리게만 보이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졌다. 머리를 쓰다듬고, 꼬옥 안아주고 싶어졌다.
장난치기 좋아하고 온통 짖궂은 말뿐인 철부지 왕자.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고, 백성들의 작은 고민을 함께 고민하고, 불의에 화내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왕자. 그리고 이제, 순간순간 정말 왕 다운 모습으로 앞에 서곤하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꿈에도 생각못할 정도로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군주, 친구, 연인... 그 어느 단어만으로 정의내릴 수 없을 만큼 그를 사랑한다.
그렇게 인정하고 나자, 뒤죽박죽이던 마음이 차라리 깔끔해진 기분에 멀린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아서는 그 변화에 놀란 듯 잠시 움찔했지만, 그대로 가만히 멀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성장했지만, 때때로 지워진 짐에 힘들어하는 왕자를 꼬옥 안아주고 말해주고 싶었다. 넌 그 누구보다 위대한 왕이 될거라고. 지금은 멀어보일지 몰라도 꼭 그렇게 될 거라고. 그리고- 어느샌가 그런 너를 사랑하게되어버린 난... 언제나 곁에 있을거라고. 끝까지 곁에 있을거라고.
자기도 모르게 몇발자국인가 앞으로 다가갔던 멀린은, 늦게나마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아서에게 가까이 다가간걸 간신히 깨달았다. 그리고 닿으려는 듯이 조금 올라갔던 손을 급히 내려 뒤로 숨겼다. 정말 끌어안기라도 할 셈이었던거야, 난? 멀린은 또 어이없는 실수를 해버릴 뻔한 스스로에게 당황하며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리고 알수없는 표정을 한 아서에게서 시선을 돌린 멀린은, 그가 별다른 반응이 없다는 것에 감사했다.
이제 거짓말은 그만둘 때였다. 멀린은 몇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평소의 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전, 아서의 표정을 흉내내듯 짖궂게 웃었다.
"속은건 아니겠지? 아까의 보답이야."
그때까지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아서는 그제서야 눈살을 찌푸리더니 몇번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던 그는 곧 포기한 듯 입을 다물고 다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침대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지나가듯 작게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다음부터는 좀 재밌고 참신한걸로 하라구."
"그건 제가 할 말이네요, 전하."
멀린의 웃음기 섞인 말투에 홱 고개를 돌린 아서는 잔뜩 못마땅한 얼굴을 하곤 입술을 삐죽해보였다. 그 표정은 정말 완벽하게 평소와 같았기에, 멀린은 다시 웃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답했다.
***
저녁을 가지러 방을 나선 멀린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조금은 긴장해 있었는지 어느새 굳어버린 어깨를 주무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모든게 만우절답게 잘 끝난 것 같았다. 안해도 될 장난이긴 했지만, 적어도 시도해봤으니 마음은 가벼워졌다. 마지막에 너무 집중해버린 건 확실히 좀 부끄러웠지만, 아서가 뭔가 이상하게 생각할 만큼 대단한 건 아니었으니 이젠 어쨌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다시 만우절을 챙기진 않을 거라고 멀린은 다짐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는 말이다. 애도 아니고-이제 이런 날이 있다는걸 안 이상, 이런 바보같은 일에 당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한번 이렇게 '실수'해 봤으니, 장난으로라도 진심을 입밖에 내는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서를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정말이지, 누가 이런 날을 만든건지는 모르지만......멀린은 조금쯤은 그 사람에게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미소지은 채, 이젠 완전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정리하는 기분으로 뒷내용을 조금 이어보았습니다. 와, 두드리는 내내 닭살돋아 혼났네요 ^.^;;;
여담이지만... 가웨인은 어디서 튀어나와도 위화감이 없기 때문인지;; 문득 넣고는 '저때는 기사일수가 없겠구나!'하는걸 뒤늦게 깨달아버렸더랬습니다... 이런 약방의 감초같은 녀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