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lin-리온/멀린] 밤의 주민 (4/?)
별거 없지만 한번 붙여보는 슬래쉬, 꼐이주의...
와오... 제법 오랜만의 업데네요. 역시나 이번에도 피가 좀 나왔습니다ㅎ;; 거기다 또 분량조절과 끊기에 실패한 듯(...)
스압에 주의해주세요 ㅠㅠ
4.
그녀석들에게 습격당한지도 두달이 지났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그때, 반죽음 상태에서 돌아온 나를 그녀는 눈물로 반겨주었지만... 후회한다.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더이상 짐승처럼 그녀를 물어뜯고 피를 마시고 싶지 않다. 그런 나를 보며 슬픈 표정을 애써 숨기는 그녀의 얼굴도 더이상 보고싶지 않다. 견딜 수가 없다. 이제는 더이상......
심하게 훼손된 작자미상의 일지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초여름의, 아직은 너무 습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오후의 공기는 봄날의 그것처럼 어딘가 나른한 구석이 있다. 멀찌기서 아지랑이처럼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시내의 소리들은 잠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만 귀를 맴돌고, 먼지섞인 태양의 냄새가 주변을 달큰하게 데운다. 멀린은 반쯤 꿈속에 몸을 담근 채, 조금 더 이대로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단 심부름은 다 했고, 저녁까진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일찍 돌아가봐야 아서가 또 잡다한 잔심부름으로 괴롭힐게 분명하다. 그리고 가끔 땡땡이 장소로 애용하곤 하는 이 성벽 계단 구석의 그늘은, 적당히 시원하고 조용해서 낮잠자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멀린은 기분좋은 몽롱함에 만족스럽게 미소지으며 따스한 감촉위에 얼굴을 부볐다. 기대고 있는 성벽은 적당히 따듯하고, 단단하지만 적당히 부드러워서......응? 부드러워...?
멀린은 이상한 기분에 번득 눈을 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회색의 돌벽이 아니라 붉은 색. 그렇지만 눈 앞을 가득 채우는 그 붉은 색 천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은 졸음이 가심에 따라 조금 늦게야 찾아왔다.
"좋은 아침, 멀린"
머리를 기대고 있던 팔에서 울리듯이 들려온 그 목소리에 멀린은 그제서야 몸을 똑바로 세웠다. 거기엔 벽 대신, 낮익은,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이 멀린을 반겼다.
"맙소사, 리온? 왜 리온이 여기... 근데 여긴 어디지..."
한참 자다 깬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멍한 표정이 꽤나 우스웠는지, 리온은 그를 마주보며 조금 웃음을 참는 표정이 되었다가 웃음섞인 헛기침을 했다. 멀린은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그제야 자신이 성벽 구석에서 몰래 휴식시간을 즐기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렸었다는걸 기억해냈다. 그렇게 멀린이 기억을 더듬는 동안 리온은 뭔가 설명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입을 열었다.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봤거든. 너무 곤히 자고 있길래...... 어짜피 슬슬 깨우려고 했던 참인데 때맞춰 일어났네."
그것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했다. 그렇지만 그럼 누가 옆에 온줄도 모르고 잤다는 거야? 정말? 멀린은 리온이 그렇게 가까이까지 올 동안 전혀 몰랐던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어느새 무릎에서 흘러내렸는지 계단 몇개쯤 아래에 굴러가 있는, 약배달을 마쳐 빈 가방을 발견하고는 이번엔 자신이 머쓱한 헛기침을 해야 했다. 확실히 곤히 자긴 했던 모양이다.
"크흠......어깨베개 고마워요. 그렇게까지 안해줘도 됐는데... 오래 그러고 있었던거에요?"
"그리 오래도 아니었으니 신경쓰지 마. 금방이라도 계단이랑 키스할 기세여서 어쩔 수 없이 끼어들었지."
멀린은 대강 상황을 상상해보고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꾸벅꾸벅 졸다가 한없이 머리는 내려갔을테고, 아마 리온이 아니었으면 차가운 바닥과 얼굴을 부비거나 최악의 경우 구르거나 했을수도 있겠다. 하지만 리온이 그런 바보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을 자신을 발견한게 마냥 잘된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무리 시종이라 해도 체통이 있는 법인데!
"어제 토너먼트 준비니 정리니 하며 많이 피곤했을테니 무리도 아냐."
여러가지 생각으로 조금 풀이죽은 멀린을 위한 것인지, 변호해주는 듯한 리온의 말이 들려왔다. 확실히, 어제는 일년에 한번 열리는 정기 토너먼트 때문에 굉장히 바쁜 하루였다. 멀린으로서는 그런 '힘 낭비'로 보이는 토너먼트를 왜 매해 하는지 모르겠다며 늘 불만이었지만-그 불만은 아마도 경기때마다 넘쳐나는 일과 아서의 투정 탓이 클 것이다-가이우스는 그럴 때마다 그런 공식적인 행사는 상징적인 면으로도, 그리고 결속의 기회로도 꼭 필요한 거라는 말로 잊지않고 타일러주곤 했다. 물론 이제 멀린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이우스가 아니면 자신의 투정을 들어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멀린은 어느정도 그걸 즐기고 있었다.
어제를 떠올려보며 리온의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멀린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 토너먼트의 우승도 아서가 차지했고, 덕분에 저녁시간 내내 이어지는 아서의 자화자찬에 일일히 맞장구를 쳐줘야만 했다. 물론 열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맞장구였겠지만, 그런 반응 또한 아서를 즐겁게 한다는 걸 멀린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시종을 괴롭히는 걸 취미로 하는 왕이시니까! 하지만, 그런거야 피곤하긴 해도 악의가 담긴 것도 아닌 단순한 장난이고, 이미 그 둘에게 모두 익숙한 일이다. 어쨌든 그런 자잘한 '일거리'들을 다 밀어놓고 보면, 토너먼트를 구경하는 자체는 꽤나 즐거운 일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온갖 사람들이 다 출전하기에,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의외의 장면이 많을수록 위험은 커지고, 위험이 커질수록 보는 사람으로선 흥미진진한 법이니까.
"그렇게치면 경기에 참가한 리온이 더 피곤할거 아녜요. 근데 리온은 멀쩡하고 난..."
"난 나름 끝나고 푹 쉬었거든. 방금 전에도 덕분에 여기서 좀 쉬었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리온은 그저 씨익 웃을 뿐이었다. 그 뒤로 잠시 침묵이 내려앉자, 멀린은 어제 미처 못 말했던 감상을 떠올리고는 먼저 말을 꺼냈다.
"어제 준결승은 아쉬웠어요. 그렇게 봐주지 않았다면 분명 리온이 이겼을테고 결승에서도 꽤나 승산이 있었을텐데."
"그렇게 보였어? 그렇지만 난 그냥 진거지 봐주거나 한건..."
"전 물론 잘 모르지만, 아서가 나중에 알려줬어요. 케인 경은 주변에서도 꽤나 유력한 영주고, 카멜롯의 손님이기도 하니 예의상 져준게 분명하다고."
그 설명에 리온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이내 그 시도를 포기한 듯 그저 멋쩍게 웃고는 앞으로 시선을 던졌다. 익숙한 그 웃음. 자랑해도 될 만한 일에도 자신에 관한 일이면 별다른 언급이 없는 리온은, 그게 밖으로 드러날 때마다 그렇게 어딘가 조금 난처한 웃음을 짓곤 했다. 그걸 확인할 때마다 평소의 엄격해보이는 모습과의 차이를, 이제는 그의 그런 모습을 안다는 것이 좋았다.
져주는 것이나, 전투에선 앞에 서면서도 환호가 있는 곳에서는 가장 뒤에 있으려는 태도-멀린은 그 모든 것이 다 용기의 한 형태라고 생각했다. 애써 증명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 리온의 그 한결같은 모습은 멀린에게는 일종의 위안으로 다가왔다. 마치, 드러나지 않는 것이 사실은 정말 강한 것이라고 직접 증명해주는 것만 같아서. 드러날 수 없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만은 이해해 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멀린은 리온의 옆모습을 조금 지켜보다가 자신도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맑게 개인 시야 앞으로 펼쳐진 카멜롯 성의 전경은 참 평화로웠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오후 잠깐의 시간이 멀린을 한없이 느긋하고 기분좋게 만들었다.
"끄응- 근데 정말이지, 이런 날엔 막 낮잠자고 싶어지지 않아요?"
멀린이 여유롭게 기지개를 키며 한 말에, 그러게- 하고 간단히 동의를 표한 리온은 마치 확인하듯 화창한 하늘에 시선을 던지더니 한동안 음미하듯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린도 그 시선을 쫒아 성벽 그늘위로 펼쳐진 새파랗게 맑게 개인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눈꺼풀위로 어른거리는 빛만이 어렴풋이 흔들린다. 그리고 한동안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던 그 빛은 조금씩, 조금씩 잦아들어 사라졌다.
-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멀린은 마치 꿈 속의 꿈에서 깨어나는 듯 현실감 없이 나른한 감각 속에서 서서히 의식을 되찾아갔다. 눈꺼풀 바깥으로는 어두움 뿐. 하지만 풀향기와 숲의 향기는, 가라앉은 밤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점차 또렷히 들려오며 나른함을 몰아낸다. 멀린은 본능적으로 서늘한 공기를 한번 크게 들이마신 후, 천천히 눈을 떴다. 눈 앞에서 일렁이는 희미한 빛의 물결. 반딧불이 같기도 한 그 흔들림은, 미약한 별빛을 반사하며 흐르는 얕은 개울의 빛이었다.
"멀린?"
바로 옆에서 들려온 리온의 목소리에 멀린은 그제서야 자신이 나무에 기대있는 것 뿐 아니라, 리온에게 반쯤 안기다시피 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멀린은 당황해 몸을 떼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갑자기 밀려든 나른함에 조금 휘청했다. 그러자 리온은 급히 다시 멀린을 붙잡았다.
"가만히... 괜찮으니 그대로 있어."
멀린을 감싸안듯이 해 끌어당긴 리온의 팔은 단단히 멀린을 지탱해주었기에 멀린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에 당황하면서도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리온...? 여기는? 어떻게 된 거죠?"
"캠프쪽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 그러다 너도 나도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서 잠시 멈춘거야."
주위를 살피다 문득 자신에게 둘러진 붉은 기사단 망토를 발견한 멀린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조금 감탄했다. 왜 '그때'의 꿈을 꾼 건지 알 것만 같았다. 망토는 군데군데 더러워져 있었지만 어느새 체온을 머금었는지 제법 따스하다. 리온은 멀린이 망토를 만지작거리는 걸 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넌 의식이 없는 상태인데다, 체온은 계속 내려가는 거 같길래..."
멀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기운이 없는 것도, 잠시 정신을 잃은 것도 갑작스레 피를 잃은 탓일 것이다. 그것 자체로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어느정도 휴식을 취하고 나면 괜찮아질 테니까. 다만 이렇게 마음 한구석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멀린은 잠자코 리온에게 몸을 기댄 채, 앞에서 작지만 청결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는 개울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가까이서 느껴지는 리온의 따듯한 체온과 작은 숨소리가 그 어느것보다도 멀린을 안심하게 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도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도, 자신도 살아 있다는 것. 그것으로 불안한 예감을 잠시 밀어두기로 했다.
그때, 그런 멀린의 상념을 깨고 리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런거야"
"네?"
"왜 내 말대로 하지 않은거야?"
멀린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리온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고, 특별히 어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한 목소리였다.
멀린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물론 먼저 돌아나와 일행을 부를 수도 있었다. 가는 도중 늑대와 마주친다 해도 혼자라면 오히려 마법을 쓰는 것도 자유로울테니 혼자라도 어떻게든 갈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리온이 버텨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사실은 마음과 반대로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사실은 두려우면서도 자신을 떼어놓기 위해 그러는 거란 걸 알았으니까.
"함께 돌아가고 싶었거든요."
간단하지만 가장 진심이 담긴 대답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어떤 대답이나 반응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멀린은 그대로 리온을 돌아보지 않은 채,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때 그게...필요한 것이라는 건 분명했으니까요. 상처가 나을 정도일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정말 다행이에요."
여전히 이어지는 침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화가 난걸까? 그런 시간이 길어지자 멀린은 조금 초조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어떤 대답 대신, 감싸고 있는 리온의 팔에 조금 힘이 들어가고, 작은 한숨소리가 들려오자 멀린은 움찔했다.
"리온... 화났어요...?"
"그럴리가..."
조심스레 올려다보자 다행히도 리온은 미소짓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듯한 미소를.
"미안해."
멀린은 그 모습을 보며 이제 왜 자신이 꿈속에서 그때의 일을 기억해냈는지 깨달았다. 사실 제일 힘든건 리온이라는걸 자신은 알고 있다. 언제나 그렇게 숨겨도, 난처한 듯한 미소 속에 숨겨진 여러가지 것들을 나만은 놓치지 않으리라는 것...그걸 다시 떠올려보고 싶었던게 아니었을까.
"그런 말 하지 마요. 나도 리온도 무사하잖아요? 그걸로 된 거에요."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리온은 앞을 살펴보고 오겠다며 일어섰다.
"좀 더 쉬어둬."
마치 아이를 다루듯 조심히, 편하게 기대는 걸 도와준 리온은 멀린의 어깨를 한번 두드려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멀린은 그가 곁에서 떨어지고 나서야, 그 온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리온의 모습이 숲의 그늘 사이로 사라지자, 뒤늦게 찾아든 한기에 망토를 더욱 여미며 몸을 웅크렸다.
모든 것들이 잠든 듯 고요한 숲 속, 바람 한줄기. 어둠과 같은 색의 털을 가진 늑대는 그 큰 몸집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어둠속에 녹아들어, 달려가는 그 모습은 마치 그저 땅을 훑고지나가는 한줄기 바람처럼 보였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가 지금은 밤의 주민들의 영역임을, 그리고 그들이 깨어있음을 알리듯 울려퍼졌지만 감히 그에게 접근하는 생물은 없었다. 정처없이 한참을 내달리던 늑대는, 자그마한 빈 터가 나타나자 드디어 멈춰섰다. 빽빽하게 들어찼던 나무들이 잠시 자리를 비켜준 듯한 그 곳에는 주변의 그 어느 나무보다도 거대한 나무 하나가 그 거대한 몸을 땅에 깊숙히 박고 서 있다.
그 앞에 붙박힌 듯 서서 기다리고 있는 한 노파의 모습을 확인한 늑대는 마치 울음소리를 낼 것처럼 고개를 하늘로 치켜올렸다. 하지만 입을 여는 대신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변하기 시작했다. 눈주변부터 삼켜지듯이 사라지는 검은 털 대신 하얀 인간의 피부가 드러난다. 거대한 앞발은 자그마한 손으로 바뀌고 꼬리는 어느덧 사라져, 몸을 두르고 있는 로브자락으로 숨어들었다.
이제 완전히 두발로 선 소년은, 눈을 다시 뜨고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 바로 밑까지 걸어간 소년은 늑대의 것과 같은, 검은 곱슬머리 아래 서늘하게 빛나는 푸른색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어땠어?]
노파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가볍게 질문을 던진다. 어떤 물리적인 음성도 개입되지 않은 채 머릿속을 울리는 의미였기에, 주위의 숲은 여전히 고요하고 정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바람한점 없음에도 이따금씩 의지를 가진 듯 흔들리던 거목의 늘어진 잎사귀에 흘깃 시선을 준 소년은 대답했다.
[언제나와 같아. 상태도 어느정도 예상한대로였지. 다만...]
[다만?]
[거기서 엠리스를 만났어. 그래서 개입할 수밖에 없었고.]
엠리스-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스며올랐다.
[엠리스? 왜 엠리스가 그와 함께 있지? 확실한가?]
소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도 그 침묵의 의미가 설명할 필요도 없는 긍정이라는 걸 이해할 터였다. 눈살을 찌푸린 채 무언가 생각하던 노파는 이내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몇번 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보다.... 개입했다는 건 무슨 의미지?]
소년은 조금 주저했지만, 머릿속으로 그때의 기억의 조금을 노파에게 보냈다. 그녀는 잠깐동안 흐릿한 영상과 의미들을 음미한다.
[그를 살려냈군. 어떤식으로든 그 운명에 끼어드는것은 안된다는걸 모르진 않을텐데.] "감정을 끼워넣지 말라고 내가..."
노파는 조급한 탓이었는지, 강조하려는 것이었는지 육성을 겹쳐서 말하기 시작했지만 소년은 곧바로 그것을 잘라들어갔다.
[엠리스를 돕기 위한거였어. 보면 알잖아?]
[글쎄, '그' 엠리스를 굳이 네가 도울 필요가 있었을지는 의문이군.]
그 의표를 찌르는 말에 이번에는 소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그 행동이 필요한 거였다는 점에서는 자신이 있었고,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그 행동의 저편에는 그녀가 암시한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는걸 알기에 노파의 비꼬는 듯한 말투는 제법 그의 신경을 긁었다. 그렇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그 기사만큼 버텨낸 사람도 드물었다. 대부분은 그보다 일찍 고통과 욕망에 패배해버리곤 했다. 그것도 '완전히'. 그러니 이 기사에게 흥미가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노파는 기분이 나쁜 듯 발로 애꿎은 주변의 흙을 긁적거리고 있는 소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동안의 모든 세월들 속에서도, 때때로 그의 몸짓 언어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알아챌 때마다, 그녀는 묘한 기분에 빠져들곤 했다.
[거기서 그가 그대로 운명을 맞이했다면, 네 할일이 조금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는걸 너도 알고 있을테지.]
[그래,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거기까지 해둬.]
노파는 한숨을 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늑대가 베어문 것 같았던 얇은 그믐달은 그새 사라지고, 별들만이 검은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어쨌든 좀 찜찜하군. 엠리스가 혹시라도 그의 피의 반쪽이거나 한거라면...]
[내가 확인했을 때까지는 아니었어. 그리고... 그 엠리스라 해도 이 운명을 바꿀수는 없겠지. 다만 우리가 더 주의를 기울이면 될 일이야. 변하는건 없어.]
소년은 무언가를 생각하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은 익숙했다. 분명 옛날 일들을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노파는 한걸음 다가가 조심스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는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는지 움찔했지만, 그대로 가만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네가 이 기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건 이해해. 심지어 나도 그러니까. 하지만 그러지 말라구... 인간이란 모두 죽음 앞에서 나약해지기 마련. 그리고 이미 한 운명이 정해진 것임에는 변함없어. 그저 언제나처럼 희망을 버리고 마지막까지 배웅해주는게 우리의 역할이라는걸 명심해.]
그녀를 한번 흘깃 바라본 소년은 몇발자국 걸어가 그녀의 손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늑대는 다시 숲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졌다.
가이우스는 아침을 준비하며 문득 멀린의 방문 쪽을 흘긋 바라보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오후에야 돌아온 일행을 맞아들였을 때부터 부상자들 처치에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던 가이우스였지만, 무엇보다 그를 걱정시킨 것은 멀린이었다. 말에서 내려선 멀린은 겉으로 보이는 부상이 없다 뿐이지, 지독히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가이우스를 도와 부상자들 사이를 분주히 움직이던 멀린은 결국 도중에 쓰러졌고, 그때를 생각하면 가이우스는 아직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늘 위험에 처하고, 다치기도 했던 멀린이지만 가이우스의 입장으로선 그 모습이 익숙해질 리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멀린은 위대한 마법사인 이전에, 아들과 같은 아이였으니까.
그날 저녁, 리온의 도움으로 멀린을 간신히 침대에 옮겨놓고 그가 죽은듯 잠든 것 뿐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가이우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몸을 편하게 해주려 재킷을 벗기고, 뒤이어 스카프를 풀어냈을 때, 가이우스는 그걸 보고 말았다. 멀린의 목덜미에 선명히 남아있는, 마치 야수의 어금니에라도 물린 듯 검붉게 멍든 두개의 상처를. 그 상처들이 생긴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었지만, 가이우스에게는 하나의 가설만이 머리에 떠올랐고, 그건 그가 내내 우려하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당연한 가설이었다.
가이우스는 리온 쪽을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다만, 잠자코 스카프를 물에 적셔 상처를 닦아내고 재빨리 그 위를 거즈로 덮은 가이우스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주춤하는 리온에게 그저 '가서 쉬라'는 한마디만을 했다. 그 후로도 얼마간 뒤에 남아있던 리온의 기척은 어느샌가 문소리와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달칵- 하는 소리에 가이우스는 퍼득 정신을 차렸다. 방문을 열고 내려오는 멀린은 여느때처럼 옷을 갖춰입은 채였다. 그것만 본다면 무엇하나 바뀌지 않은 아침이었다. 하지만 유난히 빈틈없이 두른 붉은 스카프는 멀린의 목을 단단히 가리고 있었고, 가이우스는 반사적으로 그 붉은 천 아래에 있을 그 상처자국을 떠올렸다.
"일어났구나. 몸은 좀 어떠니?"
"이제 괜찮아요. 걱정하셨죠?"
짐짓 쾌활하게 웃어보이는 멀린을 바라보던 가이우스는 잠자코 의자쪽을 손짓했고, 멀린은 성큼 다가와 앉는다. 그리고 한동안 둘은 말없이 아침식사에 집중했다. 친밀하고 익숙한 침묵 사이로 들려오는 아침의 소음과 이따금씩 들려오는 새소리, 식기와 부딪히는 스푼 소리만이 들리는 아침 시간. 하지만 가이우스는 그 익숙해야할 침묵 속에 가라앉아있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고, 그건 분명 자신만의 착각은 아니었다. 가이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씹던 빵을 삼키고는 지나가듯 말했다.
"이번엔 꽤나 벅찬 싸움이었던 것 같아 보이더구나. 부상자도 많았고."
기운없는 몸짓으로 스프를 입에 가져가던 멀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말 그랬어요. 늑대들은...듣던 것보다 더 무서운 동물이더라구요. 마치 잘 훈련된 병사들을 상대하는 것 처럼..."
잠시 손놀림을 멈춘 채, 그때를 돌이켜보듯 멍한 눈빛을 한 멀린의 표정은 조금 어두웠다. 어떤 상황과 마주쳤는지는 모르지만, 꽤나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듯 했다. 가이우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말했잖니. 그것들은 사냥에 관한 한 인간만큼 영악한 동물들이라고. 많이 걱정했단다."
"뭐, 그래도 이렇게 별탈없이 돌아왔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멀린은 씨익 웃어보였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걱정을 놓을 수 없는 그였기에, 일단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와준 것은 무엇보다 마음놓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니만큼 더더욱 확실히 해놓고 싶었다. 잠시 뜸을 들인 가이우스는 조심스레 물었다.
"목에 상처가 있던데... 어쩌다 그랬니"
".......아, 나뭇가지에 찔려서..."
그렇겠지-가이우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게만 말하고 멀린은 다시 잠자코 스프를 입에 가져가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이우스는, 적어도 가이우스만은 멀린이 조용해지는 순간에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멀린 자신은 노력한다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숨기는데 실패하곤 했다. 특히 그것이 걱정거리에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태연한 척 입을 다물고 있다가도, 금새 자신에게 고민을 털어놓곤 하던 그다. 가이우스는 잠시 멀린이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를 고민했지만, 그의 굳은 얼굴로 봐선 이번엔 꽤나 결심을 한 것 같았다. 결국 가이우스는 놀리던 스푼을 내려놓고 먼저 침묵을 깼다.
"멀린, 나 좀 보거라."
멀린은 그릇쪽으로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려 가이우스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의문과 함께, 무엇인지 모를 감정으로 조금 흔들리는 듯 보였다.
"나에게만은 얘기해주지 않겠니. 너 혼자 숨기고 있기에는 너무 힘들 게야"
목덜미를 흘깃 쳐다보자 멀린은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스카프를 더욱 끌어올렸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스카프를 지그시 누른 채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던 멀린은 결국 입을 열었다.
이어진 이야기는 이미 가이우스도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던 이야기였다. 늑대들의 습격과, 심한 부상을 입었던 리온. 그렇게 외따로 떨어진 상황에서 그 증상이 다시 나타났고, 어쩔수 없이 자신의 피를 줬다고. 멀린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던 걸로 보였다. 그런 아무 약도, 도움도 없는 상황에서, 동료로서도 의사로서도 할 일을 다 한 셈이다. 가이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멀린의 어깨를 도닥였지만, 멀린은 여전히 침울해보이는 채였다. 가이우스는 의아했지만, 뒤이어 멀린이 털어놓은 이야기에 그의 반응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드래곤이 그렇게 말했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온갖 감정이 섞여 흔들리던 멀린의 눈에서 결국 눈물 한방울이 떨어졌다. 가이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래곤이 어떤 의미로, 어떤 것을 경고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는지는 전혀 짐작할수가 없었기에 답답할 따름이었다. 아마 다시 불러내 묻는것도 무의미한 짓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정말 그가 아는게 거기까지인지는 의심스러웠지만, 이 일에서 어느정도 거리를 두려하는 그 태도를 봐선 분명 그 이상의 대답을 하려 하진 않을 터. 그에게 있어서는 이건 이를테면 관심 밖, 의무 밖의 일이기도 한 셈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런 면에서 그 지혜로운 생물은 가차없었다.
"후회는 하지 않지만-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멀린, 드래곤이 어떤 의미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는거잖니. 그리고 그의 말이라고 해도 결코 전능한 건 아니야."
멀린의 떨리는 목소리에, 가이우스는 오히려 힘을 주어 그렇게 대답했다.
"조언을 구하는 서신들 중에서 답이 돌아온건 아직 하나 뿐이다. 마법 사용이 허용되어있는 도시 중 어디 한군데 정도는 우리가 원하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겠니? 일단 그걸 기다려보자꾸나. 마음을 굳게 먹고, 지금 할 수 있는걸 하는거야."
여러군데에 전서구를 보내고, 그런 접근이 허용되지 않은 마법도시들에는 사람을 통해 부탁하여 연락을 취해보고 있었지만, 답이 돌아온 것은 극소수였다. 가이우스로서는 이미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점점 희망이 사라져가고 있다는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멀린을 위해서라도, 포기할수는 없었다. 아니, 자그마한 것이라도 붙들게 해야 했다. 그게 지금으로선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라는 걸 가이우스는 알고 있었다.
끝없는 숲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람한점 없는 어두운 숲 속에서, 누군가의 가쁜 숨소리만이 귓가를 스친다.
리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숨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끝없이, 어디로 달려가는지 알 수 없이 단지 급히 내달리고 있는 멀린의 모습. 그는 다급하게,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이 이따금씩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달려가고 있었다. 멀린? 리온은 소리내어 불렀지만 멀린은 다만 도망칠 뿐이다. 리온은 멀린을 부르며 필사적으로 그의 뒤를 쫓았지만, 나무에 돋아있는 잔가지들이 뺨이며 팔을 할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멀린은 계속 달려갔다. 그리고 어느덧 리온은 멀린이 무엇으로부터 쫓기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챘다.
리온을 앞질러 내달려 멀린의 근처까지 따라잡은 늑대 무리중 제일 선두에 있던 녀석이 훌쩍 도약해 멀린의 겉옷을 짓씹었다. 멀린은 그것을 떨쳐내려는 듯이 팔을 휘둘렀지만, 뒤이어 뛰어오른 늑대들이 이내 멀린에게 달라붙어, 곧 그는 땅으로 끌려 쓰러졌다. 마치 포식자에게 사로잡힌 초식동물의 최후처럼- 늑대들은 멀린의 팔을 물어뜯고, 다리의 살점을 게걸스럽게 탐식한다. 처절하게 울리던 비명소리도 결국은 잦아들어간다. 리온은 그것을 막으려 뛰어가지만, 이내 눈 앞에 번지는 선혈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는다.
멀린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마지막 숨을 받아내고는, 피에 젖은 채 고개를 든 늑대의 눈이 은빛으로 빛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헉...!"
리온은 낮익은 천장을 보고 나서도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한밤중의 조용히 가라앉은 공기가 그를 무겁게 짓누른다. 악몽 탓인지 어느새 스며나온 땀이 서늘하게 식어들고 있었다. 리온은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킨 뒤 옆에 있던 물잔에 손을 뻗어 간신히 목을 축였다. 그리고 확인하듯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피로 젖은 발톱 대신 매끈한 손이 그자리에 있는 걸 살피고 나서야, 모든 것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날 퀘스트에서 돌아온 이후로 그 꿈을 꾸기 시작했고 이따금씩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일종의 죄책감이 작용한 탓일 거라고 리온은 생각했다. 아무리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멀린에게 그런 짓을 해버린 것은 절대 그의 선택지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온전히 자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죄책감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멀린은 오히려 그 때 이후로 리온의 상태가 안좋아진다 싶은 낌새가 있으면 진통제 대신 자신의 피를 조금씩 주곤 했다. 손이나 팔 같은 곳에 상처를 내어서. 확실히 그게 훨씬 나은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었다. 심지어 낮에도 어느 정도 행동할 수 있게 되었을 정도니까. 하지만, 조금씩이라고는 하지만 생살을 베어내는 걸 보는 것이나, 그걸 받아마셔야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었기에...그래서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는 현실 대신 그런 꿈을 꾸는게 아닐까.
그리고 그 꿈을 꿀 때마다, 마치 그 장면들이 무언가를 암시하려는 것만 같아서 리온은 불쾌했지만 다시한번 되새겨보곤 하는 것이었다.
절대 그렇게 될 리가 없을 거라고, 그렇게 되진 않을거라고.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리온은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누였다. 아직 깨어날 시간까지는 한참 남아있었기에 다시 잠을 청해본다. 하지만 이런 밤엔 으레 그렇듯, 한번 흩어진 잠은 쉽사리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
"그럼 일정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리온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자, 가웨인도 살짝 고개를 끄덕해 보이고는 문쪽으로 등을 돌렸다. 멀린은 그 대조적이지만 정말 둘 다운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리온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격식을 차려도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고, 가웨인은 가끔 너무 가볍다 싶을 정도로 캐주얼한 태도를 해도 이상하게도 무례해 보이지 않는다. 만약 둘의 태도를 바꿔놨다면 얼마나 우스운 모습이 될지 상상해보던 멀린은 뭘 그리 혼자 키득거리고 있냐는 아서의 핀잔에 금새 근엄한 얼굴로 돌아가 주위를 정리했다.
지루하지만 중요한 일과중 하나인 정식보고 후, 잠깐 이어진 정찰회의도 이제 완전히 끝났다. 다음 외부정찰 편성은 가웨인과 리온이어서 둘만 남고 나머지 기사들은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던지라 안그래도 넓은 홀은 더 넓게만 느껴졌다. 그동안의 여러 불미스런 사건들 때문에 만일을 대비하는 의미로 조금 범위를 넓힌 구역을 순찰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적인 면에서는 그다지 변한 것은 없었기에 회의에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정대로, 내일 하루종일 성을 떠나있게 될 것이다.
아서가 바로 내성으로 통하는 뒤쪽 통로를 통해 나가는걸 확인하고, 급히 대강 서류들을 그러모아 정리한 멀린은, 조금 전 닫힌 홀의 정문으로 급히 뛰어갔다.
"리온!"
리온은 복도 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확인한 가웨인은 리온에게 가볍게 눈을 찡긋해보인 후에 그대로 먼저 걸어가버렸고, 리온은 혼자 잠시 서서 멀린이 달려오는 것을 기다렸다. 저렇게 서두를 필요 없는데- 리온이 그렇게 염려하는 사이, 멀린은 지나가던 시종 하나와 거의 부딪힐 뻔 하고도 당황한 기색 없이 바로 앞까지 와 걸음을 멈추고는 숨을 골랐다. 그렇게 복도를 뛰어다니는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달려와서는 상기된 파란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개구쟁이처럼 웃어보이는 것도 여전하다. 리온은 그런 면이 정말 멀린 답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온 세상 짐은 다 진것같이 시무룩해졌다가도, 금새 소년으로 돌아오곤 하는 그런 면이.
"무슨 일 있어? 그렇게 서둘러서는."
"가버리기 전에 따라잡으려고.....같이 가도 돼죠?"
리온은 별수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같이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이따금씩 아무렇지 않은 일상적인 잡담들이 오고가긴 했지만, 리온은 그다지 기분이 밝아지지 않았다. 멀린은 아마도 '약' 때문에 굳이 따라나선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정기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리온이 견디기 어려워질 때쯤 되면 멀린은 어떻게 눈치챘는지 조용히 방으로 찾아와선 '약'을 주곤 했다. 자기는 언급도 안하는데, 그 때를 어떻게 짐작하는지-리온은 때때로 의아해졌다. 내가 그렇게 겉으로 티가 나는건가...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았거든요."
무심결에 얼굴을 쓰다듬어보던 리온은, 마치 마음을 읽은 듯 때맞춰 들려온 멀린의 대답에 움찔했다. 멀린은 그런 모습을 보며 조금 미소짓더니, 방 문을 조심스레, 하지만 확실히 닫았다. 굳이 여기까지 찾아올 사람은 없을 테지만, 아무래도 누구에게 보여 좋을만한 일은 아니었으니 매번 조심스러웠다.
멀린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손놀림으로 재킷을 벗고 소매를 올려붙이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들었다. 그 칼은 원래 약초를 손질할때 쓰는 칼이었던 것 같지만, 그렇게 다른 용도로 쓰이기 시작한 후부터 리온은 그걸 볼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작은 칼집에서 빠져나온 나이프는 곧 멀린의 팔 안쪽에 가 자리잡았고, 몇번 주먹을 꼼지락거리던 멀린은 망설임 없이 그 위를 그었다. 새하얀 피부 위로 거슬릴정도로 선명한 붉은 액체가 스며올라오기 시작했다.
리온은 내밀어진 팔을 조심스레 받쳐들고는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그건 으레 쓸모없는 갈등이 되곤 했고 이번에도 그랬다. 이미 어느정도 한계점에 가까워 있었기에, 리온은 급히 고개를 숙여 입을 갖다대었다.
따스한 감촉이 혀를 감싸들자 리온은 더이상 어떤 고민도 할 수 없었다. 비릿한 향기를 넘어 밀려오는 것은 그 어느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신선하고 달콤한 생명력. 이제 그것은 리온에게 있어 그 어떤 기름진 음식, 어떤 최상급의 와인 보다도 달콤하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저주스럽게도, 리온은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방울 한방울이 자신의 몸으로 스며드는 것을 확실히 느끼며 전율했다. 그는 다시 '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지극히 순수한 쾌락이었다.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이제 스스로 혀를 놀려 상처를 핥아올렸지만 피는 서서히 멎으려는 것인지 잦아들었다. 하지만 한번 진미를 맛본 그의 몸은 더욱 강한 갈망으로 그를 몰아세웠다. 아찔한 감각과 함께 머릿속이 타들어간다. 아직 안돼- 아직 모자라. 리온은 오직 한가지 목적에만 집중한 채 필사적으로 샘의 근원을 찾아 더듬었다. 보드라운 표면 너머 어딘가에는 그를 만족시킬만한 곳이 있을 터였다. 입술로 더듬어 탐색해 올라가던 중, 향기가 강해지는 곳에 다다르자 시험삼아 혀로 핥아보지만 그곳도 그저 흘러내리는 한 줄기일 뿐. 리온은 찬찬히 되짚어 올라갔다. 점점 진해지는 그 향기가 리온을 고양시키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래, 여기로구나. 리온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 무언가가 자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멀린의 손-리온은 주춤했다. 그제서야 리온은 자신이 멀린의 목덜미에 얼굴을 뭍고 있었다는걸 깨닫고 황급히 얼굴을 들었다. 멀린은 조금 놀란 듯 떨리는 눈으로 리온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그 눈꼬리는 살짝 휘어졌다.
"괜찮아요, 리온."
멀린은 그렇게 말하며, 리온을 다시 끌어당겼다. 괜찮다고? 여전히 갈증과 작은 만족감의 여운에 사로잡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도 리온은 멀린의 목덜미를 내려다보았다. 이전의 그 자국-꽤 지난 상처인데도 아직도 조금 멍이 들어있는 그 부분은 선득한 푸른빛으로 얼룩져있다. 안 아플리가 없을 터였다. 리온이 손을 들어 그 멍든, 연약한 피부를 조심스레 쓰다듬자, 멀린은 저릿한 아픔에 반사적으로 몸을 떨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건... 아니야..."
리온은 필사적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멀린은 오히려 그런 그를 감싸안았다. 그날 밤 이후로 암묵적 동의 아래 '새로운 처방'을 하기 시작했지만 그건 그저 베인 상처에서 나온 소량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도 리온은 어느정도 잘 버티는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흐를수록,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행동만 봐도 그건 명백했다. 멀린은 계속 그가 힘겨워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그대로 걱정을 내려놓고 싶었다.
"정찰 나가기 전에 기력을 회복해야죠..."
가까이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심장박동 소리가 더없이 리온을 안심시키고, 또 안심시켰다. 리온은 그 묘하게 날선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멀린의 목덜미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뒤는 어이없이 간단했다.
근육을 뚫는 소리조차 들리는 것만 같았다. 지독히도 크게 들려온, 숨을 몰아쉬는 소리는 어느새 안개처럼 잦아들어갔다. 다급하고 혼란스러웠던 처음 상황과는 반대의 상황. 주위는 조용했고, 그 조용함은 조금의 긴장감과 함께 둘의 정신을 날카롭게 했다. 리온은 그제야 만족감을 느끼면서도, 반쯤 깨어있는 이성으로도 멈춰지지 않는 행동에 좌절했다. 그는 파고드는 힘에 비틀거리며 몇발자국 뒤로 밀려나던 멀린을 다시 끌어당겨 단단히 끌어안았다. 맞닿은 몸으로 전해지는 둘의 맥박이 뒤엉켜 마치 하나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눈을 감은 채, 허기진 아이처럼 정신없이 피를 받아마시던 리온은 이윽고 여유를 되찾고는 다시 눈을 떴다. 그 앞에 펼쳐진 너무나도 익숙한 방의 전경은, 오히려 그 비일상적인 상황 때문인지 더욱 낮설어 보였다. 그렇지만 이 이상한 위화감은 무엇일까?
리온은 오래지나지 않아 그 위화감의 이유를 찾아내고 그곳을 응시했다. 창문의 유리 너머로 멀린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리고 '그것' 역시 리온을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사냥을 마치고 고개를 든, 늑대의 은빛 눈동자가-
"리온?"
멀린은 고개를 든 채 유령이라도 본 듯 굳어진 리온을 몇 번 흔들었지만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한 예감에 그의 시선을 따라가본 멀린은 그저 창에 비친 둘의 모습을 발견했을 뿐. 다급한 부름이 몇번이나 반복되고 나서야 리온의 눈은 이쪽을 응시했다. 멀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여전히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를 살폈다. 리온의 입술과 입가에는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대로 묻어있어 보기에 섬득할 지경이었지만 그것보다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안좋았다. 몸도 분명 이전보다 나아졌을 터였지만, 어쩔줄 모르고 그대로 서있는 그는 너무나도 피곤하고, 지쳐보인다.
멀린은 허둥대다가, 홧김에 자신의 소매를 끌어잡고 리온의 입가에 묻은 피를 훔쳐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갑자기 제법 피를 잃은 탓인지 몸은 점점 무겁고 힘들었지만, 창문에 비친 모습을 보고 나자 왠지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에 멀린은 황망히 손놀림을 계속했다.
얼마 후, 리온은 멀린의 손을 잡아 멈추고는, 이번에는 온통 떨리고 있었던 멀린의 몸을 진정시키려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느정도 떨림이 잦아들자, 곧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창백한 얼굴을 한 멀린을 안아들어 자신의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그제서야 완전히 긴장이 풀린 멀린의 몸은 곧장 그동안 잊고 있었던 피로감에 짓눌렸다. 시야가 빙글 돌았지만, 완전히 힘을 빼고 침대에 몸을 맡기자 조금씩 여유가 돌아오는 것 같았다.
리온은 옆에 선 채, 주전자에 있던 물로 입가를 닦아냈다. 그 모습은 조금 신경질적일 정도로 거칠었지만 멀린은 그걸 말릴 도리도 없이 그저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었다. 몇번이고 입가며, 얼굴을 적셔 닦아낸 리온은 입안까지 헹궈 뱉어낸 뒤에야 침대 근처의 의자로 다가와 앉았다.
그는 물을 적셔 가져온 천으로 조심스레 멀린의 상처를 닦아내고 다른 천으로 그곳을 꾹 눌렀다. 상처가 시리듯이 저릿했지만 멀린은 내색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리온은 좀 여유를 찾은 듯한 표정이 되었고,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멀린은 이제 고비는 지나갔다는 생각에 안도하며 리온을 바라보았다. 이제 또 한동안은, 여느때처럼 생기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멀린...차라리..."
얼마간의 침묵 후 열린 리온의 입술은 미약한 몇 마디를 내뱉고는 다시 잦아들었다. 멀린은 재촉하는 기색 없이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조금 뒤, 고민하듯 달싹거리던 그 입술은 이번엔 좀 더 또렷한 문장을 만들어내었다.
"차라리...싫다고 해줘."
멀린은 갑자기 나온 그 의외의 말에 놀라 한동안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멀린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리온의 깊게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는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그래서 오히려 힘주어 대답했다.
"싫지 않아요."
하지만 리온의 눈동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럴리가 없어. 아프고, 두렵고, 기분나쁠게 당연하잖아?"
멀린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흐려졌다. 멀린은 그제서야 리온이 어떤 생각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는, 부정의 의미로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그런게 아닌데-
"그렇게 참지 말고... 차라리 싫다고, 무섭다고 소리를 지르고 거부해. 거부하고... 어서..."
리온은 마지막 한마디를 채 잇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 멀린의 눈에서 어느샌가 스며나온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지만, 리온은 그대로 몸을 돌려서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그 뒤로 묵직한 발자국 소리만이 남아있다 점점 사라져갔다. 그리고 제법 시간이 지난 뒤, 멀린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평화롭구만~"
가웨인은 말에서 내려서자마자 찢어지는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켰다. 이미 정찰 루트의 반정도를 왔지만 수상한 낌새는 커녕, 이따금씩 번지수를 잘못 짚은 산적들의 난입 같은 즐거운(?) 만남도 없었다. 그런 녀석들 두들겨주는것도 나름 재미인데-가웨인의 그 말에 리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분히 어이없다는 의미를 내포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기사 한둘이라면 또 몰라도, 이정도 수의 무리에 감히 덤벼들만한 이상한 배짱을 가진 녀석들은 이미 멸종해버리고 없겠지- 맞장구쳐 주는 이가 없어도 하릴없이 투덜거리며 흘끔 주변을 둘러본 가웨인은, 한동안 걸어와 지친듯한 병사들 몇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말에게 물을 먹이고 있던 리온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도 별거 없을 것 같은데. 아서도 괜한 걱정 하는 거라니까..."
보고된 습격 이후로 범위를 넓혀 실시하고 있던 정찰이었지만, 역시 그 이후로 아무런 수확은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수상한 무리들이나 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서의, 왕의 입장으로서는 작은 경계하나 늦출 수 없는 시기라는 건 분명했다. 그래도 확실히 이렇게나 몇번이고 살펴도 별다른 이상상황이 없다는 건 '다행히도' 그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생각을 더 굳히게 하고 있었다.
"그건 다 마치고 나서 해야할 얘기 아닌가? 아직 반이나 남았다구."
리온의 그 담담한 대꾸에 가웨인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어어-까칠하기는... 왜이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까부터 쭈욱 흥이라곤 쪽 빠진 얼굴 해서는..."
"네가 하도 수다스러우니, 다 들어주기 힘들어서 그런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나? 가웨인 경."
그러자 가웨인은 기분상한 기색도 없이, 여느때와 같이 헤죽 웃어보인다. 그 뻔뻔하고 그다운 대응에 리온도 피식 웃어버리고는, 얌전히 그의 손에 몸을 맡기고 있는 말의 갈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쉬는시간과 주인의 손길이 마음에 들었는지, 말은 커다란 눈을 내리깔고는 이따금씩 푸르릉거리는 만족스런 소리를 냈다.
"그래서, 몸은 좀 어때?"
조금 뒤 갑작스레 날아든 질문에 리온은 문득 가웨인을 돌아보았다. 멀쩡히 같이 정찰까지 나온 마당에 조금 이상한 질문이었다. 분명 여러 핑계로 훈련을 쉬던 때도 있었지만, 요즈음엔 주요한 일에는 어떻게든 다 참가하고 있었던 만큼, 그런 질문을 받을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었기에 더 그랬다. 조금 의외였지만 리온은 그저 넓은 의미의 질문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언제나처럼 멀쩡한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난 보통때는 둔할지 몰라도, 살을 맞대거나 검을 맞대본 상대의 몸상태에 대해서는 기막히게 잘 아는 재주가 있거든."
좀 점잖지 않은 뉘앙스를 풍기는 그 비유에 리온은 눈썹을 찌푸렸지만 그런 모습이 가웨인을 더 즐겁게 한 듯하다.
"그리고 알다시피, 우리는 검을 맞대는 상대잖아?"
가웨인이 천연덕스럽게 이은 말에, 리온은 이제 어느정도 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확실히, 훈련때 컨디션 탓에 평소에는 안 할 실수를 하거나 하면, 그게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가웨인만은 눈치를 채는 것 같았었다. 아니... 그만은 굳이 참견해주고 싶었던 것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태까지 몇번이고 의문을 담은 그의 시선과 마주치면서도 리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가웨인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서로를 배려한 암묵적인 무시랄까. 하지만 여러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에, 가웨인도 그 침묵을 깨야할 필요성을 느낀 것 같았다.
"가웨인."
리온은 말을 잘라내듯 그의 이름을 힘주어 불렀다. 하지만 그 다음으로 무언가 꺼낼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대체 뭘 설명해줄 수 있을까. 너무 복잡하고, 엉켜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더욱이 그에게 진실을 알린다 해도 그 누구에게도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었고. 그저 입을 다물고 있는 리온을 잠시 지켜보던 가웨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보아하니 쉽게 말해줄 수 있는 내용은 아닌가보군. 그런가?"
리온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가웨인, 널 믿을 수 없다거나 해서가 아니야. 그저..."
"아니, 당연히 그건 알지. 말 하기 뭣하면 안 해도 돼. 나도 괜히 독촉해서까지 듣고 싶은건 아니니까."
가웨인은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를 돌려보기라도 하려는 듯 헛기침을 몇번 하고는 주변에 흩어져 각자 휴식을 취하고 있는 병사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 중 무언가 활발한 토론, 즉, 잡담이 이루어지고 있는 무리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가볍게 말했다.
"다만, 뭐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고맙다"
리온은 진심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
그들은 더 전진해 왕들의 계곡 근처에 도달했다. 여러모로 험악한 평판이 있는 그 지역 안쪽까지 들어가볼 필요는 없었기에 주변을 빙 도는 루트였지만, 그 근처는 아무래도 경사지고 굽이진 능선들이 모이는 곳이라 지형적으로 답답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새파란 이끼며, 습한 흙 속에서 마음껏 뻗어나와 제멋대로 솟아오른 나무들의 경관은 꽤나 유려하다. 하지만 주변을 경계해야하는 입장으로서는 역시, 무엇이 숨어있어도 이상하지 않을-그리고 더욱이 그걸 이쪽에서는 발견하기 힘들-그런 좁은 골짜기의 길들은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말에서 내린 채 천천히 걸어가던 리온은 조용한 풍경 사이에서 문득 멀린을 떠올렸다. 이 근처는 먼데다 위험한 지역이었지만, 여러 특이한 지형 덕에 특수한 약초도 제법 발견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가이우스의 요청이 있을 때 이따금씩 멀린의 동행으로 온 기억이 있었기에 리온은 몇몇 꽃들을 알아볼 수 있었고, 그건 그를 기쁘게 했지만 동시에 우울하게도 했다. 어제의 기억 때문이었다.
견딜수 없이 화가 났기에 멀린을 두고 그렇게 돌아나오긴 했지만, 그건 스스로를 향한 노여움이었고 스스로 감내했어야 할 감정-절대 그를 그렇게 상처주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래선 안 될 일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껏 자신의 고통을 함께 감내해주고 도와주려 애쓰고 있는 그인데, 심지어 자신도 흔들릴 때 옆에서 격려해주는건 언제나 멀린이었는데. 어제 그렇게 제 감정만 내세운 후, 이어진 정찰 일정으로 그에게 사과의 말은 커녕 얼굴조차 보지 못 했다. 마지막으로 본 멀린의 눈을 떠올릴때마다 후회는 짙어지고 있었다. 왜 또 그렇게 어린애같이 굴었을까.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그런 감정을 왜 굳이 입밖에 내었을까. 그도 나도 힘들어질 뿐인데. 리온은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 멀린을 만나 모든걸 조금이라도 고쳐보고 싶었지만, 동시에 겁도 났다. 이제 멀린이 자신에게 완전히 지쳐버렸으면, 질려버렸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그때, 때마침 눈에 들어온 광경에 리온은 잠시 모든 것을 잊고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래된 나무 그늘 아래, 새파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짙은 녹색 잎과 덩굴 사이로 제각각 고개를 내민 탐스러운 꽃들이 한데 모여, 그곳은 마치 작은 호수처럼 보였다. 저 꽃...본 기억이 있는데...
'저건 새벽맞이 꽃이에요.'
리온은 기억을 더듬다 예전 멀린이 설명해 줬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꽃들은 보통 해가 비치고 나서야 꽃을 피우곤 하잖아요. 근데 저건 동이 트기 전, 어두운 새벽부터 꽃을 피워요. 빛도 없고 추운 새벽에 어떻게 알고 그러는지는 몰라도, 저 봉우리가 열린 걸 보면 해가 떠오를 때가 가까워졌다는걸 알 수 있대요. 이름도 그렇고, 색도 참 잘 어울리지 않아요?'
'그러네- 그리고 설명을 듣고 나니 더 멋져 보이는데? 맘에 들어.'
'그렇죠? 저도 좋아하는 꽃이에요.'
리온은 꽃 무리로 다가가 몇 송이인가를 조심스레 꺾었다. 투명한 푸른색으로 활짝 열린 꽃잎은 그늘에서도 생기가 넘쳐보였다. 어두운 새벽에 피어 해뜨기를 기다린다니- 다른 건 몰라도 의지 하나는 있는 녀석이다. 아니면, 희망이려나? 리온은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망토 아래 벨트 뒤쪽에 그걸 갈무리해 꽂아넣었다. 멀린이 오랜만에 이 꽃을 보면 조금은 마음이 나아질지도, 기뻐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간 더 진행했을까. 앞장서 걸어가던 가웨인은 손을 들어 대열을 멈추게 했다. 앞으로 펼쳐진, 그들을 감싸고 있던 능선은 한층 더 좁아지며 지대를 높이해 이젠 꽤나 깊이까지 들어온 느낌을 주고 있었다. 짧은 길이니 이쪽을 통과해도 될 테지만, 괜히 느낌이 좋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걸릴 테지만 능선을 돌아가는 것을 고려해보던 그는, 자신이 논리적이지 않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여태까지 사람은 커녕 사슴 한마리도 보지 못했는데, 갑자기 '예감'따위에 쫄아서 빠른 길을 돌아간다니- 자신답지 않았다. 가웨인은 다시한번 주의깊게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시 출발 신호를 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웨인은 자신의 '예감'이 얼마나 정확한지에 놀라야만 했다.
능선 위쪽에서 낮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반쯤 포위하다시피 둘러싸고는 그들을 내려다보던 병사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자, 가웨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칼을 뽑아들었다.
"정말이지, 난 매번 운도 억세게 좋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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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걸친 방어구며 복장은 다들 제각각에 엉성했지만, 온통 새카만 것이라는 데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그 기습자들의 겉모습은 그들이 모르가나의 부하들이라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복장 구색만큼 온갖 잡다한 녀석들을 긁어모아 만들어진 군대지만, 거친 밑바닥 생활을 견뎌냈다는 배경은 그들을 무자비한 전사로 바꾸는데 충분한 것이었다. 일단 목적이 정찰에 있었던 만큼, 그들과 직접 마주치지 않고 발견만 했다면 제일 이상적이었겠지만 이렇게 된 경우 그 자리에서 전면전을 펼치는건 아무래도 무모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싸움이 시작되고 난 이상, 최대한 맞대응하며 도망갈 시기를 노리는게 최선이었다.
일단 좁은 구역에서는 어느정도 뒤로 빠져나오는데 성공했지만, 이미 높은 지대에서 갑자기 쏟아진 화살로 몇몇 병사들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리고 적들은 그들은 쉽사리 보내주지는 않겠다는 듯,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가웨인이 퇴각로를 확보하는 동안, 리온은 최대한 밀려오는 녀석들을 방어하려 애썼다. 베어내고, 또 베어낸다. 정신없는 혼전 속에서 몇번이고 누구의 것인지 알수 없는 칼들이 사슬갑옷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걸 신경쓸 여유도 없었다. 몸으로 막아낸다 해도 쓰러지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 아수라장 저 너머로, 말에 탄 인영 하나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는걸 발견한 리온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곤 신음을 흘렸다. 모르가나였다. 예전 리온이 알던 그녀와는 이미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야할 만큼 달라진 초췌하고 음산한 모습. 그 눈빛은 이미 다지고 다져진 증오때문인지 깊숙히 살기를 머금고 있었기에, 리온은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을 꿰뚫을듯이 쏘아보고 있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모르가나까지 나타나다니, 정말 최악의 장소에 최악의 타이밍에 있었던 셈이다.
리온은 급히 뒤를 확인했다. 어느정도 다시 대열을 가다듬어 혼란을 빠져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앞으로 조금-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뒤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목에서는 어느정도 그들을 끊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 바로 머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도끼를 눈치채고 간신히 그걸 빗겨낸 리온은 그가 도끼를 수습하기 전에 옆구리를 깊숙이 찔러 옆으로 밀쳐냈다. 뒤에서 후퇴 명령을 내리는 가웨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다시 확인하듯 뒤를 돌아본 리온은 곧이어 찾아든 가슴의 통증에 휘청하고는, 자신을 찌른 녀석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과연, 사슬갑옷을 찢을 만큼 큰 덩치의 그 남자는 이제 곧 쓰러질 먹이감을 앞에 둔 하이에나처럼 씨익 웃었지만, 리온은 다친 사람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힘으로 그의 얼굴을 찍어눌렀다.
그리고 그건 뭔가 이상했다.
리온은 갑자기 찾아드는 위화감을 느끼고는 몇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적들을 막아 싸우는 병사들 뒤에서, 잠시 아래를 확인한 리온은 자신이 주춤한 이유를 찾아내고 이를 악물었다.
가슴의 상처가 자신의 의지를 가진 듯이 아물어들고 있었다. 고통은 어느정도 남아있었지만, 뚫려진 살은 메꿔지며 피가 멎었다. 심장박동이 점차 빨라진다.
리온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반신반의하는 기분으로 손가락을 올려 검날을 한번 훑었고, 그러자 피부 위로 조금 피가 맺혔다 싶더니 금새 원래대로 돌아갔다. 분명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처음 멀린의 피를 마셨을 때에도 이미 치명적일 정도의 상처를 입었었던 때였다. 하지만 그 후엔 어땠는가? 멀린의 상태를 신경쓰느라 당연한 걸 못 느끼고 있었지만 어느순간 상처는 다 아물어 있었다. 마치 약을 처음 마셨을 때처럼. 피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일까. 이미 리온은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잠시 이어진 평화로운 나날은 그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리온은 또다시 낮설게만 느껴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 위화감에 리온은 멀린의 고통스러워하던 얼굴과, 자신을 바라보던 두려운 눈빛을 떠올릴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떤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진정한 죽음이 찾아들 때까지, 언제까지고 그런 일을 반복해야만 하는 것이구나. 그런 표정을 계속 봐야만 하는 것이구나. 시야가 천천히 침잠하며 요동쳤다.
무방비한 모습으로 서있는 리온에게 누덕해진 검은 망토를 두른 병사 하나가 달려들었지만 그는 곧 리온의 칼 아래 쓰러졌다. 칼에 잔뜩 묻어나온 피는 그 비릿하고 진한 향기를 사방에 흩뿌렸다. 리온은 충동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거의 자각하지 못한 채, 칼을 들어올려 거기에 묻은 피를 슬쩍 핥았다. 갓 몸을 벗어난 그 피는 아직 따듯했다. 하지만 불쾌한 쇠맛을 품고 리온을 몰아붙였다.
"후퇴! 후퇴하라!"
멀찌기에서 외침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신중하게, 하지만 최대한 신속한 움직임으로 기사들은 대열을 물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퇴각명령의 소리에 섞여 들려온 가웨인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리온은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리온!!"
리온은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파란색 꽃이 피로 물든 땅 위로 떨어졌지만, 그것을 알아챌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온은 지독한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바닥에 닿아 있는 뺨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시작으로 점점 몸의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어둑한 공간 사이로 지펴진 화롯불의 어스름한 불꽃에, 높은 천장까지 뻗어있는 열주의 그림자가 춤을 추듯 흔들린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버려진 성들 중 하나인 듯 했다. 리온은 고개를 조금 들어보려다, 그때 뺨에 느껴진 질척하고 기분나쁜 질감에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쓰러져있는 오래된 돌바닥은 검붉은 액체로 젖어 있었다. 피? 누구의 피일까...?
리온은 몸을 움직여보려다 곧장 느껴지는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그제서야 리온은 그 피가 자신의 몸에 벌어진 상처들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어떻게 몸을 추스려볼 여유도 없이 우악스럽게 몸을 끌어올리는 손에 의해 일으켜 세워졌다. 리온을 꿇어앉힌 장정 둘은 그 뒤로도 몇번인가 그를 걷어찬 후, 명령을 받고서야 간신히 뒤로 물러났다.
"이제 피의 효과는 다 떨어진 모양이군"
어느새 리온의 바로 앞으로 다가온 모르가나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온은 그 어느때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모르가나를 바라보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생각을 되짚었다. 후퇴하던 중 혼자 대열을 빠져나온 후의 기억은 극히 희미했지만, 결국 포로로 사로잡혀 끌려온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리온의 상태를 살피려는 듯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며 훑어보고는, 허리에 매어져 있던 단검을 꺼냈다.
"제대로 묶여있는지 확인해라."
아까의 병사 둘이 다시 다가와 리온의 손과 발을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을 재차 확인하고, 제대로 벽에 고정되어 있는지를 살피고는 물러났다. 그걸 다 지켜보고 난 모르가나는 단검을 들어올려 자신의 왼쪽 손바닥을 그었다. 그리고 피가 흘러내리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리온에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파악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피곤하고 머릿속은 무거울 뿐. 그렇게 리온이 힘없는 눈으로 올려다보고만 있자, 그녀는 거칠게 그의 머리카락을 그러쥐어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그 사이 벌려진 입으로 피를 흘려보냈다. 입술과 턱 위로 떨어지는 피는 놀랍게 뜨거웠다.
"그 말이 사실이었을 줄이야."
피가 흘러들어가자 은빛으로 빛나는 눈과, 서서히 사라져가는 상처들을 바라보며 모르가나는 감탄마저 섞인 음색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조금 기운을 차린 리온은 힘없이 입을 열었다.
"모르가나..."
"당신이 그렇게 부르니 마치 우리 어렸을때로 돌아간 것 같은데, 리온 경"
그렇게 말하며 마치 그리운 연인을 만났을때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리온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린 모르가나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떼더니 등을 돌려 그녀의 자리로 돌아갔다.
지친듯이 의자에 걸터앉은 모르가나는 서두를 필요 없다는 것을 자신에게 상기시키려는 것 처럼, 자못 느긋한 동작으로 팔걸이에 얹은 손으로 턱을 괴이고는 리온을 내려다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밤중의 호수같이 검푸른 두 눈동자는 그 묵직한 무게감에도 이상하리만치 텅 비어있어,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내 아이들이 봤다는 걸 전해들었을 때도 설마 했지만... 진짜였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 수호자들도 꽤나 괜찮은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구나. 리온 경에게 나이트워커라니."
잠시간의 침묵 뒤 모르가나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자, 리온은 거기에 담긴 낮설지만 그의 주의를 끄는 단어를 찾아내고는 몸을 움찔했다. 수호자? 그건 처음 듣는 명칭이었지만, 앞뒤 상황을 미루어볼때 어느정도 의미는 명확했다. 리온은 이전, 자신에게 약을 건네준 노파를 떠올리고는 다급하게 물었다.
"수호자들? 그들이 어디있는지 알고 있는건가?"
앞으로 몸을 내밀며 묻는 리온의 모습에, 모르가나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오, 저런. 그런 말 한적은 없는데. 확실히 다급한 상황이긴 한 모양이군, 리온. 아쉽지만 그것들은 나도 찾기 힘들만큼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자들이라 말이야. 알 수만 있었다면야 진작에......"
거기까지 말한 모르가나는 말을 흐렸다. 그 뒤에 생략된 말은 리온을 거슬리게 했지만, 그의 추측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기에 리온은 다만 주어진 정보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고위 여사제조차 찾아내기 힘든 자들. 처음 그 노파를 만났을 때를 생각해보면, 전혀 그런 힘을 가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었기에 리온은 혼란스러웠지만, 그의 고민을 끊으며 모르가나의 목소리가 다시 날아들었다.
"네 실력은 훌륭했어. 그대가 그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인건 처음 알았지... 하긴, 기껏해야 장식된 토너먼트 경기나 마창시합만 보고 자란 내가 진짜 당신에 대해 뭘 알았겠냐마는. 어쨌든 대단한 쇼였던건 사실이니 칭찬을 해야겠지."
모르가나는 마치 토너먼트에서 잘 싸운 전사에게 포상을 내리는 여왕같이 짐짓 즐거운 투로 그렇게 말했지만, 이내 희미하지만 확실히 잔인한 빛을 띄고 리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내 병사 수가 제법 줄어들었다는 거에 대해선 어떻게 보상을 받아야 할까...?"
오히려 그 말을 듣자 이상하게도, 리온은 안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더이상 고민할 것은 없다. 그는 이제 흔들림없는 자세로 고쳐앉아 모르가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모든 것이 정지한 것만 같은 그 정적인 공간 안에서 리온은 그녀가 자신에게 내릴 '운명'이 어떤 것일지에 대해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다만 어떤 형식이든 간에 운명이 결정지어질것이라는 것에 조금 안도했을 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람 한점 없는 호수같이 정지되어있던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 한순간 알수없는 미소가 어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잠깐의 인상은 그녀가 뒤이어 몸을 일으키는 동작과 함께 사라졌고, 리온은 그녀가 다시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그저 무감동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이미 죽은 사람같은 얼굴을 하고 있잖아, 리온. 그래서는 재미가 없는데."
그렇게 말하며 짖궂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서 의외로 리온은 옛날, 그녀가 아직 카멜롯의 왕녀였던 시절의 모습을 어느정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름답지만, 여느 공주들 답지 않게 무예와 승마를 좋아했던 그녀. 어렸을 적, 날랜 몸놀림으로 자신을 기어이 쓰러트리고 짓던 자신만만하고 장난기 어린 표정이다. 리온은 그때를 떠올리고는 싱긋 웃었다. 그러자 오히려 모르가나의 얼굴에서 낮익은 그 표정은 사라지고 당황한 빛이 잠시 어렸지만, 다시 그녀는 얼굴을 굳혔다.
"우리들의 옛 정을 생각해서, 살려보내주도록 하지."
뭐라고? 이어진 그 말은 너무나도 예상 밖의 것이었기에, 리온의 반응은 조금 더뎠다. 리온은 자신이 잘못 들은건지 의심하며 그녀를 살폈지만 어떤 설명이 따라붙지도, 변화가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뒤에 서있던 병사중 하나가 성급하게 내뱉은 낮은 욕설이 들려와, 리온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해할수가 없군. 이대로 날 살려보내겠다고?"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까지 들릴 정도로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리온의 의문에 대답했다.
"어짜피 곧 죽을 목숨이니까. 아마 얼마 남지 않았을걸."
리온은 그제서야 오싹하게 찾아드는 현실감을 느꼈다. 뒤에 서서, 자기 동료들을 죽인 리온을 곧장 찢어죽이고 싶어 안달난 녀석들에게는 말도 안되는 처리방식이겠지만, 어찌보면 리온 자신에게 있어서는 지금 모르가나가 내린 선고가 더 확실하고 불유쾌한 것이었다. 리온은 잠시 그대로 앉아, 이대로 전사들이 주인의 명령을 무시하고서라도 자신을 죽여놓고 싶을 정도로 행패를 부려보는 선택지를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뒤에 이어진 모르가나의 말은 묘한 제지력을 갖고 리온의 사고를 멈추어 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대라도, 죽음은 피하고 싶을터-"
노래하듯 읊은 그 나직하지만 분명한 말. 모르가나는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했다. 천천히 다가온 그녀의 얼굴이 뺨에 닿자, 리온은 부드럽지만 싸늘하게 식은 피부를 느끼고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맞닿은 뺨 너머로, 그녀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모르가나는 리온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방법을 알려주지"
생각보다 상당히 늦어졌습니다! 게다가 또 두서없이 길어졌어요; 쓰는놈도 읽는분도 지치는 스압 OTL
너무 두루뭉실하게만 생각하고 저지른게 문제였습니다 ㅋㅋ 써나가다가도 뭔가 끼어들고, 딴데로 새고, 새로운게 생기고 하니 스스로도 영문을 모르게되는 총체적 난국! 거기에 급 현자타임이 찾아오는 바람에 -_-;;; 역시 망상은 현자타임 오기 전에 후다닥 달려버리는게 제일인거 같아요. 쓰면서 여러모로 민망해져서 흐엉
그래도 애정갖고 지켜봐주신 분들의 알흠다운 재촉과 응원으로 힘을 얻어 일단 올려봅니다 ㅠㅠㅠㅠ 격하게 쓰릉...<3
그나저나... 손발은 안녕하십니까? 쓰면서도 '어허...이거슨...'(왠지 팔을 긁적거리게 됨), '킁... 이건 좀...'(오그라든 손을 애써 펴고), '아으아아악;;'(몸이 베베 꼬인다!) 같은 행동을 반복했기 때문에, 참..... 혹시라도 읽어주실 분들에게 죄송스럽습니다.
후후, 여기까지, 제 징징거림까지 읽어주신 용자분들께ㅋ 이번에도 감사를 전합니다. 복받으세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