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lin-가웨인/멀린] 가웨인과 선물
BBC 드라마 'Merlin'의 슬래쉬 낙서입니다.
커플링은 가웨인&멀린, 여전히 건전한 내용...인 듯 ^^;;
이것 역시 [선물]편과 좀 연결된 내용입니다. 짧막한 곁다리 이야기2
가웨인에게 있어서 멀린은, 그리고 멀린에게 있어서 아서는...
일상 속에서 잠깐 엇갈린 미묘한 감정에 대하여-
"멀린~ 뭐하냐! ...어...
여느때처럼 노크도 없이 힘차게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가웨인은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멀린을 보고 급히 소리를 죽였다.
멀린은 테이블에 엎어져 선잠에 빠져 있었다. 앞에 놓여진 갑옷과 손에 쥐여진 천, 걷어붙여진 소매를 봐서는 아무래도 갑옷정리를 하다 그대로 잠든 듯 했다. 가이우스는 외출중인지 보이지 않는다.
펍에라도 같이 가자고 꼬시려고 왔다가 그만 무안해진 가웨인은 머리를 긁적하고는 테이블 근처까지 다가갔다. 하릴없이 테이블을 만지작거리며 멀린을 내려다보자, 그는 꽤나 피곤했던지 새근거리는 소리까지 내가며 자고 있었다.
'이거...어떡한다. 많이 피곤했나본데...'
깨우기엔 너무 곤히 자고 있었고, 그렇다고 들어 옮기다가 깨우기에도 좀 미안했다. 그냥 이대로 놔두는게 나으려나- 이리저리 생각하며 가웨인은 피식 웃었다. 겉어붙인 손목 위에 머리를 기대고 입까지 벌리고 자고있는 멀린의 표정은 완전히 이완되서, 평소보다 더 어린애같았다. 풀어던진 스카프는 아무렇게나 테이블 위를 돌아다니고 있다. 가웨인은 문득 목덜미에서 은색 줄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씨익 웃으며 살짝 그것을 들어올렸다. 선물해준 보람이 있게 잘 차고 있군, 기특해-
"어라?"
그러나 목걸이 줄에 딸려 올라온 것은 낮선 팬던트. 멀린의 목에 걸려있는 것은 기대했던 목걸이가 아닌 다른 것이었다. 작은 원형의 은판 위에 새겨진 우아한 드래곤 문양- 가웨인은 묻지 않고도 그것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카멜롯의 수호자, 왕실의 상징, 그리고 곧, 왕 그 자체를 의미하는 드래곤 문양.
가웨인은 적잖이 실망했지만 곧 체념과도 같은 깨달음에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의 심장 제일 가까이에 있는 것은 아서인가.
이미 알고 있었지 않은가-멀린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선시되는 존재는 바로 아서라고. 결코 자신이 될 순 없다고.
가웨인에게 있어 멀린은 특별한 친구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멀린의 격의없는 호의와 그의 올곧은 마음에 우정을 느껴왔다. 떠돌면서 만난 어떤 사람과도 멀린은 같지 않았다. 그 바보같을 정도의 긍정과 자기희생이라니. 가웨인은 그런 바보같은 점이 좋았다. 오랜만에 힘이 되어주고싶다고 자진해서 나서고 싶어지는 사람과 만났다.
하지만 멀린에게 있어 가웨인은 그저 친구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의 모든 것은 아서에게 향해 있다. 실제로도 아서는 그의 주인인 셈이었으니 섣불리 자신이 나설 자리가 없기도 했다. 가웨인은 그걸 알면서도 스스로가 그런 것에는 구애되지 않는다고, 만약 그렇다면 좀 어떻냐고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단지 멀린의 목에 자기 것 대신 걸려있는 아서의 목걸이 만으로도 이렇게 미묘한 기분에 빠지다니.
생각에 잠겨 멀린의 흩어진 머리카락으로 손을 가져가던 가웨인은 잠시 멈칫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멀린의 보드라운 피부와 따스한 체온을 느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가웨인은 다시 손을 거뒀다. 그리고는 조용히 자신에게 둘러진 망토를 끌러내어 멀린에게 살며시 덮어주었다.
멀린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한다고 한들, 변하는 건 없다. 적어도 스스로의 힘이 친구에게 도움이 되는 동안에는, 그의 곁에서 도울 뿐. 그는 그대로 조심스레 돌아나와 방문을 닫았다.
-
가웨인은 전략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원탁의 기사들까지 소집하는 전략회의는 그렇게 자주 있지는 않았지만 정기적으로 이뤄졌다. 자타공인, 이론보다는 실전파라고 이름붙여져 있던 가웨인으로서는 머리아픈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과정이라는건 인정했지만 말이다.
터덜터덜 걸어가던 가웨인은 앞에서 나타난 인영에 걸음을 멈췄다. 복도 끝을 막 돌아나온 아서와 리온이 무언가 이야기를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셋은 합류하여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서의 머리 위에서 왕관이 햇빛을 받아 품위있게 빛난다. 그리고 뒤로 펄럭이는 붉은 카멜롯의 망토. 저기에도 멀린의 손길이 닿아있겠지? 그의 뒷모습을 보며 가웨인은 생각했다. 문득 솟아오른 생각에, 가웨인은 반쯤은 충동적으로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러고보니 전하, 멀린에게 멋진 선물을 주셨더군요? 제 생일때도 기대해봐도 되겠습니까?"
아서는 가웨인을 흘긋 돌아보고는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허... 가웨인. 은근히 눈치가 빠르군. 생각해 보지-"
가웨인도 화답하듯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아서의 그 여유있는 태도에 왠지 심술이 치밀어올랐다.
"그나저나 목걸이에, 향수라니. 마음은 이해하지만 좀 비겁하신 거 아닙니까? 선물 아이디어가 필요하셨다면 저에게 물어보셨으면 좋았을텐데요-"
"가웨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온이 낮지만 힘이 들어간 어조로 경고하듯 내뱉었다. 갑자기 이상해진 분위기에 아서는 잠시 머뭇했지만 이내 가웨인이 한 말의 뜻을 알아차린 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음? 난 비겁하다고는 생각한적이 없는데, 가웨인. 선물에 담긴 의미는 주고받는 사람들의 몫이고, 어떻게 쓰느냐는 받는 사람의 자유지. 안 그런가?"
걸음을 멈추고 가웨인을 응시하는 가라앉은 아서의 눈빛에선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아서의 뒤에서는 리온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것 참, 주제넘는 말을 했다 이거군? 가웨인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이내 평소처럼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워...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너무 심각하게들 받아들이지 마시죠. 그냥 좀 투덜거려보고 싶었던 것 뿐입니다."
-
"가웨인, 잠깐만-"
전략회의가 끝나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서던 가웨인을 리온이 쫓아와 멈춰세웠다. 가웨인은 그가 할 말이 대강 예상이 되어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어? 리온 경이 왠일로 먼저 나를 불러세우실까?"
리온은 그를 조금 옆으로 데려갔다. 그들의 주위를 지나쳐 기사들 몇몇이 인사를 하고 지나쳐갔다. 어느정도 복도가 조용해지고 나자 리온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아까 전하께 한 말이 마음에 걸려서 이야기 해두고 싶었다."
"무슨? 내가 뭐 목 달아날 말이라도 했었던가?"
"비꼬지 마. 네 마음은 이해한다. 다만- 네가 카멜롯의 기사라는 건 잊지 않았겠지? 그리고 기사인 이상, 왕에게 충성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설령 목숨보다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지?"
"멀린은 전하의 시종이다. 아무리 친하다고는 해도 너의 것이 아냐."
엄격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리온을 보며 가웨인은 정말 웃음을 터트리고 싶어졌다. 너의 것이니 누구의 것이니. 이런 바보같은 실랑이에 얽혀들어가다니. 하지만 가웨인의 짐작으로는 리온도 꽤나 멀린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잘 드러내지는 않는 사람이지만, 언듯언듯 비치는 행동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생일 선물. 그의 선물이 자신과 비슷한 동기에서 나온 거라면, 그건 곧 소유욕이다. 그러니 그도 멀린에게서 자신의 향이 아닌 아서의 향수를 느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짐작이 갔다.
그런 주제에 나를 뭐라고 해? 가웨인은 피식 웃어보였다.
"흐흥, 난 또 뭐라고...그게 너의 충성이군, 리온? 과연 당신다운 생각이야. 올곧고, 융통성이란 하나도 없어."
가웨인은 과장스럽게 고개를 숙여보이며 말했다.
"동의할수는 없지만 주제넘게 보였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리온, 그런 식의 논리라면 멀린은 내 것도 될수 없지만 너의 것도 될 수 없어. 알고 있겠지."
리온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눈물겨운 충성심이야. 리온. 그 말 꼭 기억하길 바라겠네."
가웨인은 자기를 쏘아보는 리온의 시선을 무시하며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
아서가 왕이 되고 난 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오늘 드디어, 그웬의 왕비 책봉식이 경건하게 진행되었다. 품위있게 장식된 홀을 가로지르는 그웬의 발걸음을 모두는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서의 손에 의해 왕관이 씌워지고, 왕의 손을 잡고 군중들 앞에 선 새로운 왕비에게 열렬한 함성이 쏟아졌다.
"Long live the queen!"
그웬은 드디어 있어야 할 곳을 찾은 듯, 행복하고 아름다워보였다. 둘은 서로의 손을 잡은 채 화사한 미소로 환호에 답했다. 그 모두의 행복과 새로운 세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찬 분위기 속에서 멀린은 미소지었다. 이것으로 또 한 발자국, 그들의 이상에 가까워진 셈이다. 운명을 이루기 위한 또 한 발자국.
하지만 그 환호 속에서 멀린은 갑자기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낮지만 선명하게 울리고 있는 심장소리는 아서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기대하진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알아서는 안 될 일이다. 그 모든건 아서를 위해 숨겨야만 한다. 나의 정체도, 나의 마음도.
그렇게 숨기고 숨겨서, 결국 꿈꾸던 이상을 이루게 되면, 과연 자신은 무엇이 되는 걸까?
그대로 홀로, 언제까지고 그림자로서-
식이 끝나고 난 후 열려진 연회자리에서, 멀찌기에 물러나있던 멀린은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왕비에게 경의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왕비 전하."
그런 멀린을 바라보던 그웬은 이내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오, 멀린. 장난치는게 아니라면 그렇게 부르지 마. 우리 사이에... 네가 그렇게 부르니 난 정말-"
멀린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당신 외에 그 누구도 그 호칭에 걸맞는 사람은 없지요... 그러니-"
멀린은 그웬의 한쪽 손을 살짝 잡아올리며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전하의 손등에 평화의 키스를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웬은 멀린의 답지않게 진지한 분위기에 압도당해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멀린은 엄숙하게 그녀의 손에 입맞추었다.
그것은 멀린 자신에게 보내는 일종의 다짐이기도 했다. 이제 자신의 위치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아서와의 관계도, 앞으로의 자신의 역할도.
결코 자신은 친구들의 행복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위해 곁에 있을 것이다.
멀린의 푸른 눈이 깊게 가라앉은데 비해, 올려다본 그웬의 눈은 의아함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멀린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뒤에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아서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멀린, 너 답지 않게 왠 연극같은 짓이야?"
멀린은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대답했다.
"아서, 나 답지 않다니? 나도 가끔은 숨기고 있던 매너를 뽐내고 싶을 때가 있는 거라고. 특히 이런 경사스런 날에는 말이야-"
"그런건 '숨겨왔다'가 아니라, '짜낸' 거라고 하는거야. 어색하니 관둬라."
"저렇다니까... 그웬, 너도 알다시피 아서는 저렇게, 사람볼줄도 모르고 천방지축인 녀석이니 잘 보살펴줘. 이제는 네가 있으니 맘이 놓인다, 정말이지."
"멀린, 넌 자주 내가 왕이라는 걸 잊는 것 같은데- 내가 이렇게 관대한 왕이 아니었다면 넌 이미 말로도 몇번 불경죄로 목이 달아났을거다. 고마운줄 알아!"
둘의 주거니받거니를 지켜보던 그웬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들은 정말. 변함이 없구나-"
멀린은 쓰게 웃고는 잠자코 잡고있던 그웬의 손을 아서에게 건넸다. 아서는 멍하니 그 손을 받아들고는 멀린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선 둘은 더할나위 없는 한 쌍이었다. 아서의 시선을 받아내며 멀린은 왜인지 메여오는 가슴을 누르며 간신히 말했다.
"축하한다, 아서. 이제 그녀는 너의 것이고 너는 그녀의 것이지- 그러니, 이제 가서 연회를 즐겨."
멀린이 그 말과 함께 인사하듯 조금 고개를 숙여보이자 두 부부는 화답하듯 웃어보이고는 다시 연회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멀린은 다시 몸을 조금 뒤로 물리며 조용히 그 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장식된 붉은 휘장의 그늘이 멀린의 몸을 감쌌다.
-
무르익었던 연회가 대강 정리되자, 기사들과 멀린은 성을 나와 시내의 펍으로 향했다. 모두의 야유에도 불구하고 아서는 술자리를 마다하고 그웬과 자리를 떴고, 그러니 모두 아쉬운 마음에 자기들끼리라도 자리를 가지자고 뭉쳐 나온 것이다.
"원래 이런 날엔 신랑을 잔뜩 취하게 해야하는 법인데... 전하도 남자답지 않게 몸을 사리시고 말야."
퍼시발이 투덜대며 말하자 엘리얀이 말했다.
"심보하곤- 좋은건 좋은거지만 이런 날 인사불성이 되게 할 순 없잖아?"
"어- 네가 뭘 모르는구나 엘리얀? 그러니까 더더욱 정신 못차릴 때까지 먹이는거지! 부럽잖아! 으으..."
"이해해줘라 퍼시발. 엘리얀도 자기 누님이 첫날밤부터 쓸쓸한건 싫어서 그러는거 아니겠냐... 우리가 이해를... 윽?"
엘리얀은 잠자코 가웨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과장되게 비틀거리던 가웨인은 이내 엘리얀에게 어깨동무를 하곤 유쾌하게 웃었고, 일행은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술집에 들어섰다.
문을 열자 안쪽은 이미 사람들의 유쾌한 웃음소리로 시끌했다. 잠자코 따라오던 멀린은 문 앞에서 주춤했다. 모두의 기세에 못이겨 따라오긴 했지만 왠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시큰거리던 가슴은 연회에서 몇잔 마신 와인으로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까지 조금 욱씬거려온다. 앞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빛은 지금의 멀린에게는 너무나도 밝았다.
"멀린! 안 들어오고 뭐해!?"
주저하던 멀린은 재촉에 결국 안으로 들어갔다. 차라리 정신없는 편이, 오늘 밤에는 어울릴거라고 생각하면서. 적어도 오늘 하루만은, 흠뻑 취해서 모든걸 잊을 것이다. 운명도, 그리고 행복하게 그웬을 바라보던 아서도, 이 정의내릴 수 없는 아픔도.
-
"멀린? 어이, 정신차려-"
가웨인은 테이블에 널부러진 멀린의 상체를 흔들며 그를 불렀다. 하지만 잔뜩 취한 멀린은 대답은 커녕 몸 가누기도 힘들어 보인다. 가웨인은 그런 멀린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젠장... 아까 그렇게 마셔댈 때 말렸어야 하는데. 술도 약한 녀석이..."
"말렸지만 소용없었지. 이게 멀린에겐 최선이었을지도 몰라-"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리온은 테이블에 쓰러진 술병을 조심스레 치우고는 멀린을 제대로 일으켜보려 했지만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멀린의 몸은 인형마냥 쓰러질 뿐이다. 가웨인은 멀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말했다.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 내가 방에다 옮길테니 뒤를 부탁해."
무엇인가 말하려고 입을 벌렸던 리온은 자신을 바라보는 진지한 가웨인의 시선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리온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멀린의 이마에 제멋대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몇번인가 쓸어넘기고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
가웨인은 이미 자고있는 가이우스를 깨우지 않으려 발소리를 죽여가며 멀린의 방까지 그를 옮겼다. 침대위에 조심스레 멀린을 내려놓은 가웨인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멀린을 내려다보았다.
술기운 탓인지 상기된 뺨. 눈가는 마치 울기라도 한 것 처럼, 지금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붉다.
아서 때문에 이러는거야, 멀린?
가웨인은 몸을 숙여 멀린의 스카프를 끌러내고, 불편해보이는 재킷을 벗겼다. 그리고 옆에 놓여있는 수건에 물을 조금 적셔와 침대맡에 앉아서는, 서툰 손놀림으로 멀린의 이마에 맺힌 땀을 조금씩 훔쳐냈다.
"으음..."
시원한 감각에 조금 정신을 차린 듯, 멀린은 뒤척이며 입을 달싹거렸다.
"멀린..."
가웨인이 나지막히 그를 부르자, 멀린은 힘겹게 눈을 뜨더니 초점이 맞지 않는 희미한 시선으로 가웨인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가웨인이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멀린의 뺨을 쓸어내리자, 멀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눈을 감더니 잠시 후 더듬거리며 떨리는 손을 올려 뺨에 닿아있는 가웨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로 가웨인의 손을 가져간 멀린은 그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뜨거운 체온과 숨결에 가웨인은 움찔했다. 뒤이어 손가락께를 입술로 더듬던 멀린은 그것도 힘에 부쳤는지 잡고있던 손에서 힘을 뺀다. 가웨인은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내려 멀린의 도톰한 입술을 더듬었다. 멀린이 움찔하며 다시 긴 숨을 내뱉는가 싶더니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중얼거렸다.
"......"
"멀린...뭐라고?"
가웨인은 숨을 죽이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귀를 기울였다.
"...아서...."
가웨인은 그대로 몸을 굳혔다. 작게 시작한 멀린의 속삭임에 불규칙한 숨소리가 섞이고, 그것은 이내 흐느낌과도 같은 소리로 변해갔다. 그렇게 아서의 이름을 되뇌이는 멀린의 눈에서 눈물이 한줄기 흘러나와 베개를 적신다.
"흑... 아서... 아서-"
젠장- 가웨인은 심장을 조이는 것 같은 시린 통증에 이를 사려물었다. 계속 아서의 이름을 부르는 멀린의 목소리가 그를 괴롭게 했다. 그만해, 멀린. 내 앞에서 다른 녀석의 이름을 부르며 울다니-
"읍..."
더 이상 듣고있을 수 없었다. 가웨인은 멀린의 입을 막듯이 달려들어 그의 입술을 겹쳤다. 홧김에 겹친 입술은 놀랄만큼 따듯하고 부드러워서, 가웨인은 아찔함을 느꼈다.
가웨인은 놀란 듯 내뱉어진 멀린의 숨까지 삼키며 그대로 벌려진 멀린의 입안으로 침범했다. 잡아먹을 듯이 입술을 삼키며 가웨인은 정신없이 키스했다. 멀린의 부드러운 입술과 혀끝에서 전해지는 독한 술맛을 느끼며 혀를 놀린다. 혀가 얽힐 때마다 진하게 들려오는 질척이는 소리. 그 길게 이어지는 집요한 키스에, 숨가쁘게 몰아쉬는 멀린의 호흡소리와 신음소리를 들으면서도 가웨인은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려다본 멀린은 눈은 꼭 감긴 채로 떨리고 있었다.
이대로, 자기 것으로 하고 싶다는 원시적인 욕망이 솟아오른다.
머리맡에 힘없이 떨어져 있던 멀린의 손이 움찔거리며 밀어내려는 듯이 올라왔지만 여전히 술기운 탓에 제대로 된 행동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가웨인은 멀린의 양 손을 그대로 내리누르며 잡아먹을듯한 키스를 계속했다.
"...응..흑..."
멀린의 달콤한 숨소리가 들려오자, 가웨인은 오싹함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걸 느꼈다. 젠장- 가셨던 술기운까지 오르는 기분에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이대로 계속 해버린다면?
그 고조되는 충동에 제동을 걸듯이 갑자기 위화감이 치밀어올랐다. 동시에, 그 엉망인 머릿속에서 예전 리온이 한 말이 불쑥 스쳤다.
-멀린은 전하의 시종이다. 너의 것이 아냐.
가웨인은 순간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동작을 멈췄다.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멀린이 가쁜 숨을 들이마시며 반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는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멀린을 내려다보던 가웨인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땀이 스밀 때까지 그러쥐었던 손을 풀고 서서히 멀린에게서 떨어진다. 계속 만지고싶다는 몸의 욕구와, 거부하는 이성이 충돌한다.
이제 완전히 몸을 일으킨 가웨인은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그때 리온을 비웃었지만 자기에게 그럴 자격이 있나? 그는 차라리 바보같은 그의 신념이란걸 관철했다. 자신은 바보같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그 선을 넘지 못한다.
"난 최악이야...미안하다. 멀린."
가웨인은 들을리 없는 멀린에게 작게 그렇게 내뱉고는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
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멀린은 간신히 눈을 떴다. 눈부신 햇살이 창밖에서 비쳐들어온다.
아침이구나- 멀린은 깨질것같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숙취 때문인지 몸은 천근만근이고 속은 울렁거린다. 뱃속이 타들어가듯이 아프다.
옆에 놓여있던 물을 벌컥거리며 다급하게 마시고 나니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것 같았다. 멍하니 둘러본 방안은 어제와 변함이 없고, 밖에서는 여느때와 다름없는 생활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또 언제나와 같은 아침이다.
멀린은 자기 손으로 얼굴을 몇번 쳐 정신을 일깨우며 비틀거리며 침대를 벗어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녁때 술집에 간 이후로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술이 자신의 바램대로 그 시간을 통째로 기억에서 도려내준 것이다.
대가로 남은 건 쓰라린 숙취지만-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문득 목에 걸린 목걸이의 무게감을 느끼고 멀린은 목걸이에 손을 가져갔다. 천천히 줄을 쓰다듬자, 서늘한 금속의 감각이 손가락에 전해져온다.
그리고 동시에, 그걸 걸어주던 아서의 손길이 되살아난다.
[생일 축하한다. 멀린-]
터질것 같이 뛰던 자신의 심장도.
[멀린. 역시 넌 가장 믿을수있고 충실한... 최고의 친구야]
멀린은 손을 뻗어 조심스레 목걸이를 풀어내었다.
손위에 놓여진 팬던트- 그 위에 새겨진 드래곤을 한동안 응시하던 멀린은 차분한 동작으로 그것을 서랍 안쪽 깊숙이에 넣고 서랍을 닫았다.
이제 멀린은 술냄새 나는 옷을 갈아입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여느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방을 나섰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