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lin-리온/멀린] 리온의 선물
BBC 드라마 'Merlin'의 슬래쉬 낙서입니다.
커플링은 리온&멀린. 사실 슬래쉬라 하기도 민망한 건전한 내용입니다. ^^;;
원탁기사중 리온도 꽤 좋아하는 편인데 본편에서는 그다지 많이 안나와서 슬퍼요- 눈에 띄는 캐릭터는 아니죠 확실히...뭐랄까...왠지 융통성 없고 고지식할것같은 반면, 그러면서도 언제나 튀지 않게 조용히 뒤에서 받쳐주는 큰형 느낌?! (물론 제 멋대로 콩깍지지만요ㅋ)
잡담은 여기까지...
[선물]과 좀 연결된 내용입니다. 연결이라기보담...그냥 짧막한 곁다리 이야기네요.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일어난 작은 일들.
그리고 리온이 멀린에게 준 선물을 고르기까지-
숙소 안, 자신의 방에 들어선 리온은 어깨에 힘이 풀리는걸 느끼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오후의 햇빛이 들어와 방안은 밝다. 하지만 방안에 있는 것보다는 밖에 있을 일이 많은 터라 방 안은 생기가 없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생활감이라기 보다는 정체된 느낌의 방. 그래도, 바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면 쉴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기에 리온은 안도감을 느꼈다.
평소라면 회의니 훈련이니로 성안을 돌아다니고 있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며칠 후 있을 사절단 방문 때문에 아서를 비롯한 고위 대신들은 그걸 준비해야했고, 다행스럽게도 거기에 기사들은 필요 없었다. 나중에 병사 사열이나, 보안 등의 준비는 해야겠지만 당장은 아니다. 아마, 연회담당 시종들은 지금부터 꽤나 바빠지겠지만.
망중한- 그 말 그대로였다. 자율적으로 훈련을 할 수도 있었지만 리온은 그냥 휴식을 택했다. 가끔은 느긋하게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창문을 적당히 열고, 옷을 좀 더 편한 것으로 갈아입고, 리온은 테이블에 앉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밝은 하늘이 낮설면서도 아름답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시선을 거두고 테이블 위에 놓여져있는 책을 집어들었다. 기사단 녀석들이 보면 답지 않다고 비웃겠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고는, 조금 방만하다 싶을 정도의 자세로, 깊숙히 기대앉아서 책갈피 부분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똑똑똑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들려온 노크소리에 리온은 퍼득 책에서 눈을 떼었다. 올 사람은 없을텐데 누구지?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로한 리온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들어오라고 말했다.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선 것은 멀린이었다. 전혀 예상밖의 인물이 등장하자 리온은 놀람에 잠시 굳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인사했다.
"오, 멀린? 여긴 왠일이야?"
"리온, 쉬는데 방해해서 미안해요. 여기 있을거라고 그러길래..."
"괜찮아. 무슨 일이라도 있어?"
"물어볼게 있어서요... 저번에 약초 많이 나는 곳을 발견했었다고 했지요? 급한건 아니지만 어딘지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멀린은 쑥스러운듯 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말하더니, 리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테이블에 다가와 조심스레 가지고 온 종이뭉치를 펼쳤다. 카멜롯 근처의 지도였다.
"여기다 표시만 해 주시면 제가 찾아갈 수 있을 거에요."
리온은 펼쳐진 지도를 한번 훑었다. 몇번 손을 왔다갔다하며 가늠하던 리온은 어느 한 부분에 철필로 동그라미를 치고는 멀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음... 이쯤이긴 한데, 숲 속인데다 좀 가려진 곳이라 찾기 힘들지도 몰라. 그리고 꽤 흩어져 있었으니..."
"음, 알겠어요. 잘 살펴봐야겠네요. 고마워요 리온!"
생긋 웃어보인 멀린은 다시 지도를 말아들더니 고개를 조금 숙여보이고는 금새 나가려 했다. 리온은 자기도 모르게 멀린을 불러세웠다.
"멀린, 잠깐만..."
"네?"
"약초 캐러 언제 갈 예정이지?"
"아... 오늘 좀 시간이 비길래, 지금 가려구요."
"그럼 잘 됐네. 내가 같이 가서 어딘지 알려줄게."
멀린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지자, 리온은 갑자기 머쓱해져서 급히 말을 이었다.
"아, 물론 네가 괜찮다면- 나도 지금부터는 일정이 없어 한가하거든."
멀린은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으나, 이내 씩 웃고는 말했다.
"그래주면 저야 너무 좋죠. 그럼 제가 말을 내올테니 광장에서 만나요."
-
"흐음...쉬는 시간인데도 기합이 들어가있네요-"
"응?"
멀린은 뒤이어 자기 말에 오른 뒤에 말했다.
"기사단 망토까지 할 필요없었을텐데... 거추장스럽지 않겠어요?"
그 말에 리온은 자기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옷은 그저 평상복이었지만, 칼을 메고 나올때와 마찬가지로 반쯤은 습관적으로 망토까지 걸치고 나온 것이다.
"아- 난 이게 더 익숙하니 괜찮아. 없으면 오히려 어색할걸."
"정말이지... 리온 답네요."
멀린이 그렇게 말하며 키득거리자 리온은 얼굴을 조금 붉혔지만 싫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이상하게도 멀린이 웃는 모습에는 어딘가 마음이 풀리는 구석이 있다.
성을 빠져나와 둘은 들판을 달려갔다. 멀린이 잘 뒤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한 리온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처음 멀린이 아서의 시종이 되었을 때, 사실은 그다지 탐탁지 않았다. 똑부러지게 자기할일만 해내는 여느 시종들에 비해, 멀린은 허둥대고, 참견도 많았다. 그래, 시종답지 않았다. 언제나 아서의 곁에 붙어있으려 했고, 주변 모든 것들에 자기일처럼 뛰어다녔다. 그를 위해 몸을 던지고, 눈물을 흘린다. 그런 모습을 보는 사이, 그 열정을 리온은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느새 멀린은 아서에게, 기사단에게 없어서는 안될 동료가 된 것이다.
숲 속을 한참 지나, 오솔길을 벗어나 조금 더 들어간 곳에서 리온은 멈췄다.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옆으로 꽤 넓은 풀밭이 펼쳐졌다. 새파란, 이름모를 풀들이 가지런히 자라나 있다.
멀린은 말에서 내리자마자 감탄을 내뱉고는 걸어내려가 풀들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바로 도구들을 꺼내 약초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리온은 그 열성적인 모습에 미소짓고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셔 보았다. 청결한 숲의 향기가 폐 깊은 곳까지 시원하게 만들어주었다.
"리온! 여기 정말 좋네요!! 물이 근처에 있어서 그런지 다들 신선하고 좋아요!"
뒤를 돌아보며 들뜬 목소리로 소리치는 멀린에게 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모으려면 시간 좀 걸릴거 같은데 괜찮겠어요?"
"내 걱정은 하지 마. 나는 나대로 쉬고 있으면 되니까. 그보다 안 도와줘도 돼?"
"우흐흐... 약초 캐는건 제가 리온보다 훠얼씬 위일껄요? 초보자는 그냥 거기서 놀고 있어요!"
리온은 피식 웃고는 말안장에 매달린 가방에서 아까 읽다만 책을 꺼내들고 적당한 나무아래 가서 털썩 주저앉아 읽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물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멀린이 움직이며 스치는 풀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조용하면서도 어딘가 마음을 들뜨게 하는 소리였다. 리온은 이따금씩 책에서 눈을 떼고 멀린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
바스락-
어느순간 들려온 작지만 낮선 소리에 리온이 반사적으로 몸을 긴장시키며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자, 거기엔 어디서 나타났는지 토끼가 몸을 낮추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뭐야, 그냥 토끼잖아- 리온은 피식 웃고는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려다 토끼가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하자 호기심에 계속 바라보았다. 연갈색의 털을 가진 토끼는 겁도 없이 멀린이 일하고 있는 근처까지 다가갔다. 멀린은 약초에 정신이 팔렸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멀린의 뒷모습과 토끼의 뒷모습. 그 둘의 모습이 우스워서 리온은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이제 거의 근처까지 간 토끼는 고개를 쳐들고 귀를 쫑긋거렸다. 멀린은 그제서야 뭔가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가, 옆에 무언가 있는 걸 보고는 놀랐는지 움찔하며 몸을 옆으로 뺐다. 그 갑작스런 움직임에 놀랐는지 토끼도 잠시 경계태세를 취했다. 멀린은 주저앉은 채로, 자신을 놀래킨 '겁나는 동물'이 토끼라는 걸 깨닫고는 자기도 어이가 없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리온쪽으로 홱 고개를 돌려 방금 껄 봤는지 살폈다.
리온이 황급히 책을 더 끌어올려 시선을 가려 못본척 하자, 멀린은 안도의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토끼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어떨땐 무모할만큼 용기있다가도 결국은 겁이 많다니까- 리온은 이 작은 사건이 귀여워서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으며 다시 둘을 관찰했다.
토끼와 잠시 눈싸움을 벌이던 멀린이 주변의 풀을 하나 뜯어 생긋 웃으며 조심스레 토끼에게 내민다. 토끼는 흥미가 생긴 듯 풀 쪽으로 코를 내밀고 살폈지만 코만 벌름거릴 뿐,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조급해진 멀린이 조금 더 풀을 가까이에 내밀자, 토끼는 홱 고개를 돌리더니 거의 들릴만큼 콧방퀴를 뀌고는 저 멀리로 뛰어가버렸다. 졸지에 거부당한 꼴이 된 멀린은 벙찐 상태로 그대로 굳어 있었다.
"푸흐흡..."
리온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리자 멀린이 다시 리온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미안한 듯 쳐다보며 온몸을 떨며 웃던 리온은 이제 아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멀린은 말없이 리온을 째려보며 얼굴을 붉히고는 다시 등을 돌려버렸다.
-
"다 됐어요!"
저 멀리에서 멀린이 걸어오고 있었다. 이제 슬슬 저녁시간이 다가오는 참일 터였다. 딱 좋은 시간에 돌아가겠군-
"필요한만큼 다 모았어?"
"오, 그 이상이에요. 이거봐요 가방이 터질 지경!"
꽤 큼직한 가방이 불룩해져 있었다. 보란듯이 가방을 툭툭 친 멀린은 리온이 있는 쪽으로 올라오려 경사진 곳에 발을 디뎠다. 가방 때문에 거추장스러운지 낑낑거리며 무게중심을 바꾼 멀린이 비척거리며 올라오자, 리온은 도와주려고 급히 다가갔다.
"으앗!?"
리온이 내민 손을 잡으려 한쪽 손을 뻗던 멀린은 흙이 밀려나며 발이 미끄러져 중심을 잃고 휘청했다. 리온이 황급히 손을 낚아챘지만 이미 뒤로 넘어지고 있던 멀린의 몸을 지탱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기세에 리온도 같이 아래로 넘어졌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땅과 부딪힌 양 팔이 아려와 리온은 인상을 찌푸렸다. 흙과 풀냄새가 확 끼쳐온다. 간신히 지탱한 두 팔로 몸을 일으키며, 리온은 정신을 차리려 몇번 고개를 흔들고는 초점을 맞췄다. 아래에는 멀린이 깔려 있었다.
내려다보자, 멀린은 제대로 넘어졌던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로 무방비하게,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감긴 눈이 아픔때문인지 조금 찡그려져 있다. 싱그러운 녹색 풀들 위로 새카만 짧은 고수머리가 제멋대로 흩어져 있다. 머리카락과는 대조적으로 새하얀 얼굴과 얇은 목선이 눈을 사로잡았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작게 들려오며 거기까지 도달한 바람이 한번 풀들을 스치고 지나가자, 숨막힐듯한 숲의 향기가 그를 감싼다.
가슴이 묘하게 요동쳤다.
멀린의 입술에서 새어나온 신음소리에 퍼득 정신을 차린 리온은 황급히 몸을 일으키고는 멀린을 불렀다.
"멀린, 괜찮아??"
멀린이 부스스 눈을 뜨자, 파란 눈동자가 흐릿하게 리온을 응시했다. 조금씩 초점을 맞춘 두 눈에 생기가 돌아온다.
"으... 엉덩이가 좀 아프지만...괜찮은거 같아요. 리온은요?"
"난 멀쩡해. 큰일날 뻔 했다- 뒤가 풀밭이었기 망정이지 돌이라도 있었으면..."
"미안해요. 리온까지 잡고 쓰러져서... 그래도 안 잡아줬으면 더 세게 부딫혔겠죠- 고마워요."
"아... 아니 뭐... 별거 아니야. 둘다 안 다쳐서 다행이다. 일어날 수 있겠어?"
멀린은 내밀어진 손을 잡고 일어났다.
리온은 서늘한 손에 와닿는 작은 손의 체온이 기분좋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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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느지막히 성에 도착했을 때, 왠일인지 아서가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서를 보고 반갑게 쪼르르 달려간 멀린은 말없이 사라졌던 죄로-분명 그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꿀밤을 한대 맞고도 이내 기운차게 아서에게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서는 못말린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꿔다논 보릿자루처럼 서있는 리온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하며 인사를 건넸다. 멀린은 다시 리온에게 다가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말을 건네받아, 아서와 함께 걸어갔다.
다시 멀린은 제자리로 돌아갔고, 이젠 자신도 그럴 때였다.
리온은 무언가 이야기하며 걸어가는 둘의 모습에 왠지 허전한 기분을 느끼며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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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리온은 멍하니 시내를 지나가고 있었다. 어제에 이어 모두가 꺼리는-특히 아침잠이 많은 가웨인이 몸서리치는- 아침 순찰 당번이었지만 리온은 아침시간을 더 좋아했다. 아침의 분주한 생활의 소리를 듣는 것은 또 다른 맛이 있다.
시장은 벌써 대부분 활기를 띄고 있다. 리온은 빵굽는 냄새와 과일과 꽃의 향기를 지나, 이제 마악 열기 시작한 옷 가게와 장신구 가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접어들었다. 무심히 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때, 어떤 감각이 리온의 발을 잡아챘다. 리온은 같이 걸어가던 기사 둘을 먼저 보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어서오세요, 기사님. 아침부터 수고가 많으시네요."
리온이 멈춰서자 가게 안에서 여주인이 나와 붙임성있게 말을 걸어온다. 리온은 인사를 건네고는 앞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들을 훑어보았다.
"지나가는데 좋은 향기가 나길래... 좀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아~ 아마 그 향기는 이걸 거에요. 요즘 제일 인기 좋은 향수죠. 꽃이랑 과일향을 배합한건데..."
여주인이 작은 천에 향수를 살짝 묻혀 건네자 화려한 꽃 향기가 확 밀려왔다.
"음, 이건 아니었는데... 좀 더 시원한... 숲의 향기같은-"
"아, 그거라면 혹시 이게 아닐까요?"
그녀는 좀 더 안쪽에 있는 병을 꺼내더니 다시 리온에게 권했다. 아까 자신을 멈춰세웠던, 그 향이다. 청결하면서도 달콤한, 숲을 떠올리게 하는 향기.
"네.... 이거에요."
리온이 작게 미소짓자, 여주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도 참 좋은 향수죠. 유행타지 않고, 소박하지만 매력있는...남녀 가리지 않고 잘 어울릴만한 향이거든요. 직접 이렇게 골라내는 손님은 드문데, 취향이 좋으시네요."
여주인의 칭찬에 머쓱하게 웃어보인 리온은 하나를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대금을 치렀다. 그녀는 서랍에서 리본을 꺼내며 말했다.
"선물하실 분이 뭐랄까- 청초한 느낌의 레이디이신가봐요? 보통 요즘 여자들이라 하면 귀엽고 화려한거만 찾기 마련인데... 이런 향수가 어울리실 분이라면 아무래도-"
"네??"
"호호, 제가 워낙 이런거 얘기하는걸 좋아해서- 실례였다면 죄송해요. 향수라는게 워낙, 선물하시는 분이 받을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맞춰 고르게 되는 물건이다 보니- 고르신 향을 보면 대충 어떤 사람인지도 상상하게 되거든요."
"아..."
"연상은 아닐거같고...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분이려나요? 귀엽지만, 그래도 꽤 어른스러운 분위기의?"
리온은 순간 머릿속에서 멀린을 떠올리고 조금 당혹했다. 여자도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고민한거도 아닌데... 하지만 눈을 빛내며 물어오는 여주인 앞에서 딱히 말을 정정하기도 힘들었다. 리온은 조금 어깨에서 힘을 빼고, 대답했다.
"뭐... 동생같은 녀석이죠. 그저 어린애 같이 보였었는데..."
그 말에 그녀는 한층 생기를 띄며 말했다.
"어머~~~!! 너무 좋네요!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커플들이 꽤 많죠~ 마냥 보듬어줘야 될것만 같다가도 그게 어느새- 랄까... 아휴, 누군지- 기사님의 마음을 낚아채다니 부럽네요."
잔뜩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쏟아내는 여주인 덕에 리온은 식은땀을 흘렸다. 대충 둘러대고는 포장이 끝나자마자 잽싸게 빠져나온 리온은 가게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진 다음에야 조심스레 손에 올려진 상자를 내려다봤다.
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산 거지?
딱히 목적을 갖고 산건 아니었다. 반쯤은 충동적인 결정이었기에 리온은 뒤늦은 당혹감을 느꼈다. 이걸 과연... 전해줄수나 있을까?
리온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것을 조심스레 주머니에 갈무리하고는 일행이 있을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한동안 그것은 리온의 테이블 서랍 안에서 잠자게 되었다.
-
가이우스의 집무실 앞에서 리온은 잠시 서성였다. 손에는 오랜만에 빛을 보게된 선물이 쥐어져 있다.
생일! 그래, 생일이 있었지- 생일 선물로는 안성맞춤일 것이다. 기사들이 나누는 잡담 중에 알아낸 멀린의 생일 소식에 리온은 순식간에 서랍 안을 떠올렸다.
일단 핑계(?)도 생겼겠다, 다른 이들보다 먼저 줘버리자 싶은 마음에 아직 당일이 되지도 않았는데 리온은 직접 멀린의 방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그냥 줘버리면 되지- 했던 것이, 문앞에 서니 좀 망설여졌다. 어떻게 말해야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리온은 심호흡을 하고는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차라리 멀린이 없으면 가이우스에게 전해주면 끝이겠지. 저녁시간도 꽤나 지났으니 가이우스는 있을 테고, 멀린은-
"어라? 리온?? 왠일이에요?"
리온의 기대을 져버리고 얼굴을 내민 것은 멀린이었다. 리온은 좀 당황했지만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아... 그게, 가이우스 안에 계시니?"
"어, 지금 잠시 나가셨는데요. 갑자기 환자가 생겨서... 오래는 안걸리겠지만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된거, 차라리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뻘쭘한 모습을 가이우스에게 안 보여도 되니까.
"크흠...그, 그렇구나, 지금 바쁜가?"
"저요? 아뇨- 그냥 쉬던 참이에요. 무슨 일 있나요? 제가 도울수 있는거면 가이우스 대신 제가..."
"아니, 아니야... 너한테 뭐 좀 줄게 있어서 온거야."
멀린의 눈이 의문으로 커지는걸 보며 리온은 대뜸 손에 든 상자를 내밀었다.
"조금 있으면 생일이라길래... 이른 감이 있지만... 축하한다."
내밀어진 선물을 받아드는 멀린의 얼굴은 온통 '나 놀랐음' 이라고 써붙인 듯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멀린을 바라보며 리온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내가 선물주는게 그렇게 의외인가? 너무 놀라면 내가 민망한데..."
"으어어... 아 아뇨, 미안해요. 그게... 생각지도 못해서. 제 생일은 어떻게 알고..."
"가웨인이야 늘 시끄러우니까. 그래도 이번엔 덕분에, 알게 되서 다행이야."
"네??"
"음... 어쨌든, 열어봐. 마음에 들면 좋겠는데-"
멀린은 조심스레 받아들고는 조그마한 상자를 열고 작은 병을 꺼냈다. 예쁜 유리병 목에는 초록색 리본까지 매여져 있었다. 조금씩 흘러나오는 향기가 멀린의 코를 간질였다.
"우와!! 이거 향수네요?? 이렇게 파는구나... 직접 본건 처음이에요. 향기 너무 좋다..."
병을 연신 만지작대며 신기해하는 멀린을 보며 리온은 왠지 안심했다.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리온은 웃으며 말했다.
"향수 써본적 없나보구나. 어떻게 쓰는건지 가르쳐줄까?"
멀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온은 멀린에게서 향수를 받아들고는 조심스레 봉해져있는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에 액체를 조금 발라 그대로 손을 멀린에게로 가져갔다.
리온의 손이 천천히 멀린의 얼굴을 스치며 목덜미 쪽으로 내려가자 멀린이 조금 움찔했다. 반사적으로 내려깐 눈이 파르르 떨리며 긴 속눈썹이 흔들린다. 놀라지 말라는 듯이 잠시 멈춘 리온의 손은 살짝 멀린의 귓가에 내려가 연약한 피부를 문지르며 손가락으로 향수를 발랐다. 차가운 액체가 목에 닿자 멀린의 몸이 반사적으로 떨리는게 느껴진다. 긴장한 듯 내뱉는 숨소리가 달콤했다.
리온은 홀린 듯 다시 한번 손을 뻗어 이번엔 반대편에 똑같이 향수를 얹었다. 그리고 뚜껑을 닫고는 아직 촉촉하게 향수가 남은 자신의 손을 가져가 멀린의 손목 안쪽에 문지르고 그대로 손목을 감싸쥐었다. 손목에서 잘게 뛰는 맥박이 리온의 손으로 전해진다.
리온은 말없이 쥐고있던 손목을 끌어올리며 얼굴을 살짝 내려 향기를 맡았다. 조금만 숨을 들이마셔도 멀린의 체취와 섞인, 신선하고도 달콤한 숲의 향기가 밀려들어왔다.
"... 다 된거에요?"
주저하는 듯한 멀린의 말에 퍼득 정신을 차린 리온은 그제서야 손을 놓았다. 넋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는 리온에게 다시 멀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발라도 향기가 강하네요? 신기하다... 안 알려줬으면 잔뜩 바르고 후회할뻔 했어요. 고마워요, 리온."
당황 속에서 리온은 연신 고맙다는 멀린에게 대강 인사를 하고는, 재빨리 복도를 걸어갔다. 왜인지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서둘러 자기 방으로 돌아온 리온은 문을 닫자마자 문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향기는 아직도 주변을 맴돌고 있다. 두 손을 끌어올려 얼굴을 감싸자 숲의 향은 더욱 진해졌다.
무언가를 연상하게 하는, 그런 향이다.
-Fin
어쩌다보니 향수가 등장해서... 이 시대 이곳에 향수가 있을리 없을테지만-_ㅜ 흐...취향은 존중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