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lin-리온/멀린] 밤의 주민 (3/?)
우와... 왠지 오랜만의 글 카테고리 업데
그리고 이어지는 분량조절 실패의 스멜-두서없이 뭐가 이리 길어졌지;
이번에도 피가 쪼금 나왔습니다. 왜 나는 자꾸만 아가들을 다치게 하고 싶어지는가? -_-;;;? 자기반성중
3.
...그러나 그아무리 고귀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 해도, 나이트워커가 된 이상 흡혈의 유혹을 참을 수는 없다. 단지 그것은 그 때를 얼마나 늦출 수 있느냐의 차이일 뿐. 그렇게 고결한 인간의 정신은 굴복당할 것이고, 그는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시험받게 되리라.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
헬바 공립도서관 소장, [고대의 저주들] 中
"포르......뭐?"
"포르피리...에휴, 됐어. 그냥 햇빛 알러지같은거야."
멀린은 솜씨좋게 마지막 갑옷 조임새를 풀어내어 조심스레 갑옷을 벗겨내고는, 다 됐다는 표시로 그의 등을 한번 툭 쳤다. 아서는 온몸이 뻐근하다는 듯 끙 소리를 내며 몇번 몸을 움직이고는 멀린에게 돌아섰다.
"그런... 병명은 어찌되든 상관없어. 다만, 그거 심각한 건가?"
"음...아직 그리 심각한 건 아냐. 한동안 잘 치료하면...나을거야."
멀린은 아서의 질문에, 갑자기 잠겨드는 목을 애써 누르고는 그렇게 단언했다. 꼭 낫게 할 거니까-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지.
멀린은 아서의 방에서 그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방금 전 훈련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아서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돕는 것이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리온이 낮시간에 두통이 점점 잦아지는 것 때문에 아서에게 대충 둘러대 그의 스케쥴을 저녁 이후로 조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햇빛에 민감해진 것 같다-정도면 되겠지 하며. 그렇게 부탁하자 아서는 자기 기사의 일이라면 우선순위로 삼는 그 답게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남는 여유시간에는 리온의 상태를 보고싶다고, 어느정도 양해해달라는 부탁에도 그는 더이상 묻지 않고 허락했다. 아서도 최근들어 리온이 그동안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더 필요한게 있는지 점검한 후, 허락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갑옷을 챙겨들고 방을 나가려 했을 때, 아서는 다시 그를 불렀다. 그리고 그렇게 멀린을 불러세운 아서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멀린, 리온은 어렸을때부터 내 곁에 있었던 특별한 기사야... 철없을 무렵부터 친형 같이 나를 지켜봐주곤 했지."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멀린을 응시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잘 돌봐줘. 부탁한다."
그 눈은 보기드문 진지한 빛을 띄고 있다. 멀린이 카멜롯에 오기 전부터 이어졌을 그들의 인연이 어떤 것일지는, 여전히 서로에 대해 더할나위 없는 신뢰를 보이는 둘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 리온은 자신에게 뿐 아니라 모두에게 소중한 존재인 거다. 멀린은 아서에게 걱정말라는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보인 뒤, 방을 나섰다.
곧장 무기고로 간 멀린은 갑옷을 대강 닦아낸 뒤 정리해 넣고, 칼을 갈무리해 넣었다. 그 모든 동작들은 이제 완전히 몸에 배어 있어,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도 기계적으로 해낼 수 있는 일들이다.
멀린은 순식간에 일을 끝마치고는 잠시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싸늘한 돌바닥 위로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작은 빛우물처럼 내려와 고이며 주변을 은근한 빛으로 밝히고 있다.
나른한 빛을 받으며 선반위에 늘어서 있는 갑옷들은 훈련이 끝난 뒤에는 늘 그렇듯, 주인의 성격을 반영하듯 제각각의 모습으로 자리에 올려져 있었다. 간신히 제자리에 있다 뿐이지 제멋대로 올려져있는 퍼시발의 가죽보호대를 보고 피식 웃은 멀린은 손을 뻗어, 떨어지기 일보 직전의 꼴로 매달려있던 그것을 가지런히 올렸다. 그리고는 그 옆에 단정히 올려져 있는 은색 갑옷을 발견하고는 가만히 손을 올렸다. 쓴 흔적이 없이 아직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그것의 소유자는 리온이다. 그는 오늘 훈련을 쉬었기에, 그것은 아마 오후 순찰시간이 되어야만 주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멀린은 리온의 갑옷을 꺼내어 한번 훑어보고는 다시 헝겊을 들어 그것을 닦기 시작했다. 새것은 아니지만 잘 관리된 어깨보호대가 햇빛을 받아 은은한 빛을 머금고 빛난다. 한동안 손을 움직이다 작업을 끝낸 멀린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것을 햇빛이 내리쬐고 있는 창가에 올려놓고 잠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지금쯤 리온은 자신의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을 것이다. 무리해서 여느때처럼 일정을 소화하다보니 결국 그의 체력도 감당을 하지 못했던 것인지-한동안 좀 괜찮아진듯 했던 리온은 요 며칠 다시 증상이 심해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애써 가이우스가 의사로서 쉬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리온은 잠자코 그의 조언에 따라 낮의 행동을 되도록 삼가하고 있었다.
이대로 리온이 밝은 햇빛아래 서는 일이 점점 줄어들게 되어버리는 걸까. 언젠가는, 햇빛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그 녹색 눈이 완전히 어둠안에 갇혀버리게 되는걸까.
멀린은 자꾸만 불안해지는 마음을 밀어넣는다. 지금 리온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자신 뿐이다. 그 어떤 어려운 마법적 능력이 필요하다 한들 꼭 리온을 그에게는 맞지 않는 그 운명에서 구해낼 것이라고 다짐하며 멀린은 주인 대신 햇빛을 한껏 받고 있는 갑옷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표면을 쓰다듬어보자, 그늘에서 차갑게 식어있던 금속도 어느덧 따듯한 온기를 머금었다. 조금이라도 그 햇빛이 그곳에 남아있기를 빌며, 멀린은 다시 갑옷들을 갈무리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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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완전히 어둠이 내렸을 무렵, 리온은 오후 순찰을 모두 끝마쳤다. 성문 앞으로 돌아오자, 언제나처럼 성벽 위로 통하는 계단참에 멀린이 앉아있었다. 그는 멀찌기에서도 리온을 알아봤는지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달려오기 시작했다.
"오늘도 기다렸어? 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주치의 님."
"뭐야- 좋으면 그냥 좋다고 해요, 리온. 괜히 예의챙기지 말고."
멀린이 불만이라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그렇게 대꾸하자 그 조금은 퉁명스러운 말투에 리온은 오히려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멀린은 가끔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분위기를 바꿔주곤 했다. 그리고 그의 그런 천연덕스런 모습들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조차 잠시 잊게 만든다. 리온은 마치 강아지에게 하듯이 멀린의 머리를 잔뜩 쓰다듬어 흩어놓은 뒤, 머리스타일이 어쩌니하며 투덜거리는 멀린의 어깨를 두드려주곤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멀린에게 모든걸 다 털어놓은 그날 밤 이후로, 그는 좀 과보호다 싶을 정도로 리온을 챙겼다. 시간만 나면 보러 찾아왔고, 이렇게 저녁순찰이 있는 날이면, 아서의 저녁을 챙겨주고는 시간이 남는다며 와서 기다렸다가 같이 돌아가곤 했다. 마치 어미새에게 돌봄받는 아기새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리온은 슬며시 미소지었다. 덩치는 완전 정반대지만 말이다.
이제 조금씩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별들이 깨끗하게 개인 밤하늘 위에 촘촘히 박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포장된 대로 사이사이로 자리잡은 건물 창문에서는 촛불빛과 작은 웃음소리들이 새어나온다. 옆에서는 멀린이 그날 있었던 일들을 재잘거리며 떠들고 있다. 그 평화로운 광경들에 리온은 잠시나마 자신의 처지를 잊을 수 있었다.
한참을 올라가다 이제 왕성이 지척에 보이는 거리까지 오자, 익숙한 골목길들이 그들을 반긴다. 그리고 리온은 그 풍경에서 문득 옛날 일을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너 성 바로 코앞에서 길 잃었던거 기억나?"
"......왜 갑자기 그 얘길 꺼내는거에요."
좀 부끄러운듯 조그맣게 대꾸하는 멀린을 슬쩍 바라본 리온은 시선을 돌려 낮익은 골목골목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그 풍경은 그다지 변함이 없다. 리온은 그리운 어조로 말을 잇는다.
"심부름 갔다가 저쪽 골목 안에서 헤메고 있었지. 바로 몇블록만 더 가면 왕성이었는데. 그렇게 바로 눈 앞에 성이 솟아있는데도 어쩔줄 몰라하며-"
"흐흥... 그런걸로 절 바보취급할 셈이라면, 이제 저도 리온 못지않게 카멜롯 구석구석을 다 알고 있다고 다시한번 알려드려야겠네요."
멀린이 애써 어깨를 펴며 그렇게 말하자, 리온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과연 그렇겠지만 아직도 리온의 눈에 멀린은 그때 그대로다. 의욕넘치고 순수한 그때 모습 그대로. 그리고 이내 뒤이어 무언가를 떠올린 리온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이 번진다.
"그때 내가 말을 걸자 놀라던 네 표정이 아직도 기억나. '하필 돕는다고 나타난게 저 사람이야?' 하는 얼굴로 잔뜩 굳어서는, 쭈뼛쭈뼛 내 뒤를 따라오는게 얼마나 웃기던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멀린은, 기억을 되짚어보는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이내 또 불만스런 표정을 했다. 기억이 난 모양이다.
"기억나네요...근데 그건 제 잘못만은 아니거든요- 그때 리온도 '또 저녀석이야?' 하는 얼굴로 날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었다고요!"
귀까지 빨개져가며 그렇게 억울하다는 듯 말하는 멀린을 보고 리온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멀린도 어느덧 피식 웃어버리고 만다.
"여어- 즐거워보이네. 또 둘이 데이트야?"
키득거리며 웃던 둘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언제 다가왔는지 가웨인과 엘리얀이 다가오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데이트...?"
가웨인의 그 말에 리온은 왠지 좀 당황했지만 멀린은 태연한 모습으로 그것에 응수한다.
"그렇지 뭐. 그러는 둘도 밤산책이라도 다녀오는 길? 엘리얀, 가웨인이 또 음담패설 늘어놓고 그러진 않던?"
엘리얀도 그 말에 당황한 기색도 없이,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린과 엘리얀이 짠듯이 책망하는 눈빛으로 가웨인을 바라보자, 가웨인은 자기가 졌다는 표시로 두 손을 들어보였다. 리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가웨인은 기죽은 기색도 없이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껄껄 웃고는 다시 멀린에게 말을 건다.
"그래도 정말이지, 멀린. 너 요즘 리온 너무 귀찮게 하는거 아냐? 시도때도 없이 붙어있을려고 하니 원...."
그렇게 말하며 리온에게 다가가는 가웨인을 지켜보는 멀린의 눈이 조금 사나워졌지만, 가웨인은 본척도 않고 이번에는 리온에게 말했다.
"리온, 귀엽다귀엽다 응석받아주는것도 좋지만- 조심하라구."
리온이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난처해하는 가운데, 가웨인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눈을 찡긋해보이자, 멀린은 그제서야 발끈했다.
"뭘 조심하라는거야!!"
"어이쿠, 또 불 뿜는다- 저거 말이야 저거. 화상 조심하라고."
멀린이 잔뜩 붉어진 얼굴을 찌푸린채 한발자국 앞으로 내딛자, 가웨인은 과장되게 놀라는 표정을 하곤 몇걸음 도망치듯 물러났다. 그 광경에 엘리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 시작하자, 리온은 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한동안을 그렇게 쓸데없이 이어지던 멀린과 가웨인의 아웅다웅은, 남은 순찰을 끝내야 한다며 엘리얀이 침착하게 가웨인을 잡아끌고 돌아가고 나서야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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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그들은 왕성에 도착했다. 리온은 자신의 방에 돌아가기 전에, 입구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는 가이우스의 집무실에 먼저 들러 멀린을 배웅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멀린이 방으로 들어가길 기다렸지만 그는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돌아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요."
그럴 필요 없다고 들어가라 재촉해도 멀린은 막무가내였다. 절대 갈때까지 배웅하고 들어가겠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 리온은 기쁨 반 난처함 반이 되어서는 잠시 고민했다. 왜인지 선듯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리온이 한동안 그대로 머물러 있자 멀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리온은 머뭇거리다가, 메인 통로에서 시종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지나쳐가길 기다려 조금은 조용해진 틈을 타 나지막히 말했다.
"멀린, 고마워."
솔직한 마음을 담아 그렇게 말하자, 멀린은 조금 의외였는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멋적게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뭘 새삼스레 그래요-제가 한게 뭐 있다고"
"정말이야. 다... 고마워. 네가 없었으면...."
분명 더 힘들었을테니까- 리온은 그 말을 속으로 되뇌이며 멀린의 어깨를 도닥였다. 자신에게 멀린이 얼마나 힘이 되어주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전해졌으면 했다. 모든 걸 알고도 언제나처럼 묵묵히,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하지만 세심히 신경써주는 그 마음씀씀이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를...
멀린은 갑자기 진지해진 분위기에 조금 머쓱해졌는지 살짝 볼을 붉힌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멀린의 반응을 지켜보던 리온은, 심장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에 작게 쑥스러운 미소를 띄웠다. 그러자 의외로 멀린도 기쁘다는 듯 웃어준다- 역시 말이나마 고맙다고 하길 잘 했다고 생각하며 그는 잠시 멀린을 말없이 응시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멀린의 푸른 눈에는 늘 그랬듯 생기가 넘친다. 그리고 홍조를 띈 싱그러운 볼, 혈색좋은 도톰한 입술에까지 그 풍성한 생명력은 감돌고 있다. 방문 너머로 흘러나오는 희미한 오렌지빛 조명과 더해져, 그가 있는 쪽은 더없이 따스하게만 보인다.
리온은 반쯤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손을 올려 그의 얼굴을 감싸자, 보드라운 감촉과 함께 따스한 체온이 전해져온다. 멀린의 시선은 갑자기 닿은 그의 손 때문인지 작게 흔들렸지만, 피하지 않고 그대로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다.
두근...두근...
살짝 손을 움직여 멀린의 뺨을 쓰다듬자, 세상에 그것만이 남은 듯 다른 감각들이 사라져간다. 피부를 통해 체온이 전해져옴에 따라 잘게 뛰는 맥박이 점차 깊게 느껴져,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리온의 귓가를 울렸다. 마치... 물 속에 잠겨드는 몽롱한 기분.
조금 고개를 숙이자, 두근거리는 박동과 함께 진하게 밀려오는 향기가 리온을 자극한다. 그건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향기다.
그날 밤의, 피의 향기-
순간 리온은 갑작스레 머리를 두드리는 격통에 신음을 흘렸다. 순식간에 눈 앞에 캄캄해질 정도의 충격이다. 리온이 그 서슬에 조금 중심을 잃고 휘청하자, 멀린은 당황하며 그를 부축했다.
"리온?"
리온은 멀린의 어깨에 몸을 지탱한 채 고개를 떨궜다. 멀린의 어깨를 간신히 붙잡은 그의 손은 고통을 참는 듯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점점 힘이 들어가는 그 악력에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멀린은 그의 상태를 확인하려 그의 얼굴에 손을 뻗어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어느새 그의 목덜미에 배어나온 식은땀이 축축하게 손에 와닿는다- 하지만 그것에 놀랄 새도 없이, 멀린은 그를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고통에 잔뜩 찌푸려진 눈 사이로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는 서늘한 은빛을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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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늦게가 되서야 멀린은 리온의 방을 빠져나왔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에 빠졌는지 성 안은 조용하다.
리온은 통증에 시달릴 때마다 옆에서 손을 잡아주면 조금 긴장을 풀곤 했기에, 멀린은 그를 방에 데려가 진정시키고 잠이 들때까지 옆에 있어주고 나오는 참이었다. 그렇게 자는것까지 확인하고 나올 때마다, 그에게 자신이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는 걸까 하는 마음에 멀린은 조금 뿌듯한 마음이 되곤 했지만 오늘은 그럴수 없었다. 저녁시간에 보았던, 은빛으로 물들던 그의 눈동자를 떠올린 멀린은 다시 생각에 잠긴채 걸음을 바삐 옮긴다.
전투가 있었던 밤 이후로는 본 적 없었던 그 기묘한 은색 빛- 점점 병이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일까? 어떤 징조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좋아진 상황은 아닐거라고 멀린은 생각했다. 그런 섬득한 은색 빛이 좋은 징조일리가 없다. 더 늦어지기 전에, 이 병과 증상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놓아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상황이 다급해지자, 멀린은 자신의 질문에 답할 수 있을만한 유일한 존재를 금새 떠올렸다. 킬가라- 오랜 삶으로 쌓인 지혜와 마법적 지식을 가진 그라면 아마 이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않을까? 그것이 지금 멀린이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이었다.
멀린은 몰래 성 밖으로 빠져나가 숲길에 접어들었다. 찬찬히 옮기던 그의 걸음걸이는 초조한 마음에 점점 빨라져 이내 달음박질과도 비슷한 것으로 바뀐다. 만월이 다가오는지, 달빛은 휏불이 필요없을 만큼 밝게 앞길을 비춰주었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적당히 멀리까지 나왔다고 생각되는 곳까지 도착하자, 멀린은 그의 드래곤을 불렀다.
몇분이나 지났을까,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던 멀린에게는 그 몇분의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지만 결국 그의 그림자가 밤하늘에 나타났다. 그리고 점차 그 실루엣은 점차 커지고, 날개짓 소리는 지척에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윽고 근처까지 날아와 멀린의 머리위를 한바퀴 맴돈 거대한 드래곤은 그 육중한 몸을 사뿐하다고 느껴질만큼 우아하게 땅에 내려놓고는 멀린 앞에 섰다.
"이번에는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는가, 젊은 마법사여?"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요.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러자 킬가라는 이미 그런 급한 소환은 익숙하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마치 늘 거기에 있었던 것 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멀린을 내려다보며 끈기있게 그가 질문하기를 기다렸다. 멀린은 어디서부터 질문해야할지 조금 주저했지만, 그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부터 꺼내어보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나이트워커에 대해 알고싶은데요......"
그제서야 킬가라의 눈에는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기억을 더듬으려는 듯이 잠시 사이를 둔 드래곤은 되물었다.
"나이트워커? 그 오래된 이름을 어디서 들었느냐?"
멀린이 그 질문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자, 킬가라는 그런 멀린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거의 잊혀져가던 이름이구나... 그것들은 냉혹하고도 고고한 생물이었지. 마치 피에 취한 늑대 같은 생물들이었어- 우리 드래곤과는 그다지 접점이 없었지만, 인간들과 그것들과의 지루한 싸움은 나도 들어 알고 있다."
드래곤의 목소리는 마치 추억을 되짚어보는 것 같이 조금은 몽롱했다. 드래곤에게도 추억거리가 될 정도로 옛날의 일인 걸까? 멀린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왠지모르게 밀려드는 한기에 몸을 움츠렸다.
"...그럼 그것과 관련된 약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요?"
킬가라는 멀린이 갑자기 주제를 좁히자 의외라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드루이드들의 약 말이냐? 일단 네가 왜 그것에 관심을 가지는지를 물어야겠구나. 혹시 아서와 관련된 이야기인가?"
"아뇨, 아서는 아니고- 기사 중 한 사람이 그 약을 마시게 되어서..."
킬가라는 그 말에 안도의 한숨 비슷한 콧김을 내뿜더니,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듯 시간을 끈 후 말했다.
"그건 드루이드들 사이에서도 아는 사람이 적은 비밀스런 일들 중 하나지. 나도 딱히 너희들이 알고 있는 이상을 알고 있지는 않을게다."
"심지어 당신도 치료방법을 모른다는 말인가요?"
"모른다기 보다는- 알려진 대로 그것의 치료방법은 없다. 네가 나를 부른 걸 보면, 어떤 마법적 해결방법은 분명 있으리라고 믿고 있는 거겠지? 그것도 불가능하다는 것 하나는 알려줄 수 있겠구나."
불가능이라니-비관적인 태도를 주로 취한다고는 해도, 결국엔 왠만한 것에는 다 해결책을 내놓곤 했던 그가 그런 말을 하자, 멀린은 꽤나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현실감이 사라진 머리는 붕 뜬 듯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작게 남은 희망마저 사라져버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설마 정말...완전히 아무 방법이 없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멀린이 생각을 추스리려 애쓰는 동안, 킬가라는 여전한 목소리로 설명을 계속했다.
"그 피가 이미 자리잡아버린 이상, 어떤 마법적 회복도 불가능하다. 그 약은 마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적인 것이거든. 아무리 마법으로 노인을 젊은 모습으로 돌린다 해도 그 노화현상을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게다가 그 고대 생물의 피는 네 상상이상으로 강력한 것이기도 하고. 물론...... 마법을 써서 그의 고통을 없애줄수는 있겠지."
"고통을 없애요? 그런 방법은 있나요?"
멀린은 그의 마지막 말에 퍼득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되물었다. 하지만, 멀린의 표정은 조금 안도한듯 풀어진 반면, 그걸 바라보는 드래곤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조금 눈살을 찌푸린 킬가라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일이 더 고통스럽게 변하기 전에, 그를 죽여주라는 말이다, 멀린."
그 생각지도 못한 말에 멀린은 심장이 멎는듯한 기분이었지만, 잔인한 해결책을 내놓은 킬가라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하다. 멀린은 참지 못하고 내뱉듯이 소리쳤다.
"그럴수는 없어요!! 어떻게...리온을..."
"아, 기사 리온인가...그건 좀 의외군. 그로선 참 예상외의 대범한 짓을 했군 그래. 하지만 드루이드가 그에게 약을 준 것도 이해는 가는구나. 그라면 조용히 끝까지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겠지."
몇번 작게 고개를 끄덕인 킬가라는 원망스런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멀린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언짢다는 듯이 콧김을 몇번 내뿜었지만 이내 아까의 담담한 모습으로 돌아가서는 한층 진지해진 어조로 말했다.
"멀린, 그가 지금은 어떻게든 버티고 있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흡혈욕구가 그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일은 점점 더 지저분하게 변할 게다. 인간의 피만이 그를 잠시나마 진정시킬 수 있을 거고, 그렇게 잠시 나아진다 해도 앞으로 점차 갈증은 잦아질테지. 그리고 그 욕구가 심해질수록 자신을 유지하기 힘들어 질 터. 그건 그에게도, 지켜보는 이에게도 그리 좋은 일은 못 될게 뻔해. 그러니, 그를 죽여 평화를 줄게 아니라면 차라리 더 이상 얽히지 말거라. 그를 위한다면 그가 더이상 비참해지지 않도록 그저 멀리 떨어지란 말이다."
멀린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킬가라의 말투는 단호했다.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자기가 어떤 상황인지는 알고 있는건가?"
"알고 있어요..... 끝이 올거라는 것, 그리고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다는 것 까지.."
"그런가. 그렇다면 됐다. 그냥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선택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주거라."
"그렇지만, 약속했단 말이에요!! 꼭 낫게 해주겠다고!"
멀린의 절박한 말에도, 킬가라는 더이상 말해줄 것은 없다는 듯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고는, 이윽고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것인지 날개를 펼쳤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그늘이 멀린을 뒤덮자, 역광으로 그늘진 드래곤의 얼굴에서는 형형히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만이 떠올라 있었다. 멀린은 그 눈을 올려다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킬가라, 제발-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멀린을 내려다보던 그는 다만 고개를 저어 대답을 대신하고는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조언 겸 경고를 하나 하겠다, 젊은 마법사. 그가 아무리 피를 갈구한다 해도, 절대 네 피를 주어선 안 된다. 알겠느냐? 다른사람이라면 몰라도, 네 피는 안돼."
"네?? 그건 왜...."
킬가라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훌쩍 날아올랐다. 점차 사라져가는 드래곤의 모습을 보면서, 멀린은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 그자리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겨우 자신의 방에 돌아가서도, 멀린은 한동안 생각을 가다듬을수가 없었다. 방법이 없다고?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를 지켜봐야만 한다고?
자신의 마법으로도 아무런 힘이 되줄 수 없다니-멀린은 지독한 무기력함을 느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힘들어하는 모습은 그동안으로도 충분했다. 그랬기에 드래곤에게서 좀 더 다른,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는데 그것조차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 결국 현실로 다가왔다. 멀린은 자신을 단단히 받쳐주던 무언가가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며 그저 한동안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그가 사라진다는 현실이 지독히도 괴로운 걸까. 물론 기사들 중 다른 누군가가 같은 운명에 처한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나 괴로운 일이다. 드래곤의 말은 자꾸만 리온의 끝을 생각하게 했고, 그것은 멀린을 계속 괴롭혔다.
그동안의 리온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무렵의 그와, 위험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앞을 지키듯 막아서던 뒷모습, 그리고 그의 미소띈 얼굴까지.
또 그렇게, 잠들 수 없는 밤이 흘러갔다.
-
커튼까지 완전히 쳐진 어두운 방 안에서, 촛불 하나만이 주변을 밝히고 있다. 멀린은 리온의 이마에서 미지근해진 수건을 걷어내어 그의 목덜미에 맺힌 식은땀을 조금 훔쳐내고는 물그릇에 다시 담근다. 그 손길에 선잠에 빠졌던 리온은 조금 눈을 떴다.
"멀린... 아까 돌아간다고 했었잖아"
"이제 갈 거에요."
멀린은 살짝 웃어보이고는 몸을 돌려 수건의 물기를 짜내고는 다시 리온의 이마에 얹었다. 밤이되면 고통도 열도 식어들었었는데 최근 늦게까지 시달리는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젠 완전히 달빛의 영향까지 받기 시작한 모양이다. 멀린은 창문을 막은 커튼으로 스며드는 만월의 은색 빛을 흘깃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멀린의 그 한숨을 다른 것으로 착각한 리온은, 미안하다는 듯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전하께 가봐야 할 시간이지? 이미 늦은거 아냐?"
그러자 멀린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괜찮아요. 벌써 대충 말 해 놨으니까... 그도 허락해줬어요."
"아서가? 대체 뭐라고 둘러댄거야..."
자그마한 일만 있어도 멀린을 불러대곤 했던 아서를 떠올리며 의외라는 듯 되묻자, 멀린은 조금은 짖궂어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뭐긴요... 다 죽어간다고 그래버렸죠. 걱정마요. 가이우스의 조수 명목으로는, 나도 한 입김 한다구요."
그리고는 체온을 확인하려는 듯 손을 뻗어 목덜미를 짚어본 멀린은 이내 손을 거두고는 다시 옆에 걸터앉았다. 그 잠깐이 왠지 아쉬웠던 리온은 슬며시 손을 뻗어 침대 위에 기대어있는 멀린의 손 근처로 다가갔다. 작게 손이 스치자, 멀린은 언제나처럼 그의 손 위로 손을 겹쳐주었다. 서늘히 식은 손등 위로, 따스한 체온이 안심하라는 듯 전해져온다. 그제서야, 어느샌가 긴장하고 있었는지 뻣뻣해졌던 몸은 조금 느슨해진다.
그리고 다시금 마치 보호받는 아기새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린 리온은 피식 웃었다. 지켜줘야만 할 것 같았던 그가 지금은 자신을 돌보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아서의 곁으로 돌아가는 걸 묘하게 쓸쓸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던 그동안과는 달리, 멀린은 계속 자신의 곁에 있다. 그런걸 생각하면 이 모든 상황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닌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리온은 살며시 멀린의 손을 마주잡았다. 자신의 손 안에 쏙 들어올 정도로 남자의 손이라기엔 의외일 정도로 가늘지만, 어딘가 안심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손이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걸 느끼며 리온은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자, 멀린은 조금씩 낮에 있었던 얘기며, 그가 없었을 때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천천히 나직하게 이어지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있던 리온은, 요 며칠새 자신이 빠진 일과가 늘어났다는걸 깨닫고 다시금 자신의 처지를 상기했다.
급속한 체력저하에 이어 찾아든 것은 그렇게 두려워하던 그 단계인 듯 했다. 이제 흡혈욕구를 느끼게 된 것이다. 그건 마치 아이가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젖을 찾아 물려고 하는 것과도 같아서, 가장 풍성하게 피가 맴도는 목덜미를 물어뜯고 그걸 마시고 싶다는 욕구가, 그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마냥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충동을 느낄 때마다, 리온은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져가고 있었다.
특히, 처음 그걸 느낀 대상이 바로 멀린이라니- 리온은 이를 사려물었다. 간신히 제동을 걸긴 했지만, 결국 자기를 위해 기다려주었던 그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때 일을 떠올린 리온은 왠지 모르게 밀려드는 불쾌감과 불안에, 반사적으로 잡고 있던 멀린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마치 그러기 위해 손을 놓았다는 듯이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멀린은 몇번 그를 만류하려다가, 대신 베개를 더 끌어와 뒤를 받쳐 그가 침대맡에 기대 앉을 수 있도록 했다.
"저 때문에 못 쉬고 있는거죠? 이야기를 시작하니 멋대로 길어져서...미안해요."
"전혀...오히려 낮시간동안 심심했는데 네가 얘기해주니 난 좋은데."
"헤헤... 진짜요? 그럼 좀만 더 있다가 갈게요."
밤이 늦은 시간이니 이제 보내야 할텐데- 리온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모순같지만 조금만 더 있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마음이 약해진 탓인지, 가급적 혼자 있는게 좋을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자꾸만 멀린에게 의지하게 된다.
리온은 다시 멀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언제나처럼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늘상 있는 훈련이며 아서와의 실랑이를 멀린의 입으로 들으면 제법 새로웠다.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이랄지, 멀린만의 독특한 시선이 들어간 그 회상들은 리온이 잘 알고 있는 반복적인 일과와 기사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져 아무 감흥도 주지 못했던 작은 것들이 그의 입에서는 즐거운 이야기가 되어 나온다. 리온은 새삼 감탄하며, 이제 조금 들뜬 듯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쏟아내는 멀린에게 때때로 고개도 끄덕여가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있는 동안은, 오직 촛불과 달빛만이 밝히던 어둑한 방안이 조금은 밝아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밝은 곳에도 여전히 어둠은 존재하기 마련인 것인지-
어느 순간, 모든 소리는 잦아들었다.
리온은 그 감각에 반사적으로 조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다시 모든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서서히 그 울렁거림은 커져가고 있었다. 그때의 그 묘한 감각이다. 리온은 필사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멀린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 이상한 감각을 떨쳐내보려 했으나 점차 그 목소리는 멀리에서 들리는 것 처럼 잦아들어간다. 그리고는 이윽고, 마치 물 속에 잠긴 것 같은 고요함이 완전히 그를 감싼다. 현실감이 사라져간다. 그리고 남는 것은 오직 심장박동 소리...
"...그랬었는데 가웨인이 글쎄...어..?"
멀린은 리온이 갑자기 쓰러지듯 자기에게 몸을 숙이자, 정리하려 수건을 헹구던 것을 그만두고 젖은 손을 대강 닦아냈다. 그리고는 그가 현기증이라도 일으킨 것인가 걱정하며 그를 살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리온의 손이 먼저 멀린의 팔을 잡았다. 다시 의식을 잃거나 한 건 아니구나 하는 마음에 안도하며 멀린은 그를 부르려 입을 열었지만, 그가 그대로 자신을 끌어안듯이 감싸안자 멀린은 놀라 입을 다물었다.
멀린은 뒤이어 뺨에 느껴지는 그의 체온과 까슬한 수염의 감촉에 당황했지만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열 때문인지 달큰하게 주위를 감싸는 그의 체취, 귓가에 그가 내뱉는 불규칙한 호흡 소리가 뜨겁게 와닿는다. 그리고 어느때보다도 가까이 닿아있는 그의 체온- 멀린은 리온의 손이 자신의 어깨를 아프게 그러쥘 때까지도 현실감을 놓친 채 두근거리는 심작박동만을 느끼고 있었다.
"리온...?"
멀린은 묘한 긴장에 잔뜩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한층 더 힘주어 멀린을 끌어안은 리온의 팔은 밀어낼 수도 없이 단단히 그를 옭아맸다. 그리고 뭐라 할 새도 없이 자신의 뒷목덜미를 움켜쥐는 손길에 멀린은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완전히 멀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길게 심호흡을 한 리온은 스카프가 거슬린다는 듯 그것을 끌어올리고 멀린의 목덜미를 입술로 훑어내린다. 그 오싹한 느낌에, 멀린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잊어버린 채 다만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리온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연약한 피부를 가로지르는 뜨거운 입술에 몸을 떨던 멀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날선 이빨이 목덜미에 와닿는걸 느끼고는 전율했다.
"읏......"
멀린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지만, 두려움 때문인지 그대로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도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은 리온의 이가 살을 파고들려는 듯이 천천히 죄어오는 것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리온을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리..온...."
가까스로 내뱉은 목소리는 두려움과 공포감이 섞여 잔뜩 떨리고 있었다. 멀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때, 그 희미한 음성이 간신히 그의 의식에 닿았는지, 리온은 번개에라도 맞은 사람처럼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멀린은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리온의 품 속에서 다만 떨리는 몸을 그대로 기댄 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용한 공간 안에, 빠르게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울리는 것 같았다.
얼마 후, 리온은 세게 멀린을 밀어냈다. 멀린은 그 힘에 침대 뒤로 쓰러지며 갑작스러운 반동에 작게 신음했지만, 부드러운 침대 위라 별다른 충격은 없었다. 하지만 그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거부당하는 것 같은 행위는 무의식중에 멀린의 마음에 차갑게 스며들었다. 서늘한 시트 위에서, 멀린은 순식간에 사라진 체온 때문에 몸을 떨었다. 그전에 느낀 두려움이 아니라, 사라진 그의 체온 때문에.
"나가."
부스스 몸을 추스려 일어나던 멀린은 그 낮설게만 느껴지는 음산한 목소리에 놀라 리온을 바라보았다. 리온은 고개를 숙인 채라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멀린이 그가 괜찮은지 확인하려 조금 손을 뻗었을 때, 리온은 다시한번 거부의 말을 내뱉었다.
"가! 멀린... 제발....... 돌아가!"
멀린은 그 처절하기까지 한 기세에 눌려, 도망치듯 황급히 방을 나섰다.
고개를 숙인 채, 자기의 의지를 거스르고 한껏 날카로워진 이로 짓씹은 입술에서 그도 느끼지 못한 피가 한줄기 흘러내렸다. 하지만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리온은 자신의 머리를 그러쥐었다. 아직도 피냄새에 미친듯이 뛰고있는 심장을 뜯어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그 혼란 속에서, 리온은 한동안을 어둠 속에서 혼자 머물렀다.
-
방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쌀쌀한 바람에, 심지어 벗어 걸쳐놓았던 재킷까지도 놓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지만 멀린은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놀란 탓인지 떨리는 다리 때문에 몇걸음 가지 못하고 복도 벽에 기대선 멀린은, 잠시 그대로 멈춰선 채 길게 심호흡을 했다. 서늘한 밤공기가 폐로 밀려들어오자 아직 뛰고 있던 심장이 조금은 안정을 찾아갔다.
그제서야 몸의 감각이 하나둘씩 되돌아온다. 뒤이어 느껴지는, 목덜미의 저릿한 감각에 멀린은 손을 올려 그 부분을 감쌌다. 리온의 입술이 닿았던 곳이다. 뜨거운 호흡과, 서늘했던 이.
이게 킬가라가 경고했던 그것인 걸까- 모든 걸 잊은 채, 다만 피를 원하게 된다는 그것. 그 순간의 리온은 리온이 아닌 것만 같았다. 멀린은 조심스레 다시 기억을 더듬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묘한 감정과 그와 함께 온 몸을 덮치는 한기에 어깨를 감싸쥐었다. 이건 두려움일까? 하지만 멀린의 머릿속을 계속 맴도는 것은 리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혼란스러워하던 그 모습. 그는 결국 마지막 순간에 그것을 이겨냈고,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분명 그도 자신만큼이나 당황했을 것이다.
멀린은 굳게 닫힌 방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다고, 다 괜찮을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가 더이상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멀린은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달빛도 하나 없는 그믐달의 밤. 이미 완전히 어둑해진 숲 속 너머에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서를 비롯한 기사들은 그 소리에 긴장하며 주위를 경계했지만, 아직 그 소리는 멀찌기에서, 산발적으로 들려올 뿐이다. 하지만 더 깊어진 밤기운에, 퍼시발은 캠프 가운데에 켜놓은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좀 더 집어넣어 불을 조금 더 키웠다. 숲 속이라지만 나무가 드문드문한 곳에 자리를 잡은 그들의 모닥불은 분명 눈에 띄일 것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이번 그들의 목표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가지고서야 강도들만 잔뜩 불러모으지... 짐승들은 불을 무서워하니 얼씬도 하지 않겠구만."
근처 나무에 기대어 앉아있던 가웨인의 그 투덜거리는 듯한 말에 퍼시발은 주위로 펼쳐진 어두운 숲속을 한번 슥 둘러보고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여긴 강도도 없는 지역이잖아. 그리고 강도쯤이야...올테면 와보라지 뭐."
그리고는 잠자코 불길을 더 살리는 퍼시발을 보며 한번 고개를 갸웃한 가웨인은 이내 짖궂은 미소를 띄웠다.
"퍼시발, 너 사실은 무서운거지? 근처에 곰이라도 오면 어쩌나 하고-"
"닥쳐, 가웨인. 내가 살던 마을에서는 늑대며 곰이 쥐만큼이나 많이 나왔었거든?"
"정말이야? 그래서 그때 쥐보고 그렇게나 비명을 지른거였구만?... 크크..."
그걸 시작으로 또 한동안 엎치락뒤치락 장난을 쳐대는 둘 덕분에 주위에 있던 기사들은 웃었지만, 멀린은 즐거운 기분을 오래 느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번 퀘스트의 목표는 늑대사냥이었고, 북쪽의 숲에서만 나온다던 늑대들을 멀린은 그다지 접한 일이 없기 때문에, 그는 평소보다 좀 긴장해 있었다. 물론 그보다 더한 괴물들도 본 멀린이지만, 심지어 이번에는 마법으로 변형되었을지도 모르는 늑대다.
모르가나의 공격을 막아낸 후로도, 이상한 일들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특히 마법생물들이 국경 근처의 마을들을 습격하는 것이 잦아져, 피해는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아마도 모르가나의 소행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저 그때그때 퇴치해 나갈 뿐, 어떤 다른 방법도 없었다.
이번에도 늑대 떼의 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고, 아서와 기사들은 피해를 입었다는 마을 근처까지 직접 나온 것이었다.
늑대는 영리한 동물이고, 그런만큼 왠만해서는 인간의 마을을 섣불리 공격하지 않는다. 인간 하나는 연약하지만 무리는 위험하다는 걸 이미 알기 때문이다. 전염병이나 전쟁 등으로 마을이 쇠락해지지 않는 이상은 그들은 그들의 영역에서 삶을 영위한다. 그러니 보통늑대 무리가 인간들의 마을을 습격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운 일-분명 보통 늑대는 아닐거라고 예상하며 모두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멀린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서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리온을 슬쩍 곁눈질해 살폈다.
이번에는 오랜만에 리온도 퀘스트에 동행해 있었다. 본인의 요청도 간절했고, 늑대의 습격시기가 늘 밤에 이루어졌다는걸 고려해 어두울때 주 행동이 이뤄질 예정이었기에, 아서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어느일에도 앞장서곤 했던 리온이 갑자기 찾아든 이상한 병 때문에 그동안 겪었을 기사로서의 자괴감을 어느정도 예측할 수 있었던 그였기에 더더욱 거절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리온도 참가를 승락한 아서였지만 멀린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이번 임무는 멀린이 따라올 필요 없다고, 위험하기만 할 테니 남으라고 보통때와는 달리 이상하리만치 그를 막아섰지만, 그런걸로 꺾일 멀린이 아니었다. 리온도 가는 이상, 그를 그냥 혼자 보낼수는 없었다. 자신이 별다른 도움은 안될테지만, 진짜 그가 처한 상황을 알고 있는건 자신 뿐이었으니까...
아서는 결국 자기를 지키겠다니 뭐니 하며 끝까지 따라나서는 멀린에게 손을 들고 말았다.
모닥불의 조명으로 어렴풋이 비치는 리온의 얼굴은 언제나와 같다. 하지만 그 따스한 불빛 속에서도 조금은 창백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지나친 생각 탓일까? 사실상 이렇게 리온과 근처에 있는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 일이 있었던 다음날 밤, 리온은 그 일에 대해서 정중히 사과했지만, 덧붙여 멀린에게 더이상 자기에게 오지 말라고도 했다. 멀린이 그 일은 신경쓰지 말라고 해도 그의 태도는 단호해서, 멀린은 그 뒤로 한동안 리온을 만나지 못했다. 밤에 상태를 봐주러 갔던 것은 물론이고, 저녁순찰이 끝난 뒤 함께 돌아가곤 했던 것도 이제는 없어져버렸다. 돌아가는 길의 잠깐의 시간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마음에 기다린 멀린을 멀찌기서 눈치챈 리온은 그가 다가오기도 전에 거부하듯 등을 돌려 걸어가버리곤 했던 것이다.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의논하는 것인지, 둘의 이야기는 한동안 길어지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둘을 멍하니 바라보던 멀린은, 아서가 도중에 자신을 흘긋 바라보자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는 이내 시선을 다시 리온에게로 돌렸다. 그 뒤로도 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몇마디를 더 나누더니, 조금 뒤 모닥불가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지시를 내렸다.
"목표가 있을 정확한 장소는 모르지만 언제까지고 기다릴수는 없지. 아마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을 테니 일단 정찰대를 보내겠다. 가웨인과 퍼시발은 마을 근처를 다시한번 살피고, 엘리얀은 나와 함께 계곡쪽으로 간다."
그 말이 끝나자 퍼득 고개를 든 리온이 뭐라고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아서는 기다리지 않고 계속 이어 말했다.
"리온은 여기서 캠프를 지켜주도록."
그 말을 들은 리온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졌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해명을 요구하듯 그저 아서를 바라볼 뿐이다. 그런 그의 시선을 마주보던 아서는 곤란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말했다.
"네가 제안한 편성도 좋지만, 나로선 제일 훌륭한 기사를 여기다 남겨놓고 싶군. 사실, 늑대랑 마주치는거보다 멀린을 상대하는게 더 힘든 일이거든. 안 그런가?"
그 말에 기사들이 키득거리자 멀린은 억울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그건 모두의 유쾌한 농담으로 끝났지만, 멀린은 한편으로는 아까 리온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과 남아있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애써 피하려고 하는 그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건 아니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조금 섭섭했다.
각자 몇명의 병사들과 함께 조를 이루어 각자의 목적지로 떠나고 나자, 모닥불가는 눈에띄게 텅 비어버렸다. 리온은 평소의 그 아무렇지도 않은 태연한 태도로, 남아있던 병사들에게 일단 쉬고 있으라는 지시를 하고는 자신도 모닥불에서 좀 떨어진 곳에 걸터앉았다. 멀찌기에 앉은 병사들이 자기들끼리 무엇인가 잡담을 하기 시작하자, 리온은 물끄러미 모닥불을 바라보다가 칼을 꺼내어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런 모든 상황들 속에서도 리온의 시선이 멀린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자연스러움을 가장하고는 있지만 분명 이전과는 다르다. 마치 그에게 완전히 안보이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멀린은 조금 풀이죽었다. 하지만 모처럼만의 기회다. 멀린은 주춤거리면서도 그에게 다가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정말 늑대가 이 근처에 있을까요? 이렇게 마을과 가까운 곳인데..."
멀린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대견해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벌써 세번이나 보고가 되었으니- 있다고 보는게 맞겠지?"
여전히 리온의 시선은 손질하는 칼 위에 붙박힌 채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차분하고 다정했다. 그 목소리에 한층 더 용기를 얻은 멀린은 조금 더 다가가 근처에 걸터앉고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조금 시간을 흘려보낸 뒤, 다시 말을 걸었다.
"리온은 늑대 본 적 있어요?"
"수비대에 있을때 몇번..."
"전 사실 한번인가밖에 본 적 없어요. 그것도 멀리에서요... 야생 살퀭이나 여우같은건 봤지만- 제가 살던 마을 근처는 아예 없다시피 했었고......"
그렇게 설명이 길어지자 리온은 그제서야 멀린에게 조금 고개를 돌리고는 눈을 마주쳐왔다. 그리고 멀린이 오랜만에 마주보는 그 시선에 들떠 말투에 생기가 더해지기 시작하자, 리온의 입에는 작게 미소까지 걸린다. 멀린은 그 작은 행동에도 기쁨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제 완전히 그를 놓친 줄만 알았었다. 이제는 다시 그가 가까이에 와주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한동안 모닥불을 응시하던 멀린은 어느정도 침묵이 흐른 후, 조심스레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말을 꺼냈다.
"리온...... 있잖아요- 그날 일은..."
그 말을 꺼내자마자 리온의 표정이 굳어드는걸 보며 멀린은 조금 후회했지만, 애써 말을 이었다.
"전 잊었어요. 그러니 리온도 잊어주면 안 되겠어요? 아니, 오히려 예상하고 있던 일이잖아요. 그러니 앞으로 조심하면..."
조심스럽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굳은 표정으로 멀린을 응시하는 그 눈은 모닥불에 비쳐 알수 없는 빛으로 일렁였지만, 마치 금속처럼 둔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에 점점 작아지던 멀린의 목소리는, 곧장 끼어든 리온의 말에 끊겨 사라졌다.
"멀린, 이제 나 혼자서도 감당할 수 있어. 그러니 넌 그저 예전 생활로 돌아가면 되는거야."
"그렇지만... 그 뒤로 몸은..."
"괜찮아. 그리고 어떤건지는 나도 이젠 알고 있으니까."
그 말을 마친 리온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걱정해줘서 고마워' 한마디를 남기고는 숲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멀린은 그를 붙잡을 도리도 없이 그저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쫒을 뿐. 또 그의 뒷모습만이 남았다. 멀린은 안타까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고는 한숨을 쉬었지만, 그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앞으로 걸어가던 리온은, 갑자기 멈춰서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칼을 뽑아내었다. 스르릉 하는 금속의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자, 수다를 떨고 있던 병사들도 긴장하며 주위를 경계한다. 그제서야 멀린도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자, 미묘한 긴장감과 위화감이 먼저 몸을 타고 흐른다. 그리고 그 묘한 기척을 따라 시선을 어두운 숲속으로 옮겼을 때- 그곳에는 이미 마치 반딧불이 같은, 하지만 확연히 살기를 내뿜고 있는 샛노란 안광들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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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는 칼에 묻은 피를 대강 닦아내며 주변에 흩어져있는 늑대들의 시체를 세어보았다. 여섯마리. 몇마리인가는 도망갔지만, 애초에 그리 많은 수가 공격한 건 아니라 잘 대처할 수 있었다. 인간들의 숫자를 고려하면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숫자였지만 전략이라는걸 아는 늑대들이다. 소리도 없이 기습한 것은 확실히 위험했다.
아서는 부상당하지 않은 병사에게 늑대들이 완전히 숨이 끊어졌는지를 살피라 하고는 잠시 숨을 돌렸다. 놓친 녀석들까지 쫓을 수는 없지만 이정도면 한동안은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서는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이곳이 습격당했다는건 차라리 좋은 징조였다.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 않았을 테니까.
아서는 문득 캠프에 있을 리온과 멀린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리온을 그곳에 두고온건 잘 한 일이었다. 굳이 자신과 함께 정찰조에 가겠다는 그를 거기에 둔 것은 리온의 전투력 문제가 아니라, 멀린과의 문제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으니까.
어느순간부터인가 둘의 관계가 서먹해졌다는건 아서도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싸우거나 그런 일차적인 문제는 아닐거라 생각했다. 리온이 이번 퀘스트에 나서면서 그렇게까지 멀린의 동행을 말리던 모습은 오히려 그를 지독하게 걱정하는 것 같은 기색이었으니.....적어도, 아서가 아는 리온이라면 그랬다. 무엇이 둘의 사이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멀린이 곁에 있음으로서 한결 가벼워진 표정을 했던 리온을 떠올릴때마다 아서는 어떻게든 둘을 화해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겠지만 이 시간이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서는 출발명령을 내렸다.
한동안 천천히 왔던길을 되짚어 나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저편에서 들려온 풀이 스치는 소리에 일행은 다시 긴장하며 칼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타난 것은 가웨인 일행이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칼을 다시 갈무리한 아서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들였지만 이내 의아한 말투로 질문했다.
"가웨인, 퍼시발. 마을 근처에 있어야 되는거 아닌가? 왜 여기까지 왔지?"
그 말에 가웨인은 여전히 굳은 얼굴을 풀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 답지 않은 모습이다.
"늑대들의 기습을 받았습니다. 처리는 했지만... 거기까지 왔다면 여기에도 오지 않았나 해서 달려온 참입니다."
"그쪽까지 내려갔다고? 방금 여기서도 나타났었는데?"
아서의 그 말에 가웨인의 얼굴에는 순간 근심스런 표정이 어렸다. 그리고 아서도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바를 순식간에 깨닫고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설마 병력이 나뉘기를 기다린 것인가? 아서는 거리가 좁혀질수록 뛰다시피 달려가며 이를 사려물었다. 캠프는 제일 뒤쪽에 있었기에 제일 인원도 적었고, 그렇기에 만약 비슷한 기습을 당했다면 어떨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한참 어두운 숲을 지나쳐 지나왔을 때, 멀리서 아직 떠나왔을 때 그대로 타오르고 있는 노란 불빛이 보여 아서는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수풀을 지나쳐 드러난 공터의 캠프에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다만 바닥에 흩뿌려진 붉은 핏자국만이 그들을 맞이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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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침엽수림 사이로 진눈깨비같은, 채 눈이되지 못한 비가 흩어져내리기 시작했지만 멀린은 추위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의 품안에는 부상을 당한채 쓰러진 리온이 있었고, 그들 주위로 늑대들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들어가고 있다. 이미 자신들의 우위를 아는 듯, 그들은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리온은 힘을 짜내어 다시한번 입을 열었다.
"멀린... 도망가..."
멀린은 몇번이고 들은 그 말을 애써 무시하며 힘없이 흘러내리는 리온의 몸을 무릎위로 다시 끌어올려 감쌌다. 그것들이 캠프에 들이닥쳤을 때부터 멀린을 먼저 도망치게 한 리온이었지만, 어떻게 그를 두고 갈 수 있었겠는가? 순식간에 그들을 덮친 무리는, 방심하고 있던 병사 하나의 목을 정확히 물어뜯어 순식간에 처리하고는, 그들을 압도하는 숫자로 서서히 그들을 압박해왔다. 멀린은 그들이 눈치못챌 범위 내에서 마법을 써 돕긴 했지만, 그것들은 끊임없이 몰려들었기에 도저히 그곳을 지켜낼 수가 없었다.
멀린은 피를 흘리면서도 간신히 의식을 유지하며 치켜뜨고 있는 리온의 파들거리는 눈을 자신의 손으로 덮고는 마법을 써 간신히 늑대 몇을 물러나게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적인 존재라면 분명 낮설 마법의 힘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지, 앞에 있는 녀석이 물러나도 뒤에 있던 녀석이 이빨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수가 너무 많다. 계속 이대로 버티더라도,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쪽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한동안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선두에 있던 회색 털을 가진 거대한 늑대가, 한동안의 견제 후에 결국 자제심을 잃고는 도약했다. 멀린은 손을 뻗어 마법력을 날려 대담하게 뛰어든 그 녀석을 뒤로 날려버렸지만, 그게 신호라도 된 듯, 옆에있던 늑대가 뒤이어 달려들었다. 채 손을 거두지도 못했던 멀린의 눈이 경악으로 커지고, 지척까지 다가온 거대한 늑대의 그림자는 그들을 덮을 정도였다. 멀린은 리온을 감싸며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막을수는 없을 테지만, 운이 좋다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 후, 한동안의 정적이 찾아들었다. 짙은 짐승의 호흡소리만이 지척에서 들려온다. 하지만 아직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에 의아해하며 멀린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 앞에는 아까 자신들을 향해 뛰어들던 늑대가 목덜미를 물어뜯긴 채 피를 흘리며 절명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마치 어둠속에 녹아들듯한 검은 털을 가진 늑대가 피로 젖은 얼굴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멀린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지만, 잠시 멀린을 바라보던 그 늑대는 이내 그들을 등지고 섰다. 마치 그들을 지켜주겠다는 것 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늑대들은 동료의 피냄새를 맡자 한층 기세가 줄어든 듯 했다. 멀린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자신들의 앞에 지키고 선 그 늑대가 마치 그들을 돕는 것처럼 느껴져, 힘없이 쳐진 리온의 몸을 받쳐들고 간신히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그 정체모를 생물은 혼자서 늑대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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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근처에 있던 동굴을 발견하고 끌다시피해 리온을 그곳에 옮긴 멀린은 기진맥진하여 바닥에 주저앉았다. 리온은 눈을 감은 채였지만 아직 가녀린 호흡이 붙어 있다. 이곳저곳에서 흐르는 피와 갑옷을 우그러트리며 남은 늑대의 이빨자국은, 그때의 강철마저 일그러트릴 만큼의 파괴력을 증명하듯 상처를 압박하고 있었다. 멀린은 압박을 덜어주려 일단 갑옷의 조임새를 풀어 조심스레 벗겨내었다. 그러자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젖은 옷이 섬짓하게 드러났다. 그 일련의 동작이 고통스러웠는지, 리온은 신음을 흘린다.
"리온, 정신 들어요? 다행이다..."
멀린의 그 말에도, 새파랗게 질린 그의 입술은 힘겨운 호흡 외에 아무말도 내놓지 못했다. 멀린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몇번 두드렸다. 그러자 리온은 힘겹게 눈을 치켜올렸다. 은빛으로 물든 그의 눈은,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리온...?"
그 은빛 안광에 움찔한 멀린이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을 때, 리온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닥에 늘어져 있던 손을 올려 멀린을 밀어낸다.
"멀린... 난 괜찮으니까, 가서 사람들을 불러와..."
지독한 갈증이 다시 리온을 덮치고 있었다. 간신히 그 말을 내뱉으면서, 그는 제발 멀린이 그대로 해주길, 그의 곁에서 떠나주길 바랬다. 그 뒤의 희망은 어찌되든 좋았다. 단지, 이대로 그를 곁에 둘순 없었다. 상처때문에 잃은 피 때문인지, 피를 원하는 갈증은 어느때보다도 더 심하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멀린의 온기와 따스한 피냄새. 리온은 차가워지는 자신의 몸에서 끓어오르는 마지막 욕구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멀린은, 그 말을 듣고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은빛 눈동자- 그것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했다. 혼자 일행을 찾으러 나선다 해도 그게 얼마나 걸릴지,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그리고 리온이 부상당해 있는 이 상황에서, 또 다시 그를 혼자 버려두고 가긴 싫었다.
떨리는 손으로 스카프를 풀어내는 멀린의 뇌리에 드래곤의 말이 떠올랐다. 절대, 자신의 피는 안된다는 그 말. 하지만, 지금으로선 선택지가 없었다. 도움을 줄 사람은 없다. 그리고 리온은 바로 앞에서 죽어가고 있다. 내 마법은 그를 살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내 피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떠나려 하지 않고, 그대로 앉은 채 멀린이 스카프를 끌러내는 모습을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던 리온은 멀린이 뭘 하려는지를 뒤늦게 깨닫고 거의 절망적인 기분에 필사적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멀린이 하얀 목덜미를 드러내고, 괜찮다는 듯 몸을 숙이며 조심스레 자신을 끌어당기자 리온은 힘없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기대었다. 신선한 피의 향기가 아찔하게 풍겨온다.
"리온... 괜찮으니까... 어서..."
리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었다. 하지만 계속 주저한다. 그의 피를 취한다면 이 빠져나간 생명력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걸 리온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지금껏 태연히 행동했지만, 죽음은 어쩔수 없이 두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그 유혹은 강렬했다. 하지만 끝까지 남은 이성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런 짐승같은 일을 하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싶은 것인가. 같은 인간을 물어뜯고 그 피를, 그것도 멀린의 피를 마신다고? 아득해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리온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렇지만 어느덧, 그 사고는 완전히 멈춘다.
멀린의 부드러운 피부는 리온의 날선 이를 별 저항없이 받아들였다. 아픔때문인지 멀린의 몸이 움찔하는 것까지 세세히 느껴진다. 그리고 이어 입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따스하고 향긋한 피가, 리온의 몸을 덥히기 시작했다.
리온의 위로 엎드린 채로 몸을 내맡기고 있던 멀린의 몸을, 리온이 무의식적으로 안아 더 가까이 끌어당기자, 멀린은 힘없이 떨어져 있던 손을 올려 리온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목덜미에서 저릿하고 묘한 아픔이 계속 이어지고, 피를 빨아내는 소리와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서 느껴진다. 어느정도 그 행위가 계속되자 리온은 기운을 되찾은 듯, 가벼운 동작으로 멀린을 안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 그때까지와는 반대로 그를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는 한층 더 힘주어 피부를 파고들었다. 그 둔통이 선명히 느껴졌지만, 멀린은 마치 포식자에게 사로잡힌 작은 동물처럼 비명소리 하나 지르지 못했다. 리온의 긴 곱슬머리가 뺨을 간지럽히고, 그가 피를 빨아들이려 입을 움직일때마다 그의 까슬한 수염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는게 느껴진다. 점차 제 온도를 되찾는 리온의 체온은 뜨겁게까지 느껴졌다. 멀린은 오싹한 기분과 두려움에 온통 휘감겨 몸을 잘게 떨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이를 사려물었다. 리온의 옷자락을 그러쥔 손에 힘이 들어가 바들바들 떨린다.
"읏..."
자신의 품안에서 조금씩 전율하는 멀린을 더 감싸안으며, 리온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미칠듯이 황홀한 체취가 밀려들어온다. 행위가 주는 예상치도 못한 쾌감에 리온은 거의 당황할 지경이었다. 그냥 이대로, 언제까지고 멀린에게 몸을 묻고, 쉬고싶은 충동이 밀려온다. 따듯하고 보드라운 이 육체 안에서...
하지만 얼마간 지난 후, 멀린의 신음소리와 고통을 참는 듯 자신을 붙든 손을 눈치챈 리온은 간신히 자아를 되찾았다. 그는 황급히 멀린의 목에서 떨어졌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피가 하얀 목덜미에 난 섬득한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뒤이어 몸을 완전히 일으킨 리온이 상태를 살피려 그를 내려다보자, 멀린은 눈을 감은 채 새하얀 얼굴을 살짝 옆으로 돌린 상태 그대로, 가는 호흡을 연신 내뱉고 있었다. 참기위해 사려문 듯한 입술이 새빨갛게 부어오를 정도로 앙다물려있다.
이제 리온의 몸 안에는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힘과 생명력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이, 이제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고, 그동안의 고통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어렴풋한 절망이, 작지만 확실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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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입구 너머로 시야를 가릴 정도로 내리던 눈이 어느정도 그치자, 리온은 조심스레 동굴 밖으로 나와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도 근처에 늑대들의 기척은 없다는 걸 확인한 그는 멀린을 조심히 업어들고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곧장 일행을 만나게 된다면 다행이지만, 안 그럴 경우에는 길고 힘든 길이 될 터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멀린의 피 덕분인지 그동안은 생각도 못 할 정도로 힘이 감돌고 있다는 것이다.
거의 그쳤다지만, 조금씩 흩어져 내리는 질척한 눈송이가 그의 얼굴에 떨어져 순식간에 녹아 흘러내렸다. 여전히 하늘에는 검붉은 구름이 잔뜩 끼어있고, 숲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 방향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둠은 짙게 내려앉아 있지만, 리온은 멀린을 단단히 붙잡아 올리고는 한걸음 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발걸음을 옮겼을 때, 리온의 바램과는 달리 늑대 몇마리가 멀린의 피냄새를 맡았는지 저편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속에서 섬득하게 빛나는 안광에 몸을 긴장시키며 리온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몇마리가 더 남아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미 동굴을 나선 이상, 일단 저것들을 퇴치해야 나아갈 수 있을 터. 지팡이처럼 땅을 짚고있던 칼을 들어올리며 리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빽빽한 나무 사이사이로 늑대들의 회색 털이 드러난다. 리온은 마음의 준비를 하며 그것들을 마주해 노려본다. 그러자 의외로, 늑대들은 아까와는 다르게 잔뜩 견제하는 모습으로 주위를 몇번 맴돌 뿐이다. 리온의 눈은, 그도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어둠 속에서 이제 투명할 정도로 선명한 은빛을 내비치고 있었다.
한동안 거의 겁먹은 듯한 눈빛으로 리온을 살피던 늑대들은, 몇번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긴 울음소리를 내고는 이내 숲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