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lin-리온/멀린] 밤의 주민 (1/?)
욱하는 마음에(?) 내리 쓴 글을 저장해 봅니다.
이도저도 안되고 쌓아만 놓은 쪽망상들이 한두개가 아니라 ㅠㅠ 그렇게 묵힐거면 장렬히 업데이트나 하고 망하자 싶기도 해서
...거참 쓸쓸한 코멘트...
제 안의 리온 경 호감도가 쌓여ㅋㅋㅋ 나온 잉여물입니다.
운좋으면(?) 리온멀린으로 발전할 수도 있어서(...) 일단 제목을 저리 달았지만 아직까지는 싹수하나 보이지 않는게 함정;
캐붕은 당연, 진부함은 기본장착. 뒷 이야기가 이어질수 있을지는 게으름의 신만이 아실 것 같은......
모르가나와 색슨족이 카멜롯 성을 포위했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내린 후였다.
어떤 술수를 쓴 건지, 몇 겹이고 둘러져 있었던 방어선을 어떤 자취도 소리도 없이 지나쳐온 그들을 간신히 발견했을 때엔 이미 그들이 성문으로 들이닥치고 있는 시점이었다. 순식간에 가장 외곽에 있던 구시가지가 점령되고, 그들은 예기치도 못한 그들의 등장에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을 간단히 제압하며 빠르게 안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뒤늦은 경보종이 날카롭게 울려대는 가운데 아서는 급히 기사들의 대열을 짜 배치했지만 과연 어디까지 막아낼 수 있을지는 신만이 아는 일이었다. 아직 점령되지 않은 안쪽지역 사람들을 급히 대피시킨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방어를 계속했다.
이런식의 급습이 아니었다면, 견고한 카멜롯의 성채는 그따위 적수에게 벽돌하나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국경을 넘어 근처까지 오는 것도 불가능 했을 터, 진작에 봉쇄되었을 정도의 무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평화속에 예기치 않게 허를 찔리자, 그 효과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결국 구시가지 앞까지 나와 기사들과 함께 밀려드는 적을 방어하던 아서는 혼전 속에서 날아온 화살에 팔을 맞고 쓰러졌다.
"전하를 성안으로 모셔라!"
리온의 외침에 이미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걸 인식하고 있던 기사들이 재빨리, 고통 속에서도 한사코 거부하는 아서를 간신히 들쳐업고 안으로 뛰어갔다. 나머지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적을 베어넘겼다. 하지만 이쪽도 곧 무너질 것 같은 상황이었다. 모르가나가 보이지 않는다는게 그나마 다행인 것일까. 그녀는 아무래도 다른쪽 침입조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건 최악의 상황이 조금 연기된 것일 뿐, 그렇다면 최후의 접전은 성 안이 될 수도 있었다.
다음을 대비하기 위해 적절히 기사들을 후퇴시키기 시작한 리온은 정신없는 혼전 속에서도 남은 사람을 가늠하려 주위를 둘러보다가, 쓰러져 있는 기사들 중 눈에익은 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탄식하듯 내뱉었다.
"멀린..."
아까 아서를 대피시킬때 같이 간 줄만 알았는데- 언듯 살펴보니 다행히도 숨은 붙어있는데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것 같지는 않다. 어울리지 않게 칼을 들고 왕을 지키겠다며 달려왔을때부터 말려 돌려보냈어야 했을 것을...... 리온은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셈이다. 그의 퇴각명령에 대부분의 기사들은 전열을 벗어나고 몇몇만이 엄호를 위해 남은 상황. 멀린을 돌보고 싶어도 그럴 틈이 없었다. 다만 적들이 그를 못보고 지나치길 바랄 뿐.
얼마 후 멀찌기에서 화살이 소름돋는 소리를 내며 날아와 리온의 어깨에 꽂혔다. 이미 옆에 남아있던 동료들도 힘이 다해가고 있었다. 리온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오래지 않아 쓰러지고 말았다. 이윽고 방어선이 뚫리자 환호를 올린 그들은 잔뜩 사기가 올라, 쓰러진 기사들을 거침없이 지나쳐 안쪽으로 밀려올라갔다.
절그럭거리는 갑옷소리와 환성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쓰러진 리온의 귓가를 울렸다. 상처들의 타는듯한 고통 속에서도 리온은 점점 몸이 차가워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자신의 칼을 주워들려 몇번이고 손을 뻗어 보았지만, 힘이 다해가는지 팔은 천근만근이었다. 힘겨운 숨을 간신히 내뱉으며 올려다본 밤하늘은 여느때처럼 맑고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불과 피의 기운으로 섬뜩한 붉은색이 군데군데 물들어 있었다.
리온은 끝을 예감했다. 싸우는 중에 죽는 것은 기사가 된 이상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하지만 리온은 두려웠다.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한 채 죽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리온은 멀린이 있는 곳을 간신히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는 미동도 없이 쓰러진 채다. 그의 이름을 불러보려 입을 열었지만, 소리는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젠장...이런 식의 죽음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자신은 너무나도 무력했다. 모든것을 포기한 채 리온은 몸에서 힘을 빼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마치 계시처럼 리온의 품에서 무언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리온은 떨리는 손을 뻗어 그것을 꺼내들었다. 손가락 하나정도 될 크기의 작은 약병. 리온의 손에 들린 작은 병 안에는 주변의 빛을 삼켜버릴 것 같이 새카만 액체가 언듯언듯 꿈틀거리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이게 있었지.
그건 이전, 우연히 돕게 된 드루이드 노파가 보답으로 준 것이었다. 처음엔 힘없는 노인과 아이를 산적이 습격하고 있는 것을 두고볼 수 없었기에 구한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드루이드의 표식을 지니고있었고, 노파는 산적으로부터 자신을 도운 사람이 붉은 망토를 두른 카멜롯의 기사라는걸 보고는 한층 더 절망적인 표정을 했다. 카멜롯의 법에 따르면 드루이드는 살려둘 수 없었다. 하지만 리온으로서는 그저 무력해보이는 노인과 아이를, 게다가 마법을 쓰려면 쓸 수도 있었을테지만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인지 그저 담담히 자기를 바라보는 그들을 해코지할순 없었다.
결국 못본척 해 줄테니 도망가라고 한 리온에게 노파는 감사를 표하며, 자신이 지닌 것중 가장 값진 것이라며 그 물약을 쥐어주었다.
"이건 아주 귀하고도 위험한 물약입니다, 기사님. 어떤 부상도 낫게하고, 죽어가는 이조차 살려내는 물약이지요. 그리고 이 약을 먹으면 거의 불사에 가까운 재생능력과 인간을 넘어서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리온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받아든 투박한 병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그리 특별한 힘이 담겨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노파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주의하셔야합니다. 그 효과는 영원히 지속되는게 아니지요. 그 한번의 기회를 돌려주는 대신 이 물약은 그를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것으로 바꿀 겁니다. 햇빛 아래를 걸을 수 없는 밤의 주민이 되어, 계속 사람의 피를 갈구하게 됩니다."
그 설명은 확실히 기이한 것 이상이었다. 리온은 마법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지만, 그 물약이 마법-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종류의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는 애써 사양하며 그 병을 다시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노인은 잠자코 그것을 다시 그에게 쥐어주었다.
"이것은 이제 기사님의 것입니다. 지니고 계시되, 신중하게 다루십시오. 정말 위험한 순간이 왔을 때 이것을 쓰실지 마실지는 당신의 선택. 만약 당신이 절명의 위험에 처했을때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지키고싶은 것들이 있다면 이 약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주름진 손에 힘을 주어 리온의 손을 맞잡으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디, 당신에게 그런 순간이 오지 않기를 빕니다..."
점점 흐릿해지는 의식 사이에서도 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수많은 동료들이 이미 쓰러졌고, 카멜롯의 운명은 이제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들은 곧 왕궁을 장악할테고, 왕이 붙잡힌다면 모든 희망은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쓰러져있는 멀린- 상처는 깊지 않을 테지만 그대로 두면 분명 위험한 상황에 처할 건 뻔했다.
병을 든 채 리온은 자신에게 물었다.
나에게 아직 스스로를 버리면서까지 지키고싶은 것들이 있는가?
이미 리온에게 있어 그 답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그는 마지막 힘을 그러모아 병의 봉인을 뜯고 그것을 입 안으로 흘려보냈다.
밤의 주민- Night Walker
1.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고급 마법에도 저항하며 밤을 틈타 주변의 모든 더운 피를 가진 것들을 습격하는 그들의 존재는 그 이상 없는 위험이었다. 우리 드루이드들은 고위 여사제들의 힘까지 빌려서야 겨우 그들을 완전히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제압이라기 보다는 멸종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이제 위기는 사라졌다.
하지만 드루이드 몇의 호기심으로 그들의 흔적 일부는 보존되었다. 그 시도는 지탄받아 마땅한 것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인간에게 나이트 워커의 힘을 부여하는 약을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드루이드의 구전 모음집, 제4장, 나이트 워커 中 발췌
거의 전부 파괴되다시피 한 구시가지를 비롯하여 성 안은, 어느정도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복구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모르가나의 시도는 이번에도 실패했지만, 이번이야말로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다. 마법으로 그 많은 군사의 기척을 숨기고 먼 거리를 이동해 기습을 하다니- 멀린은 그런 마법의 기척을 진작에 알아채지 못한 자신을 책망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만큼 예상밖의 행동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아직 막아낼 순 있었다. 마지막 순간, 아직 엠리스는 그녀의 힘보다는 우위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나 강력해진 모르가나의 힘에 뒷골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이젠 언제고 긴장을 늦출 수 없겠어- 멀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이우스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심부름 하고 왔어요! 엇...."
멀린은 기세좋게 안으로 들어가다 의외의 방문객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멀린의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그 기사는 리온이었다. 그는 작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간단히 인사를 건넨다. 멀린은 그자리에 그대로 선 채 얼떨떨하게 물었다.
"리온? 이 시간에 여긴 왠일이에요?"
"아, 별건 아니고... 약 좀 받아가려고"
"약이요?"
멀린의 그 물음에 리온은 말을 고르는 듯 잠시 망설이며 선듯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마침 찬장을 뒤적이던 가이우스가 원하는 걸 찾아냈는지 몸을 돌려 다가왔다.
"자, 여기 있네. 저번이랑 양은 똑같이 해서 마시면 되네. 하지만 이번건 좀 독하게 했으니 한번 복용하면 반나절은 갈 게야. 너무 자주 마시진 말고"
투명한 액체가 담긴 병 두개를 받아든 리온은 살았다는 표정이 되어 가이우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는 다시 둘에게 간단히 인사하고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의 붉은 망토가 문 밖으로 사라지는걸 멍하니 바라보던 멀린은 그제서야 테이블에 가방을 내려놓고는 가이우스에게 물었다.
"리온이 약이라니 왠일이죠? 누구 심부름이라도 온 건가?"
왠만해서는 자기가 아파 이곳을 찾는 일이 없었던 그였기에 멀린은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그렇게 물었다. 가이우스는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자기 약을 부탁하러 온 거란다."
"... 어디 아프대요?"
"그냥 때때로 두통이 심하다고 진통제를 좀 달라 하더구나. 뭐, 그런 진통제 쯤이야 딱히 어려울것도 특별한것도 없으니 몇번 주긴 했는데..."
그렇게 말하고 말끝을 흐리는 가이우스의 표정은 걱정으로 흐려졌다. 멀린은 덩달아 초조한 기분이 되어 가이우스의 말을 기다렸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사이를 둔 가이우스는 한숨섞인 말을 이었다.
"평범한 두통 치고는 너무 오래 가는구나. 잊을만 하면 와서 약을 부탁하니... 뭔가 다른 문제가 있는건 아닌지 걱정이다."
그 말을 들은 멀린도 찜찜한 마음에 눈썹을 찌푸렸다. 확실히 최근 리온의 모습은 예전같지 않았다. 기사들 중에서도 기본적인 체력과 기술로는 손안에 꼽는 실력의 그는 잘 동요하지 않는 침착한 성품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왠만한 훈련이나 퀘스트로는 힘들어하는 모습조차 보기 힘들었다. 또 그만큼 자기의 감정이나 상태에 대해 내색하지 않으려 하는, 지나치게 성실한 면까지 가지고 있다는걸 그의 주변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리온이, 요즘들어 간혹 눈에 띌 만큼 지친 모습을 보이고는 했기에 안그래도 슬슬 걱정이 되고 있던 참이었다.
멀린은 짐들을 정리해 제자리에 넣으며 넌지시 물었다.
"혹시 짐작가는 거라도 있으세요?"
멀린의 그 물음에, 가이우스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니길 바란다만, 의심가는게 하나 있긴 하지."
가이우스는 낡고 두터운 책을 꺼내들어, 이미 참고한 듯 책갈피를 꽂아둔 부분을 어렵지 않게 찾아 펼쳐 멀린에게 보여주었다.
나이트 워커, 밤의 주민이라는 제목이 달려있는 장이었다.
으레 설명을 위해 딸려있는 삽화에는 다른 장과는 달리 어떤 구체적인 모습이 아닌, 한 풍경화가 있을 뿐이다. 달빛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평원 아래 한 사람의 모습. 온통 어두운 속에서 머리위로 내려오는 달빛 한 줄기 아래, 그는 괴로운 듯이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아있다.
"나이트 워커가 된 자는 인간을 넘어서는 근력과 힘, 생명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제 더이상 태양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 해가 있는 동안은 지독한 고통에 시달릴 것이고, 증상이 더 심해지면 달빛에 조차 고통을 당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 스스로 생명력을 순환시키지 못해, 사람의 피를 갈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비참한 삶을 이어가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때가 이르면 그는 한줌의 재가 되어...... 원래의 운명으로 돌아갈... 것이다..."
천천히 설명을 읽어내려가던 멀린의 목소리가 잠겨들더니 조금씩 끊겼다. 멀린은 읽기를 멈추고 당황한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가이우스에게 질문했다.
"가이우스, 분명 리온의 상태며... 정황상 어느정도 들어맞는건 인정하지만-이건 너무... 비약한 거 아닐까요? 하필이면 이렇게 희귀한 병을...두통이나 피로감은 다른 걸로도 충분히 있을 수 있고..."
가이우스는 그 말에 동의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여보였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침울했다.
"그래, 하지만 벌써 그의 두통이 지속된지가 거의 이주째가 다 되어간단다. 나도 그동안 진통제 외에도 이거다 싶은 두통약은 다 처방해 보았지만...... 전혀 듣질 않는구나. 더 심해질 뿐."
"그래도......"
가이우스는 잠자코 그 뒤를 읽어내려갔다.
"이 질병의 증상은 다음과 같다. 낮동안 지속적으로 호소하는 두통, 피로감, 창백한 얼굴, 눈동자가 때때로 은빛으로 탁색, 피냄새에 민감해짐....."
분명 앞의 몇몇 증상은 리온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멀린은 그건 그저 그동안 쌓인 피로 때문이려니 하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은빛 눈동자-
멀린은 전투의 그 날, 온통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피로 뒤덮힌 채, 자신에게 손을 내밀던 리온을 떠올리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전사란 원래 죽음과 그렇게도 가까운 것이 당연하건만, 평소 온화하기 그지없는 리온의 그런 모습은 지독히도 낮선 것이었다. 멀린이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눈앞에서 리온은 믿기지 않는 모습으로 적을 쓰러트려가고 있었다. 멀린은 눈을 의심했다. 사람같지 않은 그 움직임- 몇번이고 상대의 칼에 맞아가면서도 그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고, 결국 한동안의 공방 끝에 그 앞에는 적병의 시체가 작은 언덕을 이룰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마치 간단한 대련 하나를 끝낸 듯 잠시 심호흡만을 한 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흐트러짐 하나 없는 걸음걸이로 곧장 멀린에게로 다가왔다.
"멀린, 일어날 수 있겠어?"
멀린은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낮익은 목소리에 군더더기 없는 태도,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 여느때의 리온이다. 하지만 달빛에 비친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낮설었다. 방금 전까지 믿기지 않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일까? 멀린은 무엇이 자신을 멈칫하게 한 것인지 알아내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피로 젖은 얼굴 위로, 따듯한 녹색을 비쳐야할 그의 눈이 은빛으로 어렴풋이 빛났다.
멀린이 겁을 먹은것을 눈치챘는지, 리온은 그제서야 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닦아내고는 물끄러미 피묻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리온의 눈에 흔들린 그 빛은 무슨 의미였는지 지금도 멀린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동요을 보인 것은 그 순간 뿐이었다. 리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멀린에게로 손을 뻗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그리고는 대피소 안으로 피하라는 말만 남긴 채, 왕궁 쪽으로 달려갔다.
그래, 분명 이상한 모습이긴 했다. 그때의 이야기를 가이우스에게 해주자, 가이우스는 심증을 더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멀린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가 잘못 본 걸 거에요- 멀린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가이우스도 부정하고 싶은 멀린의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가이우스 자신도 믿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그는 그저 멀린을 한번 바라보고는 다시 읽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가장 완벽한 진단법은, 환자의 피를 뽑아내 문데일 꽃 추출액과 섞어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나이트워커의 피는 문데일 꽃과 반응하여 은색으로 변할 것이다."
말을 마친 가이우스는 옆 테이블로 걸어가 작은 병을 하나 들어올려 보였다. 거기엔 검붉은 색의 액체가 조금 담겨 찰랑이고 있었다.
"가이우스, 설마?"
"실제로 두통을 겪는 환자에게는 피를 뽑는 처방도 유효한거란다, 멀린. 좀 구식인 처방이긴 하지만."
가이우스는 변명하듯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웃어보이고는 다시 근엄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멀린, 네가 가서 문데일 꽃을 좀 꺾어와야겠다."
겨울에만 나는 문데일 꽃을 찾아내기엔 아직 이른 시기이긴 했다. 쌀쌀해졌다고는 하지만 눈이 오기까진 멀었으니- 하지만 멀린은 거의 하루종일 꼬박 걸려 주변을 이잡듯이 뒤져가며 겨우 꽃봉오리를 벌리기 시작한 몇 송이를 간신히 구해 돌아왔다. 이미 이른 저녁은 넘어선 시간이었다. 좀 무리한 일이긴 했지만 멀린으로선 조금이라도 빨리 이 의혹을 걷어내고 싶었기에, 돌아와선 쉴 새도 없이 서둘러 꽃을 갈아 물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얼마 안걸려 만들어진 푸른색 추출액을 가이우스에게 건네자, 가이우스는 조심스레 하얀 실험용 접시 위에 피 몇방울을 떨구고 푸른색 용액을 그 위에 떨구었다.
제발...... 멀린은 빌었다. 자기가 본 그때의 리온은 그저 착각이기를. 가이우스도 자신의 추측이 과한 망상이었기만을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붉었던 피는 얼마 안있어 기묘한 은색으로 변했다.
하얀 도자기 접시 위에서 마치 은을 녹인듯 방울져 구르는 그 몇방울의 액체는, 어렴풋한 촛불아래 은은하게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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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길었던 하루일과가 끝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리온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쓰러지듯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미 진통제의 약효도 진작에 끝나, 오후즈음엔 머리는 다시 깨질듯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자, 늘 그랬던 것처럼 두통은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지독한 두통에 가려 잊혀졌던 피로함이 그를 짓눌러왔다. 리온은 식욕도 없었기에 저녁식사를 거르고는 일찌감치 방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동안 멍하니 의자에 몸을 의지하고 있던 리온은 어느정도 기력을 되찾자 부스스 일어나 기사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힘없는 손길로 끌러낸 벨트 주머니에서 약을 꺼낸 그는 확인하듯 병을 촛불빛에 들어올려 비춰본다. 오늘 받은 두 병중 하나는 이미 완전히 비어있다. 면역이 될 만큼 자주 마신것도 아닌데도, 이젠 정해준 복용량만으로는 두통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아 충동적으로 단숨에 한 병을 다 비워버린 탓이다. 리온은 성급했던 판단이라 자책하며 남은 한 병을 조심스레 다시 갈무리했다. 가이우스에게 너무 자주 약을 부탁할 수는 없었다. 이미 몇번이고 이어진 방문으로 가이우스는 자신의 상태를 걱정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날 밤, 드루이드 노파가 준 그 약 덕에 최악의 위기는 넘긴 셈이다. 그 약이 없었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죽었을게 분명했을 테니... 하지만, 그 약을 마시고 난 다음에는 죽음을 벗어나는 것 이상으로 마치, 그 순간을 기점으로 새로 태어난 것만 같은 경험이 뒤따랐다. 머릿속을 다 태워버릴 듯한 고통이 지나가자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던 숨은 다시 원래의 기력을 되찾았고, 아직도 피를 뿜어내던 상처는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일어나 다시 칼을 집어들자, 리온은 자신이 지금 그 어느때보다도 최상의 컨디션 아래 있다는 걸 금새 느낄 수 있었다. 어둠도 이제 더이상 어둠이 아니었다. 앞에 쓰러진 시체들 사이로, 아직도 남은 적 병사들이 성을 향해 오고있는 걸 발견한 그는 주저없이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혼자였지만 절대로 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넘쳤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발견한 건 어느새 주검이 되어있는 그들과 그 앞에 혼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조금 빠르게 박동하고 있는 심장은 근원을 알 수 없는 기쁨에 뛰고 있었다. 향긋한 피의 향기. 리온은 자신의 코를 간지럽히는 그 냄새에 자기도 모르게 살짝 미소지은 후, 몸을 돌려 잊고 있었던 목적을 위해 달려갔다. 멀린은 다행히 무사했고, 의식까지 회복한듯 몸을 조금 일으킨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눈빛은... 자신이 기대한 눈빛과는 전혀 달랐다. 아니, 일찌기 멀린의 눈에서 그런 두려움을 본 적이 없었다.
멀린의 그 눈빛을 보고 나서야 리온은 자기가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아직도 뜨거운 피를 온통 뒤집어쓰고 있었으면서 그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제서야 그는 그 모든 상황이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를 실감하고는 지독한 한기를 느꼈지만, 그 감각은 오히려 그에게 자신이 해야할 일을 또렷히 일깨워주었다. 마지막 보루인 왕성을 사수해야 했다.
리온은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만약 이 두통과 몸의 괴리감이 그 노파가 말한 경고의 내용을 따라가는 것이라면, 이건 선택을 한 자신이 지불해야할 대가인 것이겠지. 그녀는 분명 경고를 했고, 자신은 알면서도 그걸 택한 것 뿐이다- 이런식으로 지독한 것일 줄은 몰랐지만.
'햇빛 아래를 걸을 수 없는 밤의 주민이 되어, 사람의 피를 갈구하게 됩니다.'
리온은 생각을 더듬어 그녀의 경고를 떠올렸다. 햇빛 아래를 걸을 수 없다는 게 이 두통을 말하는 것일 터다. 하지만 사람의 피를 갈구하게 된다니- 아직 그런 징조는 없으니 다행이었지만, 그게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들이닥칠지, 그게 언제가 될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떤 상황으로 자신을 이끌고 갈지는 그 이상 그가 아는 바 없었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다. 적어도 어떤 식이 될지 안다면, 그에 대비할수는 있을 텐데. 해박한 가이우스라면 그에 관해 아는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리온으로서는 섣불리 묻기가 힘들었다. 카멜롯의 기사가, 자진해서 마법약을 입에 대다니. 그건 스스로 충실한 기사라고 자부하는 리온으로서는 가장 마지막에 취할 행동이었다.
분명 이율배반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절대 후회는 하지 않는다.
리온은 견딜수 있을 때까지는 견뎌보기로 다짐했다. 그저 두통으로만 끝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지나친 걱정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는게 리온의 평소 생각이기도 했기에, 그는 내일을 위해 일찌감치 피로한 몸을 침대위에 눕히고 애써 잠을 청했다.
-
아름답기까지 한 빛을 뿌리는 은색 핏방울을 내려다보고 있던 멀린은 놀라움에 잠겨든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고 물었다.
"이거...치료약이 있을까요, 가이우스?"
"이건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질병이란다, 멀린. 게다가 이런 현상은 내 삶을 통틀어서도 한두번밖에, 그것도 소문으로밖에 듣지 못했어. 이 책에도 일종의 마법의 힘이 작용한 것이라고만 추측할 뿐, 별다른 건 적혀있지 않구나."
"어쩌다 이런 일이... 누가 리온에게 악의를 품고 마법이라도 건 걸까요?"
"네 이야기를 들어보면 네가 본 그때가 리온이 변한 시점으로 보이는구나. 그때쯤엔 모르가나도 반대쪽에 있었을 것이고, 그 상황에 그에게 주의를 기울일 사람이 있었을거라곤 판단하기 힘들어......"
자신이 기절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멀린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가며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떠올려보려 했으나 딱히 이것이라 할 만한 일은 없었다. 아니, 이미 멀린이 정신을 차린 시점에서 리온은 '달라져' 있었던 셈이니까-
"일단 그가 다시 찾아오면 솔직히 물어보는게 제일 좋은 방법일 듯 하구나. 그동안 우리는 자료를 더 찾아보기로 하고."
"......"
여전히 고민에 빠져있는 멀린의 등을 토닥인 가이우스는 그를 달랬다. 카멜롯에서 이런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건 그들밖에 없었고, 멀린이 있는 이상 마법에 관련된 것이라면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침착하게 할 일을 해야하는게다- 가이우스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멀린은, 애써 잠을 청하기 위해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