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lin-아서/멀린] 선물
BBC 드라마 'Merlin'의 슬래쉬 낙서입니다.
커플링은 아서&멀린, 잘못 들어오신 분은 그냥 뒤로가기를 클릭...
멀린에게 쏟아진 원탁 기사들의 선물공세-
그리고 그 자그마한 '애정의 표시'들에 위기감(...)을 느끼는 아서.
"멀린? 너 그거 뭐냐?"
"엉? 뭐?"
아서는 멀린의 자켓쪽을 손짓했다. 자켓 깃쪽에 자그마한, 못보던 펜던트가 걸려 있었다. 단순한 디자인에, 멀린의 눈색과 같은 작은 돌만이 장식하듯 박혀 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소박한 멀린의 옷과 나름대로 어울렸다. 저런걸 사다니...무슨 바람이 분...
"아, 이거? 엘리얀이 준거야. 직접 만든거래! 손재주도 좋아-그치?"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멀린을 아서가 얼굴에 ??? 물음표를 잔뜩 띄우고 바라보자, 그는 몇번 헛기침을 할 뿐, 더이상 설명하지 않으려 했다. 어쩔수 없이 아서는 되물었다.
"엘리얀? 걔가 왜 너한테 뭘 주냐? 뭐 빚진거라도 있대??"
그 말을 들은 멀린의 표정이 묘하게 찌푸려졌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친구끼리 선물 주고받고 할수도 있는거지 뭘. 다 너같은줄 아냐?"
그말에 졸지에 꿀밤을 맞은 멀린은 투덜거리며 빨래감을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 아서는 아직도 찜찜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건 곧 그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오후쯤에 순찰을 돌다가 가이우스의 약배달을 돕는 멀린과 마주쳤을 때, 아서는 또 작은 변화를 눈치챘다.
"여어- 수고많다. 근데, 요즘엔 수입이 꽤 좋은가본데?? 가방도 새로 사고?"
멀린은 메고있는, 새것 티가 팍팍 나는 가죽가방을 이쁘다는 듯 도닥이며 말했다.
"내가 이런 좋은거 직접 사겠어? 누가 줬어."
아서의 눈이 빛난다 싶더니 그대로 멀린을 계속 추궁했다. 멀린은 누가 줬든 뭐가 중요하냐고 저항하다가, 결국 실토했다.
"어휴, 퍼시발이 줬어. 이제 속이 시원하냐?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
또 밀려오는 위화감에 멍때리고 있는 아서를 한심한듯 바라보며 한숨을 쉰 멀린은, 그를 그냥 내버려두고 옆을 바쁜듯이 지나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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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랜만에 기분전환이나 할 겸 말을 끌고 산책가기로 결심한 아서는 그의 시종이 말을 끌고 오기를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별다른 일도 없어서 마음이 느긋했고, 날씨도 적당한 햇빛과 함께 쾌청- 기분좋은 바람도 불었다.
멀린이 말 두마리를 토닥이며 이끌고 왔다. 아서가 주로 타는 연한 갈색의 말의 고삐를 넘겨주러 멀린이 가까이로 다가왔을 때, 숲의 향기와도 닮은 청결하지만 달콤한 향기가 아서의 코에 확 와닿았다.
"킁... 멀린, 어디서 향수 냄새 나지 않냐? 꽤 좋은 향인데... 누가 지나갔나?"
"......"
대답은 없었지만 멀린의 얼굴이 잠깐 붉어진 것을 아서는 놓치지 않았다. 고삐를 받아든 아서는 남은 한 손으로 멀린의 어깨를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멀린이 바둥대는것도 무시하고 목덜미 근처에 코를 들이댔다.
"허? 너한테서 나는 거였어? 뭐야... 설마 향수도 뿌리냐?"
"야, 일단 이거좀 놓고 ...정말- 나도 기분 좀 내볼려 그랬다 왜!"
"얼씨구... 시종님이 향수를 다 뿌리시고- 오늘 뭐 데이트라도 있냐?"
"...그런건 아니지만, 그냥... 있는데 썩혀두기엔 아깝잖아."
멀린이 자기도 머쓱한듯 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대답하고는, 잠자코 아서가 말에 오르는걸 도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번 알아챈 향기는 계속 슬쩍슬쩍 아서의 코를 자극하며 주위를 맴돌았다. 아서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그건 또 누가 준건데?"
"왜... 내가 향수 사지 말란 법이라도 있어?"
"네가 그런거 살 인간이냐?? 게다가 이런 혼합향은 그 귀족나으리들도 자주는 안 쓰는 물건인데... 말해봐."
"어라? 이건 뭐 다른거야? 비싼거야?"
"멀린-!!"
"쳇, 그래. 나도 나랑 잘 안어울린다는 건 인정하지. 리온이 줬어."
아서는 자신의 예감이 맞아떨어지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싱숭생숭한 기분을 느꼈다. 번듯한 귀족가의 자제인 리온이니 향수 정도 선물이라고 해도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시종한테 향수라니- 안어울린다기 보다는 좀 과한 선물 아닌가?게다가 남자끼리 향수 선물은 좀- 아서는 생각했다. 늘 그런건 아니지만 보통, 향수 선물에 담긴 은유는 기본적으로 로맨틱하고 에로틱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친밀한 사이가 아니면 선물로 잘 안 건네게 되는게 향수인데...
어제오늘 발견한 점들을 다시 되씹어보며 아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물론 평소에도 다들 자기들 중 제일 어린 멀린을 귀여워하긴 했지만, 갑자기 요 며칠 새 선물들을 쏟아내는건 무슨 일이지? 그것도 꽤나 정성이 담긴 것들이다. 직접 만들었다는 펜던트, 진위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자기가 손질해서 줬을듯한 가죽가방, 구하기 힘든 향수...?
대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아서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자신을 다독이며 잠자코 말을 몰았다. 바람이 불어올때마다 멀린에게서 나는 숲의 향기가 자꾸 아서의 마음을 산란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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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의 같은 시각, 아서는 성벽에 딱 달라붙어 몸을 숨기며 성문 건너를 주시하고 있었다. 로우타운으로 이어지는 성문 근처에는 그날따라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이따금씩 지나치던 사람들이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벽에 붙어있는 아서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래며 지나가곤 했다. 그 와중에 정겹게 인사하려고 입을 벌리던 사람들은 아서가 다급하게 쉿! 하며 제지하는 바람에 무안하게 그냥 가던길을 가야만 했다.
아서의 시선 끝에는, 멀린과 가웨인이 있었다.
훈련장 근처에서 만난 둘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멀린이 그대로 가웨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하자, 아서는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뒤를 따라온 것이다. 이게 무슨 꼴이람! 둘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이따금씩 유쾌하게 웃어가며 계속 걸어갔고, 결국 아서는 미행하는 꼴이 되어 여기까지 따라왔다.
여전히 말소리는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가웨인은 멀린을 바라보며 뭔가 얘기하고 있었다. 멀린의 표정에 놀라움이 떠올랐을 때, 가웨인은 자기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뒤지더니 멀린의 눈앞으로 무엇인가 감싸쥔 주먹을 내밀었다. 장난치듯 손을 펼치자 무언가 반짝이는 줄 같은것이 가웨인의 손에 매달려 빛났다. 멀린이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자, 가웨인은 호탕하게 웃더니 멀린을 뒤돌아 세우고는 그의 목에 손을 둘렀다.
목걸이?
멀린의 목 뒤편에서 손을 꼼지락거리던 가웨인은 다 됐다는 듯 멀린의 등을 톡 치고는 다시 그를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그리고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인다. 멀린은 목걸이를 잡고 어색하게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무언가 투덜거리는 듯 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웨인이 그런 멀린의 머리를 강아지 쓰다듬듯 쓰다듬자, 온통 헝클어져 붕 뜬 머리를 가라앉히며 멀린이 가웨인의 어깨를 툭 쳤다. 둘은 다시 웃으며 로우타운 쪽으로 걸어간다.
휘유- 아서는 거기까지 보고는 그냥 시선을 돌렸다. 기대있는 성벽 돌의 차가움이 이제서야 전해져 온다. 왠지 모르게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짜증에, 아서는 괜시리 옆에 있던 돌을 걷어차고는 다시 성으로 걸어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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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됐어. 좀 있다가 잘꺼야?"
침대정리를 마친 멀린이 허리를 펴고 아서를 바라보자, 아서는 뚱한 표정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뚱한 표정을 자기도 모르게 따라하며 눈썹을 찌푸리자, 아서는 손가락만 까닥까닥하며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우씨,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손가락질이야- 멀린은 투덜거리면서도 어쩔수 없이 아서가 앉아있는 테이블께로 다가갔다.
근처까지 가자 아서는 벌떡 일어나더니 테이블을 돌아 멀린 바로 앞에 섰다. 멀린은 뭔 일인가 싶어 벙쪄 있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깝다고 느껴 한발자국 뒷걸음질쳤다.
"뭐, 뭐야."
"가만 좀 있어봐."
아서가 한발자국 다가서 다시 거리를 좁히며 손을 들어올려 스카프를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목언저리를 더듬으며 무언가를 찾아헤멨다. 멀린이 당황하며 몸을 뒤로 빼려했지만 잡혀있는 스카프때문에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다.
"야! 뭐하는건데!?"
더듬대다가 결국 목걸이줄을 손에 그러쥔 아서는 옷아래 숨겨져있던 목걸이를 끄집어냈다. 아서의 손가락 위에서 빛나는 은색의 목걸이는 어디선가 많이 본 모양이었다. 가웨인이 갖고 다니던 그거군. 그렇지만 그것보다는 작은데다, 섬세한 무늬가 새겨져있다.
"이번엔 가웨인이냐?"
"엥, 어떻게 알았어??"
"처...척보면 알지. 난 너같은 바보 아니거든?"
멀린이 그 말에 콧방귀를 뀌더니 아서의 손에서 목걸이를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아서는 놓아주기는 커녕 목걸이를 돌려 이음새를 풀어내려 했다.
"야...아서?!"
멀린이 바둥대며 뒷걸음쳤지만 아서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벽에다 밀어넣고 나서야 잠잠해진 멀린에게서 아서는 결국 목걸이를 풀어냈다.
"시종이 이런거 하고 있는거 거슬려. 하지마."
"뭐??"
멀린이 기가 차다는 눈빛으로 아서를 바라봤지만 아서의 표정은 진지했다.
"아서, 농담이지? 시종은 목이 없냐? 어짜피 밖에 안보일텐데 좀 하면 어때서..."
아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멀린도 슬쩍 화가 났는지 표정을 굳히고는 스카프를 바로했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대신 목걸이는 주시죠."
갑자기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는 멀린 때문에 아서가 우물쭈물하며 그의 손 위에 목걸이를 얹어주자 멀린은 고개만 까닥 하고는 별말없이 방문으로 걸어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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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어제 일 때문에 하루종일 삐져있는게 분명했다. 평소 깐죽대며 조잘대기가 일상인 시종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아서는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며 어색한 공기를 참아내야 했다. 아-정말,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아서는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그런다고 생각이 정리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가웨인이, 아니 다른 사람이 준 걸 그렇게 소중하게 하고 다니는 걸 보니 화가 났을 뿐이었는데- 그런데 내가 왜 화가 난거지??
훈련이 끝나고 옆에서 각자 칼을 손질하거나 정리하거나 하고 있던 기사단을 보며 아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그저 지나가듯 말을 던졌다.
"너네, 멀린한테 뭔가 많이들 줬더구만? 뭐야- 시종부터 챙기냐 너네는?"
그 말에 다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쳐다보자, 아서는 왠지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에 헛기침을 몇번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각자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기사들은 이내 서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 역시 아닌척들 하며 다들 뭔가 준비했구만~ 너는 뭐 줬냐 퍼시발?"
"음, 난 그냥 가방- 들고다니는 가방이 너무 낡아보이길래. 너는?"
"나야 뭐... 특기 살려서 장식하나 만들어줬지. 리온도 뭐 했어요?"
"아하하...나? 난..."
미묘하게 말을 얼버무리는 리온에게 모두가 달려들어 재촉하자, 결국 모든걸 포기한 듯 리온은 실토했다.
"별다른 의미가 있었던게 아니라... 그냥 멀린한테 잘 어울릴거 같아서. 갖고있던 향수인데-"
가웨인이 리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휘파람을 불어재끼자, 리온은 그를 슥 째려봤다.
"휘유- 향수요? 저번에 만났을때 나던 향이 그거구만?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니 더 수상쩍은데, 리온 경."
리온은 뭐라고 더 변명같은걸 늘어놨지만 다들 웃으며 무시하며 리온을 당황하게 했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리온이 가웨인에게 바톤을 던지자, 가웨인은 쿨하게 말했다.
"내꺼랑 셋트인 목걸이. 난 리온과는 다르게 정직하니까 인정하지. 특별히 제작한! 우정의 증표! 워낙 멀린한텐 신세진게 많다보니-"
이번엔 순식간에 야유가 날아들었다. 신세는 무슨, 닭살돋는다는 둥, 음흉하다는 둥, 아서로서는 이해 안될 말들이 오갔다. 한동안 그렇게 왁자하게 떠드는 기사들 사이에서 아서는 할말을 잃고 있었다. 낄낄거리며 주저앉아 검날을 갈던 가웨인이 문득 아서를 올려다보며 물어왔다.
"다들 모른척 하더니, 쯧쯧. 전하도 뭔가 선물하신거 아닙니까? 궁금하네요."
"글쎄...난...."
이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이야기냐- 아서가 혼란 속에서 말을 고르고 있을 때, 가웨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왓다.
"아무리 본인이 생일 챙기는거 부끄럽다느니 안해도 된다느니 해도- 그게 또 주는 사람은 안 그렇잖아요. 그래도 멀린이 제일 붙어다니는 시간이 많은 분이 전하시니까... 일찌감치 주셨나요 아니면 기다렸다 내일 주시려고?"
생일-
아서는 그제서야 모든게 설명되는 기분에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튕겼다. 맙소사, 그럼 그 모든게 그냥... 생일 선물이었다 이거지? 그동안 초조했던게 거짓말처럼 풀리는 느낌에 아서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넌지시 물었다.
"어, 오늘 아니었나? 날짜가 헷갈려서... 내일이 맞나?"
"네, 내일이 정확할걸요. 파티까진 본인이 제발 하지 말자고 했고... 그냥 가이우스가 조촐하게 뭔가 맛있는거 해 먹인다고 했으니 그걸로 됐죠 뭐."
"아아, 그래."
아서는 의아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기사들에게 대강 인사를 하고는 재빨리 성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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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벌써 일어났네? 늦어서 미안- 가이우스랑 이야기가 좀 길어져서..."
아침, 평소보다 조금 늦게 나타난 멀린은 평소랑 다름없이 멋쩍게 웃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어쨌는지, 삐진 건 철회하기로 한 모양이다. 간단히 마음상했던 일을 삼켜버린 듯한 멀린을 보며 아서는 오히려 섭섭함까지 느꼈다. 제일 가까이 있으면서도 뭐든 멀린에 관한 건 뒤늦게서야 알게 되는 느낌이다. 자기한테 중요한 날이면서, 나한텐 왜 얘길 안 한건지.
"아서, 화 안났지? 헤헤... 대신 아침은 잘 챙겨올테니까 기대해."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고- 부산스럽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멀린을 침대맡에 걸터앉은 채로 지켜보던 아서는 등뒤에 놓인 손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멀린, 이제 됐으니까 이리 와봐."
멀린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채 아서 앞에 다가가 서자, 아서는 자기가 앉아있는 침대 옆자리를 앉으라는 듯 툭툭 치며 고갯짓했다. 이제는 의아함을 넘어 의심스러운 표정까지 짓던 멀린은 쭈뼛거리면서도 아서가 시킨대로 옆자리에 가서 조심스레 앉았다.
"눈 감아 봐."
"이번엔 또 뭐냐... 새로운 장난 이런거면 오늘은 제발 관둬줘라 응?"
멀린이 머뭇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아서는 피식 웃었다. 그냥 조용히 하고 시키는대로 해-멀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 후 갑자기 목덜미께에 와닿는 아서의 손가락에 움찔한 멀린이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아서는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제지했다. 눈 뜨지 말고 그대로 있어- 아서는 중얼거리며 스카프를 풀어내더니 목덜미께에 무언가를 바르듯 손가락을 살짝 스치면서 다시 떨어져나갔다. 낮익은, 시원하고 품위있는 향이 코를 자극했다. 아서의 향이다. 멀린은 점점 강해지는 향을 깊이 들이마시며 크게 호흡했다. 숨을 내쉬며 긴장을 조금 풀었을 때 다시 아서의 손이 올라왔다. 감싸안듯 둘러진 팔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다시 그의 존재감을 일깨워 멀린은 다시 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야- 멀린은 점점 선명해지는 두근거림을 느끼며 간신히 말했다.
"아서... 뭐하는건진 모르겠지만, 눈은 좀 뜨고 하면 안될까?"
"정말 말 많네... 거의 다 했어 기다려."
짤랑-하는 소리와 함께 목에 무언가가 걸리는 감각이 느껴짐과 동시에 아서가 탄성 섞인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다 됐다!"
멀린이 눈을 뜨자, 눈 앞에는 팔짱을 끼고 만족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아서가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 멀린."
멀린은 멍한 얼굴로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도톰한 은판 위에 카멜롯의 상징인 드래곤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목걸이에서 눈을 올려 아서를 바라보았을때, 그는 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딘가 기쁜듯한 눈을 하고 멀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생일인거 알고 있었어?"
"크흠, 그 그거야...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너 생일정도도 모르겠냐."
"너니까 모르지. 알려준적도 없는데......왕자가 시종 생일을 알고 있는게 더 이상한거 아냐?"
"끙... 날 뭘로보고. 나도 친구 생일 챙길줄은 안다고."
멀린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아서를 쳐다봤다가 이내 만족스럽게 씨익 웃었다.
"이런, 기대도 안했는데... 고맙습니다, 전하. 소중하게 간직할께."
미소띈 채 한동안 조심스레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내려다보던 멀린은 손을 올려 목걸이를 풀어내려 했다. 그 행동에 아서가 놀라 저지하며 말했다.
"뭐야, 왜 풀려그래-"
"응? 네가 전에 목걸이같은거 하지 말라며."
정말 악의없는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는 멀린을 보며 아서는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저건 그런말을 한 나에대한 반격인가, 원망인가? 눈빛을 봐서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해야겠다고 받아들인 것 같은 눈이었다.
"나도 좀 생각해 봤는데, 네 말이 맞긴 해. 아무래도 시종주제에 장식품 주렁주렁 하고 다니는것도 이상하다 싶더라고. 적어도 일할 때는 빼고 다녀야지. 좀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아...그런의미가 아니었는데. 아서는 속으로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멀린-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 말이 좀 심하게 들렸다면 미안하다. 괜찮으니 꼭 걸고 다녀. 다만..."
아서는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멀린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지나가듯 말을 뱉었다.
"가웨인이 준거 말고, 내가 준걸로..."
왠지 민망한 기분에 사로잡혀 끙끙대는 아서의 마음도 모른 채 멀린은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어느순간 뭔가를 알아챈 듯 웃음을 터트렸다. 멀린이 웃어대자 아서는 이제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왕 이렇게 된거-
"웃기는... 여기 선물 하나 더 있으니까 이것도 챙겨."
아서가 건네준 것은 자그마한 유리병이었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 옅은 황금색을 띈 액체가 들어있다.
"아, 아까부터 나던 향기가 이거구나... 이것도 준다고? 근데 이거 네 향수 아니야? 가끔 맡았던 기억이 있는데-"
"이상한데서 기억력이 좋다니까. 이게 너랑 더 잘 어울려... 그...뭐냐, 갖고있던 거는 방향제로라도 쓰던지..."
작게 궁시렁거리는 아서에게 멀린은 밀려오는 웃음을 참으며 간신히 말했다.
"뭐? 그거 리온이 선물로 준거라고 했잖아. 방향제라니 농담도....."
"으아아아! 어찌됐든 가져가! 그냥 잘 쓰면 되잖아!"
아서는 벌떡 일어나더니 머리를 쥐어뜯으며 창가로 걸어가버렸다. 그런 뒷모습을 보며 멀린은 웃음을 참으려 애쓰면서도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찌할수 없어 미소지었다. 몇일 전부터 마음에 걸려하는거 같더니, 결국 이런 식으로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한다. 아마도 아서는 내 생일이라는걸 몰랐겠지- 멀린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선물이 우선이 되게 하려는 마음이 귀여워서 멀린은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되는데. 이미 나에게는...
"멀린, 근데 말이야..."
생각에 잠겨있던 멀린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서는 뒤돌아선 그대로 말을 계속했다.
"너, 왜 나한테는 일찍 말 안한거야? 선물받은거 뭐냐고 물어봐도 그냥 받은거라고만 하고-"
"아서,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생일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겠어. 안그래도 챙겨받는거도 부끄러운데."
"너 어린애 맞잖아. 하는 짓이나 나이도 나보다 어린게 어디서 어른행세야."
행동하는거는 네가 더 어린애 같거든요, 이 철없는 왕자야- 멀린은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절대 티는 내지 않았다.
"다른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데 네 생일. 왜 나한테만 얘기 안한거지?"
"그거야- 넌 안 물어봤으니까-"
아서가 고개를 돌려 슬쩍 째려보자 멀린은 움찔하며 애써 웃어보였다.
"아서, 알아주고 선물까지...정말 고마워. 너한테 말 안하려고 한건, 부끄럽기도 했고, 네가 굳이 신경 안써도 될 일이라고 생각해서..."
"......멀린, 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좀 섭섭한데. 딴 사람들 축하는 받아도, 내 축하는 필요없었다 이거야?"
멀린은 아서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평온한 말투에서도, 뒷모습에서도 어떤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정말 섭섭하다는건지, 장난스레 하는 말인지, 화가 난 것인지...
"필요없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아서. 단지 나는... 그저..."
멀린은 잠시 주저했지만 그냥 진심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죽을만큼 부끄럽겠지만 일단 이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해서 생일을 챙겨준 아서니까, 솔직하게 대답해볼까-
"난 네가 건강하고 무사하게만 있어주면 그걸로 충분하거든....."
아서의 등이 움찔하는걸 보고 멀린은 고개를 푹 숙였다. 시트를 꽉 그러쥐었지만 뱉은 말의 민망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금새 후회가 밀려왔다. 아서 저녀석, 분명히 웃을게 분명해. 또 남자답지 못하니 뭐니 하겠지. 멀린은 자신의 실수를 원망하며, 아서가 본격적으로 웃어재끼기 전에 나가려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대답이 됐냐? 난 그럼 아침 챙기러 간다!!"
허둥지둥 문으로 향하던 멀린은 갑자기 뒤에서 잡아오는 손 때문에 멈춰졌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자신을 끌어안는 아서의 손에 옴짝달싹 못하고 갇혀버렸다. 따듯한 체온이 등으로 전해지며 아까의 향기가 더 진하게 밀려온다. 목덜미에 살짝살짝 닿는 아서의 체온과 머리카락이 간지럽다.
"아서?! 뭐, 뭐하는거야-"
멀린이 당황하며 허둥대는 와중에도 아서는 말이 없었다. 낮고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귓가에 와닿자, 멀린은 점점 빠르게 고동치는 자신의 심장이 들릴 것만 같아서 바보같은 행동이라는걸 알면서도 가슴께를 두손으로 꾸욱 눌렀다. 아플 정도로 심장이 빠르다.
"아서...? 왜그래- 내 말에 너무 감동한거야? 아니면 설마 어딘가 아프다던가..."
피식 웃는 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오자 멀린은 자신도 모르게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어, 너무 감동해서 그런다, 멀린. 역시 넌 가장 믿을수있고 충실한... 최고의 친구야."
멀린은 아무말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있었다. 조금 더 그대로 있던 아서는 이윽고 멀린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어주더니 그대로 등을 툭 밀며 말했다.
"그러니까, 얼른 아침밥 갖고와라. 배고파 죽겠다."
멀린은 그 말에 뭐라 대꾸하지도 못하고 밀린 그대로 발을 놀려 당황 속에서 문밖으로 나갔다. 멀린이 나간 다음에도 멍하니 서서 문을 바라보던 아서는 자기도 모르게 왼쪽 가슴께에 손을 가져가 꾹 내리눌렀다. 아직도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다.
-fin