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lin-리온/멀린] 밤의 주민 (2/?)
확인한다고 확인해도, 이상하게 올려놓고 보면 고칠부분이 더 잘 보여요
그러니 일단 올리고 다음에 수정이라는 무책임한 전략을 쓰기로 했습니다 -,.-;;;; 이..일단은...
2.
어둠도 삼켜버릴 듯한 짙은 검은색의 이 약물의 제조법은 그 뒤로 극히 소수에게만 전해져 내려왔다. 일정기간이 지나면 몸이 붕괴되는 한계를 가진 이 약물의 성능을 개선해보려 많은 이들이 시도했지만, 그들은 각자의 욕심의 댓가를 받고 사라져갔다. 그것이 도덕률마저 무시하고 인간의 도를 넘은 힘을 원했던 그들에 대한 처벌이자 그들의 한계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이 약의 제조를 제한하고, 검증된 이에게만 주기로 결의한다. 그 파괴적인 효과 아래서도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 고귀한 성품을 가진 이에게만 이 저주받을 기회는 허용될 것이다.
드루이드의 구전 모음집, 제4장, 나이트워커 中 발췌
훈련장에 우렁찬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시발의 기합 소리는 언제 들어도 호쾌했고, 기합 만큼이나 그는 늘 힘이 넘친다. 그를 상대하게 되는 기사들은 언제나 땀을 쪽 빼야 했지만, 시원시원한 그의 모습을 보는 건 퍽 즐거운 일이었다. 이전에 차례를 끝낸 엘리얀은, 조금 건방지다 싶은 방만한 자세로 무기스탠드에 기대서는 퍼시발이 커다란 동작으로 허우적댈 때마다 콧방귀를 뀌어대고 있다. 그런 엘리얀을 바라보던 멀린은, 그가 이전 퍼시벌을 바라보며 빈정거리듯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또 피식 웃어버렸다. 저 무식한 힘이라니-저녀석은 뇌로 가야했을 근육이 다 몸으로 간 게 분명해!
엘리얀은 기사들 중에서도 키가 작은 편이어서 특히 퍼시발의 놀림을 받곤 했는데, 본인은 전혀 굴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몸집이 작은 것을 벌충하듯 몸이 재빨랐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게 서로를 놀려대며 우정(?)을 과시하는 둘을, 가웨인은 '귀여운 곰과 고양이 한쌍'이라며 흡족하게 웃으며 바라보곤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아서는 옆에서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고.
멀린으로선 그 모든 것이 즐거웠다. 아서가 왕이 되고, 새로이 들어온 기사들은 배경도 가지가지에 성격도 제각각이었다. 그럼에도 부딪힘 하나 없이 그들은 잘 어울렸고, 서로를 아끼는 동지애도 상당했다. 아서가 그만큼의 구심점이 되어주고 있는 덕분일까? 어쨌든 그들은 실력도 두말할 데 없었고, 멀린에게도 스스럼없이 잘 대해주었다.
그렇게 많은 것이 변해온 것이다. 새로운 왕에, 새로운 기사들. 갑자기 멀린은 자신이 카멜롯에 온 지도 꽤나 되었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느끼며, 멍하니 처음 이곳에 왔던 때를 떠올렸다.
어리둥절할 정도의 도시의 활력에 들뜬 데다 갓 왕자의 시종이 된 멀린이 아직은 실수 연발이었던 그 때. 모든게 새롭고 흥미로웠지만, 그것은 모든게 만만치 않았다는 것과 동의어였다. 아직 오냐오냐 자란 철부지 왕자였을 뿐이었던 아서의 괴롭힘과 더불어, 갑자기 왕자의 시종으로 일약 출세한-그걸 출세로 불러야 한다는 사실을 멀린은 아직도 어이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멀린에게 몇몇 시샘과 의심의 눈길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때의 기사들로 말할 것 같으면, 아서가 왕이 된 지금과는 달리 그당시엔 기사가 되는 조건이 엄격하게 귀족가의 자제들로만 한정되어 있었기에 멀린이 겪는 수모(?)는 대단했다. 일단 개중 몇 사람좋은 기사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고 고백해야할테고, 수모라고 하기엔 그저 완벽한 무시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지금 생각하면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만나는 모두에게 웃으며 인사하고 서로를 속속들이 알아왔던 시골 생활에 익숙했던 멀린에게 그런 '무시'는, 갓 새로운 환경에 의기소침해진 그를 더 의기소침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응해버렸지만.
리온은 그런 '왠지 접근하기 어려운 기사들' 중 하나였다. 어렸을때부터 왕자와 친구처럼 함께 자라며 오랜시간 기사로 충성해왔다는 그는 그래서인지 언동이며 몸짓 하나마다 기품이 배어 있었다. 그래, 멀린식의 표현을 빌리자면-딱딱했다. 게다가 늘 왕궁에서 마주치는데도 인사한번 변변히 못 해본데다, 자신이 작은 실수라도 하면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이 살짝 찌푸려지곤 했다. 애초에 나이도 자신보다 훨씬 위-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꾸지람 듣는 기분이 되버리는 것이다.
분명 이 사람도 내가 왕자의 시종에는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구나- 하고 멀린은 짐작했다.
그런 의심이 풀린 것은 일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의 일이었다.
그해 여름은 꽤나 무더웠지만, 화창하고 생기넘치는 여름이기도 했다. 아서는 오랜만에 기사들 몇을 데리고 기분전환 겸 사냥을 나섰고, 그건 늘상 있는 일이기에 멀린도 서둘러 준비를 마쳤다.
정해진 곳에 도착한 그들은 말에서 내려, 이따금씩 몰이를 해가며 사냥을 계속했다. 그날따라 자그마한 동물들은 여기저기 많이 보였고, 이미 풍족하게 사냥감을 확보한 그들은 제법 명랑해져 있었다. 멀린은 죽은 동물들을 보는걸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모두가 즐거워하는 분위기에 덩달아 신이 나고 있던 참이었다.
한참 그렇게 걸어가던 도중, 아서가 멈추라는 손짓을 하고 주위를 살폈다. 무언가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지만 무엇인지는 풀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아서는 신중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시위를 놓자-
툭, 하고 화살은 어이없게 이상한 곳으로 날아가 떨어지고, 시위는 힘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보아하니, 활끈 한 쪽이 풀린 것 같았다. 그 소리에 풀숲에서는 놀란 야생 꿩 한 마리가 부리나케 뛰어나와 도망쳤다.
아서는 활을 한번 살피고 뭐라뭐라 투덜거리고는 대뜸 멀린을 돌아보며 외쳤다.
"멀린!! 여분 활 있지? 이리 가져와!"
멀린은 예상치도 못한 왕자의 요구에 당황했다.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래서 활을 여유있게 준비해온다는 발상따위 하지 못했었기에...
"아... 활이요? 음...활이라..."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려, 아니, 혹시라도 기적처럼 따라왔을 활을 찾아보려 짐을 뒤적거렸지만 있을 리 없다. 멀린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보아하니 또 한소리 듣겠구만- 그럴거 같았으면 진작 챙기라고 말이라도 해줘야 할 거 아냐!
속으로는 욕을 해도 앞에서는 안될 말이다. 멀린은 몇번 헛기침을 하고는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어서는 몸을 돌렸다.
"전하... 그게, 활이..."
"뭘 궁시렁거려- 설마 준비 안해왔냐?"
아서가 눈썹을 찌푸리며 장비가 실려있는 말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하자, 멀린은 점차 울상이 되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때 옆에서 예상외의 사람이 다가와, 멀린은 흠칫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온 경?
멀린의 옆에 선 그는 아서가 완전히 가까히 다가오자 공손히 손에 든 것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전하"
그의 손에 들려져 있던 것은 활 하나. 잘 길들여져 모양좋게 휜 그 활에는, 리온의 가문 문장인 황금 늑대가 수놓아진 천이 손잡이에 덧대여 있었다- 그가 쓰던 개인물품이 분명했다. 아서는 그걸 받아들고 한번 훑어보더니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리온, 이건 네 거 잖아?"
그러자 리온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이더니, 조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가 아까 실수로 공용무기고에서 준비해온 활줄을 하나 끊어버려서 그에겐 여분이 없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진짜냐는 듯 바라보는 아서의 눈길에 멀린은 움찔했지만 그의 눈길은 이내 거둬졌다. 대신 아서는 웃으며 고맙다는 말과 함께 활을 이리저리 보며 몇가지 칭찬을 하고는, 리온도 더 앞으로 나오라 권유하고 다시 앞쪽으로 돌아갔다. 멀린은 안도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서가 짜증내는거야 그냥 들어주면 그만일 일이었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실수하는 걸 더이상 보여주고 싶진 않았었다. 멀린은 리온에게 몸을 돌려,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는 그런 멀린을 한번 흘깃 바라보고는, 시선을 아서가 걸어간 앞쪽으로 던지며 말했다.
"여름철엔 활줄이 느슨해져 풀려버리는 일도 종종 있으니까... 만일을 대비해 하나 더 가져오는게 좋아."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찮아. 별거 아니니까- 다음부턴 기억해둬."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몇번 도닥여주는 손길에 놀라 멀린이 그를 올려다보자, 리온은 보일듯말듯 미소를 짓고는 다시 성큼성큼 걸어가버렸다. 그건 상상도 못 했던, 리온이 멀린에게 보여준 첫 미소였다.
그때 이후로 리온은 더이상 멀린에게 있어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다. 고마운 마음에 줄기차게 인사를 건네고, 틈 날 때마다 이야기를 걸고 하는 과정에서, 멀린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리온을 잘못 평가하고 있었는지 알았다. 그도 그저 멀린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랐을 뿐, 사실은 자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뒤로도 실수라도 하면 말없이 수습해주곤 했고, 그러고나면 괜찮다는 듯 머리를 도닥여주는게 멀린은 참 좋았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고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리온은 더없이 믿음직한, 마치 친형 같은 존재가 되어주었다.
멀린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대련을 바라보고 있는 리온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격하게 다문 입매, 온화한 녹색 눈동자와 곱슬거리는 진한 금발- 몇년 전 그때와 비교하면... 머리카락이 좀 길어졌다고 해야 하나? 그의 어른스러운 인상은 처음부터 한결같았기에 멀린은 시간이 지나면서도 그다지 큰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그는 기사로서도 한 성인으로서도 점점 완숙한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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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리온의 차례가 되었다. 앞으로 나선 그는 상대인 가웨인과 검을 맞대 예를 표했다. 그리고 늘 어딘가 짖궂어보이는 가웨인의 웃음에 답하듯 씩 웃어보이고는 대치해 섰다.
가웨인의 검술은 기사가 된 후 많이 다듬어졌다고는 하지만 그의 습관과 성격을 반영하듯 여전히 변칙적 공세 일색이었다. 그래서 누구와 대련해도 예측하기 힘든 재미있는 승부가 된다. 게다가 그게 완전히 반대 격이라 할 수 있는, 정통파 리온과의 대결이라면- 검술에 대해 잘 모르는 멀린이 보기에도 흥미로운 한판이 되고는 했다.
가웨인은 그가 애용하는 하이가드 포지션-일명 매 자세로 칼을 조금 높다싶은 자리에 두고 방어자세를 취했다. 거기에 대해 리온은 여전히 몸 중앙을 가드하는 기본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한동안 서로를 살피듯 맴도는 둘 사이에 공격은 쉬이 시작되지 않았다. 가웨인의 자세는 일견 헛점이 많아 보이지만 내려치기로 어떤 시작도 막아낼수 있는 자세- 모두들 그걸 알고 있기에 리온이 어떤식의 공격을 취할 것인지 기대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역시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가웨인- 그는 언제나 공격에 대해서는 참을성이 조금 부족했다.
위쪽에서 옆을 노리고 내려오는 검을 예상했다는 듯 받아낸 리온은 가웨인이 자세를 흐트러트린 틈을 타 앞으로 파고들었다. 가웨인도 역시 그걸 예상했다는 듯 서둘러, 하지만 여유롭게 웃으며 그것을 받아친다. 몇번이고 칼을 맞대는 동안 처음의 몇 합 정도는 어느정도 예상할 수 있게 된 모양이다. 그 뒤로 몇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아무리 대련이라지만 진짜 검으로 하는 연습은 역시 매번 보는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
거의 비슷하게 칼을 주고받던 둘 중 가웨인이 마음을 먹은 듯 힘을 실어 내려치자, 카캉- 하고 금속이 부딫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린다. 대응하여 힘을 겨루듯 그것을 막아내고 있던 리온의 손이 어느순간 가늘게 떨리는 듯 싶더니, 결국 검을 밀어내지 못하고 빗겨내리고는 재빨리 뒤로 빠진다. 그러고보면 검의 흔들림이 평소보다 잦은 것 같지만...아직 다른 흐트러짐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평소의 컨디션이 아닐 거라는걸 아는 멀린으로선 그 흔들림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크게 호흡을 한번 가다듬은 리온은 가웨인의 다음 공격을 견제하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리온, 평소부터 소심한건 알았지만 오늘따라 방어 일색인데?"
가웨인이 도발하듯 던진 그 말에도 리온은 마치 못 들은 것처럼 반응이 없었지만, 몇발자국 뒤, 갑자기 공세로 전환해 찔러들어갔다. 이어 그것을 받아치는 가웨인과의 주고받음이 한동안 이어진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리온의 표정이 흐려지는 것을 멀린은 놓치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리온의 입에서 억눌린 기합 소리가 짧게 울렸을 때, 그는 마음을 정한 듯 뒤이어 단호한 동작으로 칼을 내뻗는다. 일격을 노린 공격이다.
하지만 가웨인이 그걸 막아내려 간신히 리온의 검을 쳐내듯 휘둘렀을 때,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리온은 칼을 놓치고 말았다. 멀린의 입에서 의식하지 못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광경에 대련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칼이 멀찌기 날아가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만이 어색하게 울렸다.
의외의 상황에 당황한 듯, 가웨인은 멈춘 그 상태로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침묵이 깔린 분위기 속에서, 곧장 모두의 당황한 시선이 리온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 않게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자신의 칼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가웨인에게 몸을 돌려 장난스러운 말투로 소리쳤다.
"가웨인, 무식하게 힘 센건 알았지만 오늘은 더하네. 좀 조절해가며 하라고!"
가웨인은 리온의 그 말에 잠시 벙찐 표정을 했지만,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한다.
"아아~어제 하루 술집 출근을 쉬었더니 힘이 남아 돈 모양이네. 티 났어? 으하하"
그리고 가웨인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웃자 기사들은 그제서야 웃음을 터트렸다. 야유와 농담이 날아들고 훈련장은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리온도 함께 웃다가 자신의 패배라고 선언하고는 다시 아까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 모두가 별다른 이상함은 느끼지 못 한 것 같았지만 가웨인만은 한동안 묘한 표정으로 리온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멀린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작은 해프닝은 곧 수습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리온의 옆모습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분명 아까의 표정에서는 고통이 엿보였다. 약효가 떨어져가고 있는 것일까...... 멀린은 그가 어떤 고통을 참아내고 있을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다만 초조한 마음으로 훈련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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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가 정식훈련시간의 끝을 알리자, 리온은 그제서야 잔뜩 굳어있던 몸의 긴장을 조금 풀었다. 아까부터 완전히 약기운이 떨어진 모양인지 머리는 다시 타들어가듯 욱씬거리고 있었다. 진통제를 아껴보려 조금 덜 마신게 화근이었는지- 분명 그정도쯤이야 괜찮을거라 생각했는데, 여지없이 지속시간이 짧았다. 대련에 들어가자마자 찾아들던 고통에, 어이없게도 칼을 놓치는 기본적인 실수까지 저질렀다. 그래도 그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리온은 자신의 물품을 놓았던 테이블로 곧장 걸어가 조심스레 약병을 찾아들었다. 해가 질때까지 몇시간 남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아까워 할 여유가 없다. 그는 아무도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걸 확인하고는, 양을 가늠할 새도 없이 입안에 나머지를 털어넣었다.
그리고 벤치에 걸터앉아 조금 기다리자, 약효보다 먼저 안도감이 찾아들어 리온을 다독였다-이제 곧 괜찮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겨우 불붙은 듯 뜨겁던 머릿속이 조금 식어들어 어느샌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든 옷 안으로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리온, 이제 좀 쉬어요."
멍하니 앉아있던 리온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땀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그곳에는 어느새 다가온 멀린이 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수건을 받아든 그는 이마며 목에 맺힌 땀을 대강 훔쳐냈다. 그런 그를 향해 다시 멀린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머지 정리는 제가 할테니까- 일찍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왠일로 내 걱정을 다 해줘, 멀린? 난 괜찮은데..."
리온이 웃으며 대뜸 그렇게 말하자, 멀린은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 뿐, 평소같으면 무슨 말대꾸라도 할 법한 그인데, 그저 망설이듯 서 있을 뿐이다. 리온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뭔가 할말이 남은 것 같은 멀린을 기다리듯 바라보았다. 멀린은 그런 리온의 시선에 부담을 느꼈는지, 헛기침을 한번 하고 다시 어색하게 웃어보이고는 손에 줄곧 쥐고 있었던 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 혹시 몰라서 가져왔어요."
리온은 멀린이 건넨 것을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가이우스에게 부탁하곤 했던 진통제다.
결국 가이우스가 멀린에게 말한 모양이구나-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았기에 되도록이면 가이우스가 그만 알고 있기를 바랬다. 가이우스의 조수나 마찬가지로 일하는 멀린이니, 언젠가는 그도 알게 되겠지 하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리온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멀린을 올려다보고는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내민 멀린의 손을 살며시 밀어 사양했다.
"고마워. 하지만 이제 많이 나아졌어... 이전에 받은 것 만으로도 충분해."
리온의 그 변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멀린의 눈이 걱정으로 흐려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늘 그랬다. 멀린은 거짓말이 서툴렀고 그건 그의 감정을 다 내비치는 눈 탓이 컸다. 그의 큰 눈망울은, 언제나 솔직하게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흐려지거나 밝아지거나 했다. 그 눈을 바라보던 리온은, 씁쓸한 마음에 다시 모른 척 고개를 내리고 칼을 정리했다. 뒤에 멀린의 기척은 아직도 남아 리온을 신경쓰이게 했지만 그는 최대한 여유있게 칼을 칼집에 갈무리하고, 주변을 정리해 들고는 일어났다. 그에, 기다리고 있던 멀린은 멈칫하며 조금 물러섰다가 다시 옆으로 따라왔다.
"그럼 다행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받아둬요."
그렇게 말하며 멀린은 이번엔 아예 리온의 손을 잡아 그 위에 약병을 쥐어주고서야 놓아주었다. 그 행동에 뭐라 대꾸하려 입을 벌린 리온에게,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인 그는 몇발자국 물러서더니 말했다.
"그리고, 저녁 먹은 뒤에 괜찮으면 집무실로 좀 와달라는 가이우스의 전언이에요. 시간 되실 때 오세요."
마지막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보인 멀린은 이제 등을 돌려 성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리온은 그런 멀린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손을 펼쳐 위에 놓여진 것을 살폈다.
이제는 익숙한 모양의 약병 하나.
리온은 금새 그것을 다시 감싸쥐어 눈 앞에서 지웠다. 골치아픈 현실이 사라지자, 멀린의 체온이 아직 병에 남아있는듯한 착각만이 손 안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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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순찰까지 끝마친 리온은 성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목표로 한 곳은 가이우스의 집무실이 아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사람의 인적이 드문 복도가 나온다. 왕궁 도서관이 있는 복도는 언제나 한산했다. 아마 오늘도 안에서는 사서만이 백일몽 속에 잠긴 채 꾸벅거리고 있을 것이다.
리온은 점점 조용해지는 복도를 걸어가며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결국 멀린도 알아버렸다는 건, 가이우스나 멀린 둘 다 꽤나 걱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일 테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두통 정도니 그렇게 둘러댈 수 있겠지만... 과연 언제까지 이렇게 끌고갈 수 있을지?
그날 밤, 멀린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버린 뒤로는 더더욱 그에게 이상한 징후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고집이라면 고집이고 쓸데없는 자존심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멀린 앞에서만은 언제나와 같은 자신의 모습으로 있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멀린에게만은...
그래, 생각해보면 리온에게 있어 멀린은 처음부터 이색적인 존재였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꼬마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서는 아서를 구하는가 싶더니, 금새 그의 시종이 되었다. 처음에는 물론 실수 투성이에, 아슬아슬한 말투 투성이었다. 뭐 하나 성에서 만나온 사람들하고는 다르다. 저렇게 예의없고 제 고집이 센 녀석이 언제까지 시종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리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탐탁잖게 생각했지만 멀린은 꽤나 끈질기게 자기 일을 해냈고, 점차 그동안의 누구보다 더 충실한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넘어지고 풀이죽어도 다음날이면 금새 회복해서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바삐 뛰어다니는 그런 모습에 더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느새인가 리온도 그를 인정했다. 그가 선량하고 좋은 마음에서 하는 거라면, 이왕이면 빨리 적응하게 도와주어야겠다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도와주기 시작했을 뿐- 자신을 좀 어려워하는 듯한 멀린의 태도가 바뀌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 몇번의 도움 정도에 멀린은 그동안과는 달리 완전히 경계를 푼 태도로 자신에게 달려오곤 했다. 그리고 그건 조금, 리온을 기쁘게 만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해 주고, 알아준다는 것은 더없이 기쁜 일이다.
리온은 자신이 머리를 도닥여줄 때마다 해맑게 웃곤 했던 멀린의 천진한 표정을 떠올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런 모습을 못 본 것도 동시에 떠올랐다. 요즘들어 본 얼굴이라고는 온통 걱정스런 얼굴에... 무서워하던 얼굴-
어느덧 도서관 앞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서자 압도적일 만큼의 서가와 커다란 공간이 눈 앞에 펼쳐졌다. 늦은 오후의 붉은 석양만을 받아 서가는 따스한 금빛으로 빛나며 마치 고대의 유물이라도 품고 있을 듯이 신비롭게 보였지만, 아마 그 빛도 오래지 않아 사라질 것이다. 리온이 안으로 걸어들어가자, 예상대로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졸고 있던 사서 조프리가 부스스 깨어나 멋쩍게 웃으며 리온을 반겼다.
"리온 경, 또 오셨군요. 이런 시간까지 열심이십니다 그려"
"조프리, 졸리면 더 자고 있어도 돼요. 오늘도 그냥 조금 둘러만 보다 갈 거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전 그냥 책을 읽다 깜박 잠든 것 뿐...흠흠! 그나저나 오늘도 드루이드 관련 책을 찾으십니까?"
리온은 그런 조프리에게 슬쩍 웃어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람좋은 인상의 늙은 사서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흰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잠깐만 기다려보라는 듯 손을 들어보이더니, 외알 돋보기 안경을 들고 자신의 옆에 있는 책 더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느릿한 그 움직임을 끈기있게 기다리자, 그는 큼지막한 책을 하나 낑낑거리며 들어올려서는, 다시한번 확인하듯 살펴보고는 내밀었다. 꽤나 오래된 듯 빛이 바랬지만, 짙은 녹색의 양장을 한, 투박하지만 제법 질 좋은 재료를 사용해 만든 듯한 두터운 책이다. 제목 끝부분이 많이 지워지다시피 했지만 아직은 읽을만 했다.
[드루이드의 구전 모음집]
리온이 시험삼아 책을 한번 펼쳐들자, 낡은 책 답게 예외없이 잔먼지가 흩날려 독자를 반긴다. 먼지를 걷어내려 손을 휘젓는 리온에게 사서의 설명이 이어졌다.
"원래 드루이드들은 문서로 기록을 남기는 습관이 없는지라 자료가 굉장히 드문 편이지요. 제가 알려드린 서가에 꽂힌 문서들은 이미 왠만큼 다 보셨을테고, 혹시 찾으시는 내용이 있을지 모르니 읽어보시죠."
"근데 이건 드루이드 관련 서가에서는 못 보던 책인것 같습니다만...?"
"아...... 그건 책장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겁니다. 워낙 이곳 도서관은 넓은 데다, 어디에 뭐가 꽂혀있는지 관리하기도 힘들 만큼 책들이 많으니까요. 원래라면 사서 네다섯은 더 있어야 할 겝니다. 휴..."
변명하듯 그렇게 말한 그는 뭔가 투덜거리듯 몇마디를 더 중얼거렸고, 리온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줄수밖에 없었다.
금새 해가 완전히 저물어 어렴풋한 어둠이 내리자, 사서는 그를 위해 초를 켜주었다. 멀찌기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리온은 책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목차조차 없는 그 두터운 책을 어디서부터 손대야할지 막막했던 그는 그저 마음내키는대로 앞부터 적당히 뛰어넘어가며 읽어내려갔다.
어느정도 공식 문서들로 익숙한 내용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생소한 이야기들이 더 많았다. 그들의 관습과 행사, 제사의식 등이 그들만의 관점으로 서술되어 내려간다. 그렇게 한동안 읽어가던 리온도 슬슬 지겨워지려는 참에, 어느 한 부분의 부제목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이트 워커
밤을 걷는 자, 밤의 주민...인가? 리온은 그동안 본 어느 이야기보다 가장 관련이 있을 것 같은 그 제목에 어떤 강한 예감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는 집중해 읽어내려가기 시작한다.
나이트 워커는 우리 선조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존재들이다. 그러나 절대 동맹을 맺을만한 종족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더욱이 사람인지도 미심쩍다. 겉모습은 인간과 흡사하다고 하지만 그들에게서 살아남은 자는 극히 드물었기에 그 생태에 대해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다.
리온은 정신없이 읽어내려간다. 밤에 활동하며, 피를 찾아 습격하는 성질... 드루이드 노파가 말했던 것과 비슷했다. 게다가 책에 의하면 드루이드들은 그들의 기술로 나이트 워커의 속성을 부여하는 약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검은색 약- 이제 심증은 완전히 굳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 이렇다할 수확은 없었다. 단지 몸이 붕괴되는 한계는 극복하지 못한 채 남아있다는 그리 희망적이지 않은 내용 뿐인데다...
다시한번 마지막 줄까지 샅샅히 읽은 리온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약이 어디서부터 유래된 것인지, 그리고 더 찾아야 할 실마리를 얻기는 했지만 기대한 것보다는 그리 많은 것이 적혀있지 않았다. 다만 새로이 확인 된 것은-언젠가 끝이 반드시 오리라는 것.
리온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힘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군, 단지 그때의 죽음이 조금 연기된 것 뿐이란 말이군...
전장에서의 죽음 대신, 언제 비참하게 쓰러질지 모르는 죽음을 선택한 셈이 되었다. 그건 어찌되든 좋았다. 어짜피 한번 죽은 목숨이니까-
하지만... 리온은 한 문장을 다시 읽으며 생각했다. 고귀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 정말 그 드루이드 노파는 자신을 그렇게 봤던 걸까? 그렇다면 그건 고마운 일이지만 지나친 과대평가였다. 앞으로 있을 일들을 과연 자신이 견뎌낼 수 있을 것인지, 리온은 자신이 없었다.
가능하면 그녀를 다시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기회가 생겨 그 근처까지 다시 가보았을 때도 전혀 이렇다할 자취를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 약을 받은 건 이미 꽤나 오래 전의 일이니... 그들을 쉽사리 다시 만난다는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아직은 모른채 견뎌야 할 것이 많이 남은 모양이다.
초를 불어 끈 리온은 마음을 다잡듯 여유를 두어 잠시 어둠 속에 서 있다가, 다시 사서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를 깨우지 않도록 주의하며 책을 조심스레 올려놓고는 발소리를 죽여 도서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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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저녁을 먹고난 뒤로 쭉 책에 파묻혀 있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책을 읽어내려가는 멀린에게 보다못한 가이우스가 한 마디 건넸다.
"멀린, 그건 이미 본 책이잖니. 우리가 확인할 수 있을 만큼은 다 해 봤다."
"혹시나 해서요-"
그렇게만 대꾸하고 멀린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이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약을 찧던 일을 계속했다. 그들에게는, 기다리고 있는 방문자에 대한 걱정을 제외한다면 지극히 평화로운 저녁 시간이었다. 가이우스는 일찌감치 바쁜 일들을 다 끝마쳤으며, 멀린은 아서가 그웬과의 '로맨틱한 둘만의 밤'을 즐기고 싶다기에, 넌더리를 내며 필요한걸 다 준비해 주고는 일찍 돌아와 있던 참이다. 쓸데없이 안어울리게 로맨틱한 걸 강조하는 아서는 참 꼴사나웠지만-이럴 땐 오히려 자유시간이 늘어서 다행인 셈이려나?
한참 책에 박혀있던 멀린은 역시 해결되는게 없다고 느꼈는지 불만족스러운 앓는 소리를 내고는 책을 탁 덮었다. 그리고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가이우스... 왜 드루이드들은 그들을 두려워해서 말살시켰으면서도 또 그런 약을 만든 걸까요..."
가이우스는 멀린의 그 푸념같은 질문에 손을 멈추지 않은채 대답했다.
"뻔한 얘기 아니겠니. 인간은 누구나 자기보다 나은 것이 되려는 욕심을 갖고 있는거란다. 그거 말고도 그런 예는 주위에 얼마든지 있지..."
멀린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더 강해지고 싶고, 더 나은 인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은 누구에게나 있겠지. 그리고 그 바램은, 가끔 안좋은 수단까지 택해 이빨을 드러내기도 한다. 다른 이를 죽인다던지, 속인다던지, 전쟁을 일으킨다던지......
멀린은 이것저것 생각해보다가, 그 모든 부정적인 일들을 떨쳐내려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지만 조금 우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보셨다는 그 짧은 몇 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잖아요. 분명 다들 그런 식으로..."
멀린은 낮 동안 지켜본 리온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한숨섞인 말을 이었다.
"힘들어했을텐데..."
그런 멀린을 흘긋 바라본 가이우스는, 잠시 손을 멈췄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어왔고, 견뎌내기 힘든 일도 분명 많았다. 그때마다 멀린은 고민하고 또 슬퍼해 왔다. 그런 큰 능력과 운명을 가진 아이치고는 가혹하리만큼 마음이 여리고 선한 멀린이었다. 특히 이번 일은... 멀린에게 꽤나 큰 영향을 주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리고 가이우스는 언제나처럼, 자신은 그에게 해줄 수 있는게 많이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멀린.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물건이기는 하구나..."
그 뒤 이어진 침묵 속에서 둘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 시간을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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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사각사각하고 가이우스가 작업하는 소리만이 이어지던 중, 이윽고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멀린은 책을 대강 던져버리고는 후다닥 일어섰다. 들어오라는 가이우스의 외침에 평상복 차림의 리온이 안으로 들어와 간단히 인사를 건넨다.
"가이우스, 절 부르셨다구요?"
"그래, 일단 이리 와 앉게나"
가이우스는 일단 그를 불러 앉혔다.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는 리온에게 가이우스는 '의사로서의 의무' 때문에 불렀다며 리온의 얼굴 여기저기를 살피고 맥박 등을 짚는둥 한동안 부산을 떨더니, 늘상 묻는 것부터 질문하기 시작했다. 약은 어땠는지, 효과는 있었는지 등등.
한동안 얌전히 가이우스가 시키는대로 몸을 내맡기던 리온은 그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다.
"약이 잘 듣더군요, 가이우스. 두통도 이제 많이 나아졌습니다... 횟수도 부쩍 줄었구요."
그 말에 가이우스는 조금 눈썹을 치켜뜨고는 멀린을 바라보았다. 멀린도 놀란 표정으로 가이우스를 한번 바라보고는, 리온을 돌아보았다. 여태까지 관찰해온 바에 의하면, 아마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 둘의 미심쩍다는 반응에도, 리온은 여전히 담담했다.
당연히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이미 리온의 피로 확인까지 마친 뒤다. 피가 은색으로 반응한다는 기묘한 현상을 그저 지어낸 이야기라고 보는게 더 가당찮은 말이었다. 그런 이상, 그저 평범한 약들만 처방받은 리온이 그걸로 상태를 호전했으리라고는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쉬운 거였으면 진작 드루이드들이 그 약으로 세상을 정복하고도 남았겠지.
왜 아니라고 하는 걸까- 멀린은 초조한 마음에 눈살을 찌푸렸고, 가이우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뜸을 들이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솔직히 이야기하도록 하지. 자네 증상으로 봤을 때, 뭔가 하나 짚히는게 있어서 말인데... 혹시, 나이트 워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가?"
리온은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곧이어 고개를 저었다. 가이우스는 그의 반응을 살피고는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아니면 최근에 특이한 약을 먹은 적이 있다던가... 검은색의..."
리온은 다시 잠자코 고개를 젓는다. 가이우스는 이상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난 그게 두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그리고 만약 내 판단이 맞다면, 두통은 계속 악화될 거고... 그러니, 뭐 이상한 점이라던가...짚이는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말해보게나. 내 힘닿는 데까지 도울 테니까."
"......딱히 생각나는 건 없습니다만..."
리온은 여전히 말을 아꼈다. 멀린은 그의 어떤 반응도 놓치지 않으려 그를 지켜보았지만, 그의 표정은 미묘했다. 조금은 무심하다 싶기까지 한 그의 건조한 녹색 눈동자가 가이우스를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그거, 치료방법은 있습니까?"
가이우스는 그 말에 움찔하는 듯 했다. 아직까지는 멀린도 그도 그다지 아는게 없었다. 이제 겨우 정체를 알게 되었을 뿐이고, 게다가 그 현상이 굉장히 희귀한, 고대의 것이라는 것만을 알아낸 참이다. 어떻게든 희망이 될 말을 해 주고 싶은게 의사의 마음이었지만...
"...아직까지는 모르지만, 찾고 있는 중일세."
가이우스가 솔직히 그렇게 말하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리온은, 갑자기 그때까지와는 다르게 씨익 웃어보이며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말씀하시는 걸 들어봐선 아마 이번엔 가이우스가 틀린 걸지도 모르겠는데요. 두통도 이젠 많이 나아졌으니까요."
이거면 됐냐는 듯, 멀린과 가이우스를 번갈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언제나와 같이 온화하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이우스. 그 이외에 용무가 없으시면 전 이만...?"
뭐라고 말하려고 했던 듯 입을 벌렸던 가이우스가 그 말에 그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멀린은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찜찜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아무래도 리온도 자기 병이 어떤 건지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리온이 방을 나간 후, 한동안 무언가 생각하던 가이우스가 느닷없이 지나가는 투로 그렇게 말하자, 멀린은 그에게 조금 더 다가서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글쎄... 반응이 너무 담담하지 않니. 의사가 자신의 증상을 뭣 때문이라고 추측하는데, 더욱이 그게 처음 듣는 병명이라면 으레 자세히 물어보기 마련이지 않느냐...그것도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던 고통인데. 그런데 리온은 거기에 대해선 전혀 궁금해하는 거 같지 않구나."
멀린은 가이우스의 그 말에 탄성을 올렸다. 하지만 뒤이어 떠오른 의문에 다시 가이우스에게 물었다.
"하지만 치료방법은 궁금해했잖아요."
"그러니 리온도 그 외에 것은 다 알고 있으리라는 거다. 그도 내가 도서관에서 본 그 책 정도는 봤을 듯 싶고- 그거밖에는 여기서 구할 자료가 없으니까. 그러니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치료방법을 아느냐고 물어본 거겠지."
멀린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가이우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한숨섞인 말을 덧붙였다.
"안타깝게도 우리도 그 이상은 모르지만 말이다."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이미 자기들은 다 알고 있는데도 시치미를 떼고 괜찮은 척 허세를 부리는 리온이 괘씸하게까지 느껴진 멀린은 분통을 터트렸다.
"그럼 왜 도와달라고 하질 않는거죠?! 혼자 끙끙대는거보다 같이 찾는게 더 나을 거라는건 알 텐데."
멀린의 그 잔뜩 찌푸린 얼굴을 보며, 가이우스는 힘없이 어깨를 으쓱해보일 뿐이다.
"글쎄...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다른사람도 아니고 그가 자진해서 그러고 있으니 다그치기도 힘들구나."
가이우스로서는 그의 판단을 존중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리온의 그동안의 판단력이나 성품을 봐서는 분명 나름의 사정이 있을 테고, 그러니 본인이 원하지 않는 이상 모르는 척 해주는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멀린도 그 의견에는 어느정도 납득했지만...
"다만, 괜히 이상한 생각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마는..."
가이우스의 그 마지막 말은 묘한 울림으로 멀린을 흔들었다. 그리고 이제 멀린은, 그를 존중해 기다려줘야할지, 아니면 강제로라도 추궁해봐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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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찌감치 잠을 자보려 침대에 누웠지만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멀린은, 이상하게 생각할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했지만 잠옷차림에 대강 겉옷을 걸치고 급히 방을 나섰다. 어둑한 복도를 지나 리온의 방으로 향하며 멀린은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자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지금 이렇게 가서 물어본다 해도 그가 솔직히 얘기해줄지 어떨지 모르는데- 하지만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제대로 잠들어 있는지만이라도 봐야 자신도 좀 안심하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간격을 두고 켜져있는 복도의 휏불빛이 마치 자신을 재촉하는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멀린은 서둘러 발길을 옮겨 리온의 방 앞에 도착했다.
안은 조용했다. 자고 있는 걸까? 멀린은 시험삼아 한번 노크해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음을 다시 먹고, 이번엔 조금 더 세게 두드려보았지만 여전히 기척이 없었다. 한동안 초조하게 밖을 서성이던 멀린은 결국 조용히 문고리를 잡아당겨보았다. 문은 다행히도 잠겨있지 않아 쉽사리 열린다.
잘 자고 있는지만 확인하고 가는거야- 멀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조금 열고 빼꼼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방 안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워서, 휏불빛에 적응했던 멀린의 눈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조금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멀린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리온을 발견했다.
"리온!!"
짧게 소리친 멀린은 주저없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리온을 급히 안아 일으킨 멀린은 그에게 어딘가 상처가 있는지를 살폈지만 특별히 외상은 없었다. 테이블에는 읽다 만 듯한 책이 하나 펼쳐져 있을 뿐, 이상한 점은 없다. 의자는 조금 뒤로 밀린 채라 아마 일어나다 쓰러진 것이거나 한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지?
그 때, 구름에 가리웠었던 희미한 달빛이 창문으로 흘러들어와 리온의 얼굴을 비추었다. 리온의 얼굴은 그 옅은 빛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새하얗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맙소사...리온..."
멀린은 정신없이 그의 호흡을 살폈다. 숨은 붙어있었지만 너무나도 미약한 호흡이다. 이상하리만치 핏기가 없는 몸을, 그가 정신을 차리기만을 바라며 마사지하던 멀린은 한동안 변화가 없자, 마지막 수단이라 생각하며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Ic pe purhhaele pin licsare......"
멀린의 손 끝에서 황금빛의 마법력이 감돌다 사라졌다. 마치 몇시간과도 같은 몇초가 지나가자, 다행히도 리온은 크게 숨을 한번 내쉬더니, 안색을 되찾으며 조금씩 규칙적인 호흡을 되찾기 시작했다. 멀린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온이 부스스 눈을 뜨자, 놀란 마음에 맺혔던 눈물이 한줄기 뺨을 가로질렀다. 아직 촛점이 맞지 않는 듯 힘없이 위를 올려다보던 리온은 조금 뒤, 눈 앞에 있는 멀린의 존재를 눈채챘는지 시선을 맞춰왔다. 곧이어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의 표정이 번진다.
"멀린?"
"확인하러 잠깐 들렀다가... 쓰러져 있는거 보고 들어왔어요..."
그는 잠시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주위를 살폈지만, 이내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했는지 힘없이 조금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보였다.
"놀랐겠구나......일단 저기서... 물 좀 갖다줄래?"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 멀린은 자기 겉옷으로 리온의 머리를 받쳐준 후, 물주전자가 있는 침대맡에 딸려있는 작은 테이블로 걸어갔다. 아직도 떨리는 손으로 컵에 물을 따르는 멀린의 귀에, 들릴락말락한 리온의 중얼거림이 간신히 들려왔다.
"난 아직 살아있는 거군..."
멀린은 입술을 사려물었다. 그 말투는 죽다 살아난 사람치고는 전혀 다행스러운 말투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슬퍼하는 것 같은 말투도 아니었다. 다만 확인하는 것 같은, 하지만 정말 생명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말투였다.
멀린이 가져다준 물을,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켜 조금 들이킨 리온은, 고개를 숙인 채 미간을 지그시 누르고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완전히 몸을 세워 앉았다. 잠시 몸을 추스리려는 듯 가만히 있던 그는, 이제 완전히 또렷해진 눈빛을 멀린에게 돌리고는 머쓱한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책 읽다가 침대로 가려 했는데 갑자기 필름이 끊겼어. 저혈압이라도 생긴 건지... 명색이 기사인데 부끄럽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분명 그것 뿐일거라 믿어버릴 만큼 능청스러운 연기였다. 멀린은 기가막혀 입을 다물었지만, 뒤이어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해보인 리온은 손을 들어 습관처럼 멀린의 머리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이제 실력이 상당하구나.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아마..."
그렇게 뒷말을 흐리며 웃어보이는 리온의 미소는 어딘가 섬득했고, 거기까지 보고 있자 멀린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멀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높혔다.
"리온, 제발! 이제 괜찮은 척 좀 그만해요!!"
리온은 그 예상치도 못한 반응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는 멀린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바라보던 눈빛이 의문으로 가늘어지고, 이내 다른 곳으로 피하듯 돌아가자, 멀린은 다시 내뱉듯이 말을 이었다.
"다 안다구요... 왜 그렇게나 힘들어하는지. 그러니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말해요! 보고있자니 답답해 죽겠다고요!"
"다... 안다고?"
확인하듯 말을 되풀이한 리온의 그 말투는 아까의 중얼거림처럼 생기없게만 들린다.
"그래요-그 약에 관한 것도, 그래서 모르가나가 공격했던 그날 이후부터 두통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것도 다 알아요. 그러니..."
리온은 여전히 현실감이 없는 듯 멍한 표정이었다. 달빛을 받아 연한 녹색으로 비치는 그 눈동자에는 왜인지 일견 두려움마저 엿보이는 듯 하다. 멀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제발, 솔직하게 말해줘요. 당신을 돕고 싶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할게요"
멀린의 간절한 부탁에, 리온은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멀린을 마주보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무언가 생각하듯 그대로 있던 리온은 이윽고 입을 열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네가 그날 밤...무서워하길래... 적어도 너한테만은 말하지 않으려 했었는데..."
리온의 그 첫 마디에 멀린은 움찔했다. 그날밤- 그 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었지? 그것까지 신경쓰고 있었던 거라 생각하니 멀린은 묘하게 가슴이 아팠다. 리온 스스로가 더 당황했을 텐데 상처를 준 것 같아 미안했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는구나"
그 뒤로 둘은 그대로 거기 앉은 채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밤, 멀린이 깨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 그리고 그 약을 어떻게 해서 얻게 되었는지- 리온은 감정은 배제한 채 마치 보고하듯,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그것 뿐이며, 이제 확실한 거라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 정도라는 것까지......
카멜롯의 기사주제에 냉큼 마법약을 먹어버렸다고, 함부로 말 할 수도 없잖아- 리온의 그 말에, 멀린은 마법사인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공감했다. 뼛속까지 카멜롯의 기사로 살아온 그에게, 그게 어떤 고뇌였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 욕심이 너무 과했던 거지... 괜히 정의감에 넘쳐서는-"
그 자책섞인 말에 멀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리온이 절 구해준거잖아요. 안그랬으면...저도 여기 없었겠죠."
그 말에 리온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자, 멀린은 왠지 간지러운 기분을 느끼며 꼭 해야했던 말을 덧붙였다.
"고마워요."
멀린의 그 말에, 리온은 그제서야 그동안은 보기 힘들었던, 진짜 미소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보고서야 멀린도 어느정도 안도했다. 이렇게 무리해서라도 오길, 무리해서라도 물어보길 정말 잘 했어.
설명을 끝낸 리온은, 그래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직은 견딜 만 하고, 이러는 동안 뭔가 다른 방법을 발견할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고 하며. 그렇게 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리온이 정말 그다웠다. 어쩔수 없는 고집쟁이다.
멀린은 그를 도와 침대로 데려가 눕힌 뒤, 그에게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그는 멀린도 다 컸다며, 믿음직스러운 남자가 됐다며 짐짓 즐거운 듯 소리내 웃었다. 그 모습에, 이걸로 조금은 마음의 짐이 덜어진 거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멀린도 답하듯 웃어보였다.
분명 몸보다 마음이 더 괴로웠을 것이다. 멀린은 나가기 전, 리온의 손을 끌어다 두 손에 모아쥐고는 다짐하듯 말했다.
"내가 꼭 낫게 해줄게요, 리온. 약속해요."
왜 자꾸 신파조로 흘러가려 하는 걸까요
거기다 리온은 한떨기 비련의 남주가 되어버렸고...^^;; 미안 리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